실존심리학은 영적 인간학이다

"나를 통해 인간을 말하는 방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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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심리학은 영성학이 아니다. 영적 인간학(Spiritual 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영성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영성을 말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영성을 통해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방점은 언제나 인간이다.


여기에서 영성을 1차적으로 간명하게 정의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끌리는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대개 볼 수 없는 것이다. 언어불형용성의 소재와 비가시성의 소재는 거의 동일하게 일치한다.


봐야 알 수 있다.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영성은 다시금 '모르는 것에 끌리는 성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생명체에게는 영성이 있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하다. 인간이 조금 더 적극적이다.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가는 방향성에 있어서든, 모르는 것에 매력을 느껴 다가가는 방향성에 있어서든 양쪽 다 적극적이다. 이것이 루돌프 오토가 말한 두려움과 매력이라는 경외감(awe)의 두 측면이다. 미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인 이 경외감은 곧 영성의 실제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때문에 영성을 말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 어떠한 것을 두렵고도 매력있게 느끼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두려움과 매력은 영성을 말하는 인간의 두 측면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네 가지의 양상으로 인간의 면모들을 알린다.


1. 두려움을 주는 자: 이것은 흔히 지도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통제, 지배, 운영, 관리, 정치, 독재, 권력, 군주, 왕, 질서, 수호, 율법, 규칙, 교육, 훈육, 계몽, 강제, 억압, 구속, 추방, 마초, 최면, 세뇌, 선동, 도덕, 윤리, 책임감 등의 작용이 이와 관련된다.


2. 두려움을 받는 자: 이것은 착한 아이이자 피해자의 면모다. 깨시민, 모범생, 순응, 복종, 평화, 안정, 희생양, 숭고미, 죄인, 수치심, 압박, 원죄, 반항, 분노, 원망, 열등감, 피해의식, 의존, 남용, 수동공격, 회피, 꾀돌이 등의 작용이 이와 관련된다.


3. 매력을 주는 자: 이것은 매혹하는 자로서의 예술가와 예능인의 면모다. 명예, 인기, 재능, 자기어필, 인정, 포용, 친절, 홍보, 환상, 허구, 마법사, 관심종자, 과장, 우울, 분열, 해리, 중2병, 극적 언행, 내로남불, 기만, 위선, 사기 등의 작용이 이와 관련된다.


4. 매력을 받는 자: 이것은 매혹되는 자로서의 팬덤의 면모다. 열광, 애정, 숭배, 예찬, 신앙, 도취, 황홀경, 흥분, 합일, 환락, 헌신, 충성, 지지, 양육, 과잉감정, 질투, 이간질, 배신, 소유욕, 중독, 집착, 조종, 맹목, 경직, 인지부조화 등의 작용이 이와 관련된다.


1번은 영적 교사로, 2번은 영적 학생으로, 또 3번은 영적 광대로, 4번은 영적 신도로 비유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인간이 갖는 네 가지 영적 태도며, 곧 미지에 대한 인간의 네 가지 반응양식이다. 그러나 총체성이 파편화되어 소외된 반응양식이다.


경외감에서 두려움과 매력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요소다. 실은 1번과 3번은 동일하며, 2번과 4번도 동일하다. 나아가 두려움과 매력이 작용하는 그 방향성에 있어서도 주는 것과 받는 것은 같은 것이다. 두려움을 주고 있는 자는 그 자신 역시도 반드시 두려움을 받고 있는 자이며, 매력을 주고 있는 자도 동시에 매력을 받고 있는 자다. 때문에 1번과 2번은 동일하며, 3번과 4번도 동일하다.


영적 교사는 동시에 영적 학생이고, 영적 광대며, 영적 신도다.


반드시 그 네 가지가 동시에 성립된다. 총체적으로 성립된다. 자기를 영적 교사로만 정체짓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사실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영적 신도로만 정체짓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기한 네 가지의 영적 반응양식을 잘 관찰해본다면, 인간이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작용들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하다.


두려움은 '생존'의 요소고, 매력은 '유희'의 요소다. 그리고 이 생존과 유희는 문화의 양대 기제다. 이 둘 또한 분리될 수 없이 뒤섞여 문화라고 하는 것을 발전시켜왔다.


때문에 실은 인간의 모든 문화생활이 전부 다 영성과 관계되어 있다. 인간의 문화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총체적인 영적 반응양식이다.


그러한 이유로 소외가 문제가 된다. 한 개인에게서 영적 반응양식이 총체적이지 않고 소외되어 드러날 경우 그는 원활한 문화생활에 장애를 겪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생존을 위해 유희를 포기하려 하거나, 반대로 유희를 위해 생존을 포기하려 할 때, 또 그렇게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것을 현명한 태도로 간주하려 할 때, 대표적으로 이러한 장애들이 발생한다.


이 소외로 인한 장애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성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


영성의 회복이란, 두려움에 기인한 생존과 매력에 기인한 유희의 두 문화적 기제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며, 곧 균형잡힌 문화생활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성은 어디 뜬구름 잡는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인간의 문화생활과 직결된 소재다.


그러나 동시에 영성은 단순히 문화생활을 잘 영위하기 위한 조력재 내지 보조재가 아니다.


틸리히는 아주 명쾌하게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종교는 문화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상관되어 있다. 문화는 질문이고, 종교는 응답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문화 안에는 답이 없다. 동일한 반응양식만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화다. 그래서 문화는 늘 답을 찾는다. 그 자체로 '답을 찾는 질문'이 된다. 반대로 종교는 답이다. 그러나 질문이 없는 답이다. 때문에 종교는 '질문을 찾는 답'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는 종교를 찾고, 종교는 문화를 찾는다. 서로를 그리는 연인 사이와도 같다.


그리고 이 문화와 종교의 관계성에 대한 묘사 속에서 영성은 효과적으로 입지화될 수 있다.


영성은 '미지에 끌리는 성질'이다. 따라서 영성은 문화생활이 조화롭게 영위될 수 있는 문화의 내적 차원에 인간을 머무르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바깥으로까지 인간을 안내한다. 문화의 바깥이 곧 미지인 까닭이다. 당연하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저쪽편의 미지에 대한 이쪽편의 반응양식이다. 이쪽편의 바깥은 저쪽편이다.


이처럼 인간이 문화의 바깥인 미지로 향하게 되는 그 성질을, 미지라는 여행지에 좀 더 초점을 두어 묘사하면 종교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이라는 여행자에 좀 더 초점을 두어 묘사하면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곧, 영성이란 미지와 문화 사이를 중개하는 것이며, 미지를 향해 나서는 인간 자신이 그 중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섬세하게 묘사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문화 속에서 답이 없다고 경험한 이가, 문화 밖을 향해 질문을 하며 나간 결과 미지를 조우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미지를 답으로 얻어 다시금 문화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그가 바로 답 없던 문화에 대한 그 답이다. 그는 답으로 돌아온다. 즉, 그 자신이 종교가 된다. 문화에 대한 응답이 된다. 그로 인하여, 이제 미지에 위치한 종교와, 미지의 건너편에 위치한 문화는 다시 연결된다.


그러한 개인의 모습은 분명 질문을 찾아온 답의 모습이다. "내가 답이지, 껄껄껄."이라며 늙은 구렁이처럼 도사리고 있는 도사의 면모가 아니라, "당신이 나를 불렀나요?"라며 직접 먼 길을 걸어 찾아온 정성스러운 연인의 면모를 알린다.


종교적 개인의 출현이고, 개인적 종교의 출현이다.


통상적으로는 기성의 보편제도적 종교성이 아닌 이 개인적 종교성을 곧 영성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관점에서든 여러모로 영성이라는 것이 성공적인 입지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잘 말할 수 있게 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어떠한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가? 이러한 영성의 정의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말할 수 있는가?


미지의 인간이다.


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이며, 그래서 미지로 사는 인간이다.


미지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다.


나의 얼굴이 대표적이다. 거울이 없으면 나의 얼굴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이 이 정도인데, 심지어 나라고 하는 총체적 존재는 어떠할까?


나는 완벽한 미지다.


이 우주에서 가장 말할 수 없고, 가장 볼 수 없으며, 그래서 가장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가장 모르는 것은 바로 나다.


그래서 영적 인간학이라는 것은 곧 '나의 인간학'이다.


이 '나의 인간학'은 나라고 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을, 그래서 나로 사는 인간을 묘사한다.


바로 그렇게, 나를 통해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말할 수 없는 나를 통해 인간을 말하고자 하고, 볼 수 없는 나를 통해 인간을 보고자 하며, 알 수 없는 나를 통해 인간을 알고자 한다.


실존심리학은 이러한 '나의 인간학'이다.


많은 인간학들이, 말할 수 있는 인간을 통해 나를 말하고자 하고, 볼 수 있는 인간을 통해 나를 보고자 하며, 알 수 있는 인간을 통해 나를 알고자 할 때, 실존심리학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 비가시의 영역으로, 미지의 영역으로 이동하며, 그 방향성 또한 뒤집는다.


문화를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답이 없는데 계속 답이 있는 척하던, 인간에 대한 문화적 탐구의 태도를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데, 인간을 알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나를 알아야, 인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게, 나는 미지다. 모름이다.


곧, 모름을 알아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이 모든 것이 실은 미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인간을 알 수 있다.


말했잖는가.


영성이란 '모르는 것에 끌리는 성질'이라고.


때문에, 모르는 나에 끌리면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르는 나, 즉 내가 뭘 모른다는 사실은 대단히 두렵지만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매력적이기도 할 때, 그래서 그러한 끌림에 따라 그냥 몰라지고 싶을 때, 영적 인간학은 아주 유려하게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되고, 그 모르는 나에 끌리면 된다."


영적 인간학의 이 핵심적인 실천 기제는 결국 이렇게도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실존하면 영적이다."


실존은 문화가 만들어낸 나라고 하는 허구적 문예창작물의 바깥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나를 몰라지려는 일이다. 그렇게 모르는 나를 연인으로 만나기 위해 떠나가는 길이며, 이내 문화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미지의 나로서 문화를 연인으로 다시 만나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다. 그렇게 실존의 궤적은 그 자체가 영적인 길이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나는 나다."와 같은 의미다. 나는 실존함으로써만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몰라짐으로써만 나다. "나는 모르는 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영적이다."가 성립된다. 이로 인해 이제 "나는 나에 끌린다."가 완성된다.


나는 나에 끌린다.


나는 나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나는 정말로 딱 한 번만이라도 나를 향한 절대적 사랑을 느껴보고 싶다.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되는, 더 많이 그래도 되는 인간이다.


실존심리학은 영적 인간학으로서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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