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회복되는 자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해지는 3가지의 기본 요소가 바로 의식주(衣食住)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심(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삶을 영위시켜주는 4가지의 필수 요소로서 '심의식주(心衣食住)'를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는 새로운 것의 추가가 아니라 가장 본래적인 것의 회복이다. 마음이야말로 가장 본래적인 삶의 요소다. 마음의 필요에 의해 의식주가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의 문화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아 긴 시간 동안 망각되어 왔다.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의식적으로 자각되기에 어려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회복은 다시 한 번 정확히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심의식주에서 왜 마음이 가장 근본적인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 소재가 바로 성미선진(聖美善眞)이라는 개념이다. 각기 종교, 예술, 윤리, 과학이라고 하는 영역으로 드러나는 이 개념은 그대로 심의식주에 대응된다.
심은 성이고, 의는 미며, 식은 선이고, 주는 진이다.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마음(心)은 가장 원초적인 종교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곧 만남이다. 만남이라는 것은, 만나지는 모든 것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의 배경을 모두 포함한 총체적인 느낌이다. 그렇게 만남은 언제나 전인적인 것이다. 분리되지 않은 통째의 것이다. 그래서 온전함(wholeness)이라고 부른다. 성(聖)스러운 것의 체험은 이 온전함의 체험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궁극적인 종교적 실재와의 온전한 만남을 묘사하는 모든 것을 성(聖)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언제나 만남으로서만 작동한다. 한 개인이 집에 혼자 있는 동안에도 어떠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면, 그는 지금 무엇인가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도 만나진다. 곧, 시공간의 조건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만나진다. 그 만남의 느낌 속에는, 만나는 자와 만나지는 것이 둘이 아니다. 관계성의 차원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느낌이다. 때문에 만남이란 언제나 '하나임'을 만나는 것이다.
마음은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마음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옷(衣)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미(美)와 연결된다. 미의식이 싹트는 곳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의 원형은 구약신화에서 묘사되듯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경험이다. 물론 노출된 날 것으로서의 상태는 온전함의 상태이기도 하다. 후술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온전함으로 경험되기보다는 수치심으로 경험된 까닭에 의복에 대한 욕구가 출현하게 되었다.
벌거벗은 몸뚱이에 의복을 입힘으로써, 개인은 이제 수치심을 극복하고 더 아름다운 형상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원초적인 자연적 상태에 인위적 가공을 가하는 이 작업은 자기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기표현을 통해 각양각색의 무수한 다양성을 창조해내는 예술활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의복으로 걸친 나뭇잎에서 시작된 장대한 역사다. 고로, 의(衣)는 미(美)다.
밥(食)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이것은 단지 먹는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밥은 언제나 밥그릇의 문제다. 선(善)이 정의를 창출하는 원리라고 할 때, 정의 또한 언제나 분배의 정의다. 그리고 선의 정의에 따라 밥을 공정하게 분배하려는 활동이 바로 윤리다. 이처럼 아주 명료하게 식(食)은 선(善)과 직결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롭게 주목해야 할 점은, 의(衣)가 조금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묘사한다면, 식(食)은 조금 더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후술하겠지만, 심의식주 및 성미선진은 각각의 독립적 영역이기도 한 동시에 인간군집의 문명사의 발달과정을 묘사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 방향성은 조금씩 개인에서 집단을 향해 왔다.
집(住)은 이제 본격적으로 보편성이라고 하는 집단주의의 핵심이 되는 개념을 정착시킨다. 집단이 잘 유지되려면 구조가 필요하다. 주(住)는 이 구조에 대한 것이다. 구조는 언제나 그 구조를 구성 가능하고 존속 가능하게 하는 진리를 전제한다. 그 진리를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능률적으로 운용하는 활동이 바로 과학(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포함)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과학이 창출해낸 보편적 진리에 의존해서 자신이 안전하게 '살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주(住)가 진(眞)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보편적 진리가 잘 작동하는 구조를 유지시켜주는 활동으로서 정치를 신봉한다는 사실 또한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이 주와 진의 문제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한국의 현실만 보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정치는 그 자체로 나쁜 정치가 된다. 제대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며, 그 진리적 보편성이 의심된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시대의 키워드가 된 것이다. 특정 이익집단만이 유지되는 구조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진리가 정말로 진리인지를 사람들은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거기에는 답이 없다. 답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왜 그런지를 모른다.
우리는 지금 막다른 길에 봉착해있다.
이것은 심의식주, 그리고 성미성진의 단계로 발전해온 인간군집의 문명사의 한계다. 바로 그 한계에 봉착해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삶에 대한 앎을 가공해 진리를 창조해보려던 한계.'
이는 다시 이렇게 묘사될 수 있다.
'앎을 통해 가상으로 만든 진리가 이제는 삶 위에 서서 삶을 소외시키게 된 한계.'
니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허구의 진리가 실제의 삶에 대해 저지른 폭력.'
붓다라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삶에 대해 모르는데 아는 척해서 생긴 고통.'
모세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까.
'생명[삶]의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기들이 아는 진리를 우상으로 섬긴 어리석음.'
예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를 따라 살랬잖아."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지만, 공자라면 이랬겠지.
"왜? 다들 잘하고 있는데. 괜찮아. 잘하고들 있어.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 민중들이 더욱 깨어나서 하늘이 내린 보편적 진리에 합치해 활동하는 민도 높은 민주주의의 세상 만들어가보자. 이제 다 왔어. 긴 터널의 끝이 슬슬 보이네. 내가 말한 진리대로만 하면 어긋나는 일 없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기만 해. 큰 뜻을 모르고 지금 내로남불이라고 욕하는 소인배들도 나중에는 다 정신차리게 돼. 자기들을 위해 군자들이 몸바쳐 희생했다는 거 나중에 다 알게 된다. 선구자로 산다는 건 원래 힘든 일이야.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늘 보편적 진리대로만 해. 진리가 그 설움 다 보상해줄 거야."
공자의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이들은 인류 최대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이들이다. 더 좋은 구조를 만들기 위해 보편적 진리에 헌신하던 선구자들이 삶에 대해 대체 어떠한 폭력을 자행했는가를 잊지 않는 이들이다.
이미 그렇게 파국으로 끝난 한계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희구하며 그것에 의존하여 자신이 살 자리를 마련하려고 할 때, 한계는 고착되며 공고화되어 절망이 된다. 절망은 답 없는 땅이다. 앞으로도 계속 답이 자라지 않을 황무지다.
21세기 멸종의 위기는 결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에 예감된다.
집착의 내용은 이러하다.
"앎으로 삶을 통제해야만 해."
그래서 집착은 폭력이다. 삶에 대한 앎의 폭력이다.
그런데 이 폭력은 대단히 자기파괴적인 것이다. 앎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삶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앎은 언제나 삶에 대한 앎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실은 삶이 없으면 가능할 수도 없는 앎을 통해 오히려 삶을 지배하려고 할 때, 이는 반드시 앎의 주체인 자기 자신의 근거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자신도 파괴된다.
따라서 진단될 수 있는 21세기 멸종의 양상은 자멸이다. 자연환경의 급변이나, 운석충돌이나, 바이러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의 강박적 집착에서 비롯한 재귀적 폭력에 의한 자멸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자멸은 생명이 생명 자신으로부터 소외될 때 일어난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신의 삶을 망각하고 삶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자멸의 운명은 필연이다.
인간군집의 문명사는 삶에서 앎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불확정적인 미지였던 까닭에, 그것을 불안과 두려움의 소재로 경험하게 된 이들이 어떻게든 삶에 대한 앎을 확보하고자 했다. 삶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미지에서 출발해 미선진이라고 하는 발달과정을 통해 예술에서 윤리로 또 과학으로 나아가는 동안, 앎에 대한 추구는 점점 더 커져갔고, 실제적으로 획득가능한 정보의 양도 증대해갔다. 그리고 이제는 가득한 성찬처럼 차려진 정보의 풍요를 통해 인간은 안전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탈낙원의 신화로도 비유된다. 태초의 낙원에서 인간은 생명의 나무의 과실이 아니라 앎의 나무의 과실을 얻기를 선택했다. 창조의 비밀을 앎으로써 창조주와 같아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의 은혜를 다만 누리기만 하면 되었던 낙원에서 추방되어,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황무지에 던져졌다. 스스로 창조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주가 했던 일이며, 때문에 창조주와 같아지기를 선택한 인간이라면 그렇게 해야 했던 일인 까닭이다.
이처럼 탈낙원을 통해 인간이 얻게 된 것은 의식주의 풍요로움이다. 어찌보면 낙원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풍요로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 윤리, 과학이라는 인간의 문화활동을 통해 다양성이 더욱 담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사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좋은 동반자로서 이제 인간이 위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삶에서 앎으로 향하게 된 이 탈낙원의 방향성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문명사의 발전방향 자체가 자멸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망각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 망각은 곧 창조주에 대한 망각이기도 하다. 생명에 대한 망각이며, 삶에 대한 망각이고, 인간 자신의 근원에 대한 망각이다.
바로 마음에 대한 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든 미지의 삶을 앎으로 포획해보고자 하는 과정 속에 예술이 태어났고, 포획한 것을 잘 나누어 가지려는 과정 속에 윤리가 태어났으며, 포획 가능한 구조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 과학이 태어났다. 곧, 예술, 윤리, 과학은 삶에 대한 앎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임의적인 부산물이다. 왜냐하면 삶은 끝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포획한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특정한 한 순간만을 정지사진처럼 기록하는 것일 뿐이다. 그 사진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것이 삶 자체는 결코 될 수 없다. 삶 자체는 이미 빠져나가고 없다.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 윤리, 과학, 즉 미, 선, 진은 언제나 삶을 넘어설 수가 없다. 삶에 앞설 수 있는 도리가 없다. 삶이 요리조리 앞서 펼쳐내는 모양새를 뒤에서 바라보며 그 꼬리를 쫓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것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할 수 있는 정확한 주제파악이다.
아무리 탁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삶을, 생명을, 성스러운 것을, 미지를, 창조주를, 마음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인간 자신이 정직하게 인정하게 될 때, 이를 실존의식의 자각이라고 말한다. 유한성 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유한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인간 자신을 넘어서 있는 초월성의 소재를 함께 자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삶과, 생명과, 성스러운 것과, 미지와, 창조주와, 마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종교적 태도가 출현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유한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망각했을 때는 초월성의 소재도 함께 망각됨으로써, 결국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이 자아도취의 방식은 그러나 조금 교묘한데, 비유하자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숭배하는 양상을 띠곤 한다.
곧, 삶에 대한 앎을 통해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발명품인 예술, 윤리, 과학을, 인간 자신보다도, 그리고 삶보다도 높이 두며 그것을 진리처럼 예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과잉된 극성과도 같다. 정확한 우상숭배의 모습이다.
무슨 흑염소와 인간의 합성체 같은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삶의 부산물을 오히려 삶보다 위에 두고서 그것을 삶 대신에 신앙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다.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앎이, 그것도 삶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가능한 앎이, 오히려 삶보다 높이 위치해서 자기의 입장을 망각하고 역으로 삶을 소외시키려는 이 우상숭배의 행위는, 그래서 결국 삶에 대한 앎의 폭력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삶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는 자기파괴의 폭력이 바로 이 앎의 폭력이다.
삶에서 나왔으나, 삶을 부정하고 자기파괴적 우상숭배로 치닫게 된 폭력적 앎의 상태, 이것이 곧 멸종의 징후다.
창조주에서 비롯하였으나, 창조주를 부정하고 자기파괴적 우상숭배로 치닫게 된 폭력적 인간군집의 상태, 이것이 곧 멸종의 징후다.
마음에서 생겨났으나, 마음을 부정하고 자기파괴적 우상숭배로 치닫게 된 폭력적 자아의 상태, 이것이 곧 멸종의 징후다.
자기 자신을 존재하게 해주는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고 있으니, 결국 답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 최후의 국면과도 같다.
이 최후의 국면으로부터 모든 것을 돌이켜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술한 것처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이 망각하고 있던 것을 정확히 상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삶에서 앎으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펼쳐진 이 모든 일을 인간은 대체 왜 하고 있었는가?
사실은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어떻게든 알고자 한 것이다.
좋아하는 아이의 혈액형과, 취미와, 발가락 사이즈를 알고 싶어하듯이, 그렇게 삶에 대해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필사적으로 알고자 해온 것이다.
삶을 단지 불안과 두려움의 소재로서가 아니라, 설렘과 감동의 연인으로서 만나고 싶었기에, 그리고는 그 만남을 통해 삶과 궁극적인 하나가 되고 싶었기에, 이 모든 일을 인간은 해온 것이다. 의식주를 갖추고, 예술, 윤리, 과학의 문명사를 펼쳐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앎을 통해 성공적인 결과들을 거두게 됨에 따라, 인간은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사실을, 심지어는 자신이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연인에게 선물할 반지를 사기 위한 지난한 노력을 통해 결국 반지를 얻게 된 이가 자신이 들인 노력의 시간에 도취되어 연인보다 반지를 우선하게 된 경우와 같다.
앎의 능력 자체가 아니다. 무엇을 향한 앎이었는지 그 앎의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삶이다. 모든 앎은 삶에서 나와 다시금 삶을 향한다.
삶에서 앎으로 향하는 문명사의 방향성은 역설적으로 삶을 지시하고 있을 때만이 길을 잃지 않는다.
탈낙원을 한 인간은 그 가슴속에 낙원을 품고 있을 때만이 지상에 천국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옷과 밥과 집은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을 때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예술과 윤리와 과학은 그 핵심에 종교성을 담고 있을 때만이 우리를 정말로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모든 의식주(衣食住)는 심(心)에서 나와 다시 심을 향하며, 모든 미선진(美善眞)은 성(聖)에서 나와 다시 성을 향한다.
이것이 회복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던 이들은 그래서 밥을 먹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빛낸다고 말하고, 옷을 입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빛낸다고 말하며, 집을 짓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빛낸다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영위하는 그 모든 것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의 대가들, 윤리의 대가들, 과학의 대가들 또한 말해왔다.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심화시켜 나가던 그 끝에 가장 깊은 층위에서 만나게 된 것은 종교성이라고.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에 대한 신비가,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운 미지가 드러나게 되는, 그래서 더 감동적인 신비가 바로 거기에 있었노라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삶에서 앎으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펼쳐진 그 모든 인간의 스펙트럼은, 삶에 대한 가장 거룩한 찬송의 영원히 그치지 않을 멜로디로 우리에게 다시금 새로이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주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회복한 입장에서, 더욱 일치된 형태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은 입는 것이고, 먹는 것이며, 그 위에 거하는 것이다.
마음을 멋지게 입고, 마음을 양식으로 섭취하며, 마음을 안심할 수 있는 인간 자신의 근거로 삼을 때, 그것이 하나인 만남으로 사는 길이다. 창조주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창조주를 닮아가게 된, 창조주의 가장 사랑스러운 피조물로 사는 길이다. 그렇게 분리되지 않은 하나로, 한 나로 사는 길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앎이 삶을 망각한 채 자기만을 확장하는 자아도취에 빠진 그 대표적인 결과는 바로 집단주의다. 앎이 삶을 폭력적으로 대해 만들어낸 보편적 진리라는 망상과 착각의 결과물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집단주의인 까닭이다.
이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이 되는 길, 이것이 곧 종교적인 길이고, 성스러운 길이며, 마음의 길이고, 삶을 회복하는 길이다.
답 없는 막다른 곳에서 돌아나와 다시 길을 찾는 길이며, 새로이 길이 되는 길이다.
이것이 정확한 탈낙원의 방향성이다.
인간은 바로 개인이 되기 위해 낙원에서 나왔던 것이다.
다른 말로는, 인간은 실존하기 위해 탈낙원한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실낙원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탈낙원이다. 탈낙원은 낙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낙원을 초월한 것이다. 곧, 지금은 이미 흘러가버려 낙원이 아니게 된 대상적 낙원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 스스로 지금 현재의 삶을 낙원으로서 회복하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 여정을, 본질로부터 나온 실존의 본질화라는 개념으로 묘사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는, 보편적 진리가 만들어낸 우리(cage; we)에서 나와, 내 마음을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알아봄으로써 그 마음이 알려주는 바대로 내가 되며, 그렇게 거듭 새로운 나로서 사는 것이다. 정말로 살아있는 나로서 늘 사는 것이다.
늘 살아있다는 것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늘 회복한다는 것이다.
심의식주를.
마음을 입고, 마음을 먹으며, 마음에 뿌리내려 사는 삶을.
나라고 하는 삶을.
이것이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말한 그 의미다. 나인 삶을, 그 하나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사랑하고 싶었던 인간은, 사실 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다.
모든 인간의 소망은 나다.
정말로 한번 믿어보고 싶은 것은 나다.
그렇게 인간이 가장 살고 싶은 것이 바로 나다.
그 사랑대로, 그 소망대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질지니, 마음이 눈앞에서 펼쳐낸 의식주의 스펙트럼을, 내 마음껏 입어도 되고, 내 마음껏 먹어도 되고, 내 마음껏 쉬어도 되는, 풍요로운 나의 것으로서 온전하게 허락한다면, 스스로 그렇게 이미 나다. 나는 지금 이곳의 낙원에 있다. 인간이 나로 회복된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