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의 연인이 되어보자 #5

"말씀과 마음"

by 깨닫는마음씨



기독교적 감수성의 언어로 묘사해보자면, 마음의 연인이 되는 방법은 바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많은 굴절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그 핵심적 내용이 연인에 대한 묘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는 종교적 감각을 연애 감각으로 묘사하는 일에 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정확하며 유효한 방향성이다.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말 그리고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면 수월해진다.


말, 이야기, 말씀에 대해 손쉽게 풀어보자.


말은 정보의 전달이다.


이야기는 정보의 축적이다. 이 축적의 활동에는 정보의 가공, 변환, 통제가 포함된다.


말씀은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내용이다. 그러나 말씀의 내용은 비어있다. 테두리다. 울타리다. 품이다. 마음이 담길 바로 그 품이 바로 말씀이다.


그럼에도 말씀을 굳이 정보화하고자 한다면 말씀은 오직 이 정보만을 전할 뿐이다.


"내가 너를 위해 여기에 있다."


이 정보는 보통 복음이라고 불린다. 기쁜 소식이다. 마음에게 이 이상은 없을 가장 기쁜 소식이다.


마음의 연인이 되는 길은 마음에게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마음을 위해 있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친히 우리 자신이 전하는 것이다.


마음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의 이름을 나라고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게 말씀을 전할 때만 비로소 알려지고 드러나게 되는 존재 그 자체의 이름이다. 굳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게밖에는 따로 형상화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교육, 학습, 모방, 기억, 습관, 사회적 관습, 역사적 반복, 자아패턴, 이야기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 어떤 아(我)도 아니기에 나를 무아(無我)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이 무아적 나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대한 부모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있어. 우리 마음이가 그랬구나. 많이 슬펐구나. 많이 화가 났었구나. 혼자 너무 외로웠구나. 괜찮아. 이제 내가 왔어. 내가 여기에 있어. 내가 다 알아줄 거야. 늘 우리 마음이 옆에 있을 거야. 사랑한다. 내 마음이야."


이런 촌스러운 언행은 무아적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아적 나인 척하고 싶어하는 자아의 언행이다. 자기가 바로 마음이면서 자기는 마음 아닌 척 사기치고 있는 기만적 자아가 곧잘 하곤 하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부모의 품을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는 피터팬들이 자기가 대신 부모인 척하며 자기 자신을 달래고자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이렇게 자식처럼 상정한다면, 마음과 연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연인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연인이 될 이들이 서로 누군가의 자식인 입장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연인이다.


대개는 이렇지 않다. 자기 아빠의 모습이 되어 연인을 자식으로 대하고, 자기 엄마의 모습이 되어 연인을 자식으로 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부모의 영향력을 자기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지속적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이것은 마치 타인들이 자기 부모를 신으로 섬기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랑하는 이를 자기 부모의 노예로 삼으려고 하면서 정말로 연인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단순하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인 까닭이다.


'자유+자유=사랑'


이것이 사랑의 공식이다.


그러나 이 공식을 편의대로 뒤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의지가 있다. 이것을 이야기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다시 풀어보자.


말은 음성언어다.


이야기는 문자언어다. 이야기는 음성으로 발화된다 하더라도 문자언어의 구조와 특성을 갖는다.


그리고 말씀은 존재언어다. 말씀은 언제나 시공을 넘어선 존재의 언약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말은 즉시성을 갖는다.


이야기는 보존성을 갖는다.


말씀은 영원성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존성과 영원성을 혼동하는 일이 생겨난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를 말씀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야기가 말씀 대신에 영원성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이야기를 자꾸 울타리처럼 마음에 씌우려 하는 의지가 작동한다. 물론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적용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울타리는 마음에게는 그저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일 뿐이다.


이야기에의 의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을 감옥에 가두고자 한다. 그러나 이야기에의 의지를 행사하는 이는 자기가 오히려 마음을 따듯하고 안전한 울타리처럼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보존성과 영원성에 대한 착각이 강렬한 확신으로까지 굳어진 것이다.


금방 산화되어버리는 말을 자기가 이야기로 만들어 보존할 수 있게 된 까닭에, 그 보존의 힘을 흡사 영원을 담보하는 힘이라고까지 과대망상을 해버린 것과 같다.


연애의 차원에서 묘사하자면, 언제라도 그의 자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연인을, 자기가 이야기의 각본으로 만든 연극에 강제로 끌어들여 지지고 볶아 자기의 입맛에 맞는 요리처럼 만든 뒤, 그렇게 연인의 자유를 봉쇄한 뒤, "내가 바로 이처럼 너를 영원히 가치있는 존재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라고 하고 있는 셈이다.


연인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말씀처럼 기만해서 사용하고 있으면 그게 가스라이팅이다. 보통 그 보존성의 이야기들은 전술한 것처럼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당해서' 학습한 방식으로 세습된다. 결국에는 자기 부모가 진리라고 주장하며 연인의 눈을 자기의 눈처럼 함께 흐리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숭배 또한 다른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말씀으로 삼는 것이 우상숭배다.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이들은 재미있게도 자신이 굉장히 우월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소비자들이 말에 대해 갖는 우월감이다. 말이란 것은 쉽게 사라지는데, 자신은 그 사라질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보존함으로써 현명하게 자기의 재산으로 축적하고 있다는 자기평가에서 나오는 그 우월감이다.


이 이야기 지상주의에 빠져, 이들은 사실 말과 말씀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들의 핵심적인 문제다.


말의 즉시성과 말씀의 영원성은 표면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3차원의 구체라도 평면에 그려지면 점과 다를 바가 없는 까닭이다.


자기 삶의 깊이를 감지하는 이들만이 말씀을 말씀으로 알아 듣는다. 대개는 고통이 이 깊이를 개방한다. 표면에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기에, 고통받는 이는 자연스럽게 깊이를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고통 속에 시름하던 이에게는 말씀을 더 잘 알아들을 가능성이 개방된다. 종교체험 연구가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숭배하는 이들은 깊이로 잘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도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깊이의 소재가 아니라, 강함의 소재로 경험한다. 그리고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범주의 것이다.


이야기의 숭배자들은 고통이 강하냐 약하냐의 범주 위에서 고통을 경험한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생겨먹은 까닭이다. 자극의 강도에 따라 갈등의 강도가 정비례하고, 갈등이 커야 이야기의 효과가 커진다. 그리고 그렇게 더 영향력이 증대된 이야기들이 많이 축적됨에 따라 이들은 자기의 재산이 많아진 것 같은 만족감을 경험한다.


즉,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이들에게 이야기가 제공하는 고통의 강함이란 결과적으로 자신의 부유함을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고통은 이들에게 실상은 찬미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이들은 더 많은 고통을 수집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 있게 침잠하면 안 된다. 그럴 시간에 더 많이 고통을 확보하러 나가야 한다.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우상숭배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얕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얕게 인식하게 된 삶이니 삶이 얕보이는 일은 당연하다.


삶이 우습다.


삶의 즉시적인 발화인 말도 우습고, 삶을 심지어 영원성의 차원에서 노래하고자 하는 말씀도 우습다.


이들에게는 말의 즉시성이나 말씀의 영원성이나, 말하자면 재산이 없는 거렁뱅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축적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야기로 말씀을 참칭하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된다. 자기는 거렁뱅이 예언자가 아니라 부자인 예언자이니까 자신이 더 훌륭한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비유해보면, 자기는 거렁뱅이 연인이 아니라 부자인 연인이니까, 자신이 더 마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에의 의지란 결국 이렇게 자기가 가진 소유물에 입각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실천하는 의지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자유=사랑'이라고 하는 공식을, '소유+소유=사랑'이라는 공식으로 뒤바꾸려는 의지다.


소유를 달리 말하면 구속이다. 그러니 이 일그러진 공식은 '구속+구속=사랑'이라는 형식을 갖게 된다. 때문에 이 공식이 사랑을 얻는 공식이라고 숭배하고 있는 이들이 그 결과로 서로를 악마처럼 끝없이 구속하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거렁뱅이고, 소유는 부자라고 해도 좋다.


이 우주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던 존재가 있었다.


기독교적 언어로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모든 것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진 하나님'은 결국 '없이 계신 하나님'이 되었다.


왜 그럴까?


인간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던 천상의 왕국을 버리고서라도 인간을 향해 떠나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인간에게 향하기 위해, 하나님도 소유물을 다 버리고 자유로우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자유=사랑'을 완성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인간과 가득 사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오직 하나, 연인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가 가진 모든 우주를 다 버리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이 연인을 향해 떠난 존재에게, 연인의 크기란 그 모든 우주만큼이다.


하나님에게 인간이란 크기가 그러했다.


그러한 크기의 인간의 앞에 도착한 이 '없이 계신 존재'가 이제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해 여기에 있다."


이것은 말씀이다. 그 언어적 내용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연인만을 선택한 그 삶이 스스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말씀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삶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알린 것이 바로 말씀이다.


오직 마음만을 향해 살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나의 존재를 알게 된다.


내가 마음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나는 마음에게 초라한 거렁뱅이로 보일까?


무슨 말씀을.


우주 전부를 끌고온 이로 보인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 우주 전부의 소유를 해지함으로써, 네가 바로 나에게는 우주 전부와 동격의 의미라고, 나의 전부라고, 실증적으로 우주 전부라고 하는 것을 체감시켜주는, 그렇게 우주 전부처럼 자신을 자유롭게 체감시켜주는 최고의 연인으로 보인다.


사랑은 가장 비워진 최고의 거렁뱅이가 하는 것이다.


가장 비워졌기에 가장 자유로운 것이다.


가장 자유롭기에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표현해보자.


"내가 너의 자유를 위해 여기에 있다."


우리 자신이 마음에게 전해야 할 것은 이 사랑밖에 없다.


바로 이 사랑의 말씀을 마음에게 전해 마음이 자유롭도록 하는 것이 마음의 연인이 하는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의 연인이 되어보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