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대립하는 연극이 나를 만든다고?"
무협지를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란 아이들이, 그 눈물과 함께 유년기를 흘려보내지 못하고 덕지덕지 끼인 눈꼽으로 남긴 생물학적 성체가 될 때 갖게 되는 환상이 있다.
그것은 진정한 적이 나를 만들어준다는 환상이다. 융의 연금술적 원리니, 헤겔의 역사변증법이니, 슈미트의 정치공학이니 하는 이름으로 이 환상은 마치 정합적인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어 삼류 저질 스토리들을 양산하게 된다.
삼류 저질 스토리의 핵심은 언제나 자아도취다. 아동이 자기를 성숙한 존재로 위장해 젖비린내를 세상에 더욱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영웅적 스토리텔링이다. 물론 이 스토리텔링은 자아 하나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아주 교묘하게 타자라고 하는 소재를 끌어들여,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하게 성장해가는 자아의 신화를 그려낸다.
처음에는 적으로 알려지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타자를 정당하게 존중하게 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자의 장점을 흡수하게 되며, 결국에는 타자의 소망을 대신 이어받아, 그 멋진 타자가 가던 길을 이제는 자아의 길로서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내용이 그 골자를 이룬다.
이 삼류 저질 스토리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의 시체를 넘어서 가라."
그리고 교묘히 감추어진 의도를 노출시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너의 시체를 넘어서 갈게. 기왕 가는 길에 식량으로 챙겨서. 쩝쩝 허벅지살 맛있네. 꾸역꾸역."
이것은 결국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과, 그 부모의 희생을 통해 정신 바짝 차리고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아이의 모습을 연출해내는 양육의 연극이다. 자매품으로는 스승과 제자 이야기, 좌파와 우파 이야기, 히어로와 빌런 이야기 등이 있다.
이 삼류 저질 스토리의 연극 속에서, 무협지적 자아는 부모의 역할을 맡거나 또는 아이의 역할을 맡는 어떤 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일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양쪽의 역할이 한 개체에게서 번갈아 교차하며 드러나기도 한다. 삼류 저질 쇼가 계속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무협지적 자아는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협지적 자아가 수행하는 부모로서의의 역할은 대개 위악의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
무협지적 자아는 처음에는 사람들을 진정한 어른이 되게 하려고 친절한 가르침으로 계몽하려 하나, (무협지적 자아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해 그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무협지적 자아는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악의 역할을 자처하려고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일이다.
무협지적 자아로 비대한 정치인들은 자기가 악역이 됨으로써, 사람들이 그 악역에게 받는 부당한 피해를 극복하고 타파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자기의 권리를 찾아서 시민의식을 자각하고 서로 연대하게 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즉, 악역인 자기와 싸우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와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여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어냄으로써 깨어있는 시민으로 각성하게 된 후에는, 얼마든지 자기를 넘어뜨리고 진정한 민주적 주체의 길을 나아가라고 이 무협지적 자아는 강렬하게 요청한다.
"나의 시체를 넘어서 가라! 내가 악역을 떠맡아 너를 수련시켜주마!"
그렇게 자기 자신이 대단히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일부러 악역이 되어 모두를 강한 존재로 성장시킨 후에 흡족한 미소를 띠고 물러서면, 나중에 그 큰 뜻을 깨달은 사람들이 실은 그 악역이 자신의 참스승이었음을 알게 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다.
유치함이 하늘을 찔러 하늘도 구토하게 되는 이야기다.
한편 이 삼류 저질 스토리 속에서 또 다른 축인 아이로서의 역할이 떠맡아져 살아오게 된 무협지적 자아는 이제 약탈의 습성이 몸에 배이게 된다. 진정한 사람으로서의 성장이라는 대의의 포장지가 입혀진 까닭에 약탈은 그것이 약탈이 아닌 것처럼 미화되며 또 공고화된다.
이로 인해 아이로서의 무협지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한 양육적 스승으로서 자신에게 우쭈쭈를 해주며 자신을 더욱 고귀하게 키워주는 일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람들이 피와 살점을 바쳐 자신의 성장을 도울 모든 자원을 제공해주는 일이 그들의 지당한 의무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남들이 자기를 위해 희생하여 자기가 그들의 자원을 얻게 되는 일이 진정하게 자기가 사랑받는 증거라고 간주하기까지 한다. 참피[실장석]의 상태다.
"너의 시체를 넘어서 갈게! 내 앞에 스시와 스테이크처럼 더 많은 양식을 쌓아줘!"
그렇게 카니발 콥스, 인신공양의 파티가 커다란 감동 속에서 펼쳐진다. 남의 죽음으로 생겨난 이득을 취하면서, "아 나는 사랑받고 있어."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다.
시체썩는 냄새가 하늘을 찔러 하늘도 구토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처럼 무협지적 자아가 펼쳐내는 삼류 저질 스토리 속에서는, 잡아먹히는 자는 자신이 진정한 스승이 되었다는 자아도취의 만족감 속에서 잡아먹히고, 잡아먹는 자는 자신이 고귀한 왕자 및 공주가 되었다는 자아도취의 만족감 속에서 잡아먹는다.
이를테면 잡아먹히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전두환을 이겨냈던 방식으로 너희도 진정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단다. 내가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어 너희의 앞에 커다란 벽으로 서있도록 할게. 사악한 나를 너희의 정의로운 주먹으로 무너뜨려라.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자유의 깃발을 높게 들어라. 나를 넘어서 진정한 네 자신의 길로 맹진하거라."
또한 잡아먹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꼰대들아,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우리 젊은 피가 보여줄게. 우리는 너희와 달라. 우리는 서로의 개성을 아름답게 꽃피워가는 개인이면서도, SNS를 통해 서로를 지지하는 사이버 연대를 이루며, 진정 하나이자 함께로 행동하는 지성이라구. 하나하나가 다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들이면서, 그 놀라운 힘을 뭉쳐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깨트려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이야. 우리가 만들어갈 멋진 세상을 한번 지켜보라구."
연극대사는 이어진다.
"그래 네깟 놈이 자신있다면 어디 한번 해봐."
"흥, 두고 보라구요. 당신 생각대로는 안 될테니까. 내가 더 진정한 게 뭔지를 보여드리지요."
소위 도판이라고 하는 데서도 이러한 연극은 늘 반복상연된다.
"스승님의 깨달음은 저를 억압합니다. 저는 그런 깨달음 싫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빛날 수 있게 만드는 진정한 깨달음을 저는 얻을 겁니다."
"이 건방진 놈이 어디서! 그럼 여기 문파를 나가서 어디 한번 네놈 하고 싶은대로 해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치기어린 놈 같으니라구." (내심 뿌듯)
"네, 그러지요. 제가 한번 진정한 깨달음, 스승님과는 다른 저만의 깨달음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설령 똥이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똥이라는 것을 저는 사랑할 겁니다. 저만의 똥을 저는 스승님의 된장보다 더 멋지게 만들 겁니다." (의기 충천)
"어허, 이놈이!" (그거다, 바로 그거야, 인석아. 이제 조만간 큰 소식이 들려오겠구나, 껄껄껄.)
통속적인 무협지의 삼류 장르 문법이다. 그 문법에 기초한 삼류 저질 대사들이다.
이 삼류 저질 스토리에, 나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손끝이 오그라들어 죽게 될 삼류 저질의 운명에, 나는 한사코 복종하지 않는다.
진정한 적과, 그 적을 통해 이루는 진정한 대립구조가, 진정한 나를 만들어준다는 삼류 뽕빨 판타지에, 적에 의존하여 나를 세우는 그 비루한 환상의 연극에, 나는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
적이 없는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적(敵)이 없고 적(籍)이 없다. 적과 대립하는 삼류 역할극을 떠맡지 않고, 진정한 나를 얻는 삼류 스토리에 소속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친구라는, 알고 보니 쟤도 착한 놈이라는, 또 다른 유아적 판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동안 삼류 저질 연극 속에서 촌스러운 역할놀이만 하다가 죽은 너의 시체를 보며, 거기에는 아무 것도 본받을 것이 없으며 동시에 아무 것도 복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다만 이것이 허무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나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게 나는 너의 시체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 것도 취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의 시체를 넘어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건드려지지 않고 남은 그 자리에서, 흙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꽃이 필 것이다.
그 꽃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