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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인이 되어보자 #6

"마음에 대해 'Yes!'라고 말하는 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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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간사에서 늘 커다란 비극을 낳는 원인이 되어온 역대급의 거짓말이 있다. 그런 주제에 가장 칭송되며 대다수가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이러하다.


"강자는 잠정적으로 악하며, 약자는 잠정적으로 선하다."


정말 최악의 이야기다.


니체는 분명히 이 이야기를 최악으로 판정했다. 지상 최대의 거짓쇼의 각본이다.


사실은 그 반대다.


약하니까 필연적으로 악해진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대하게 된다.


약한 것은 자기의 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약을 빤다. 그리고 그 약을 빤 결과로, 악한 것이 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약한 것이 자기를 강한 것인 척 기만하려 할 때 악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강함에 대한 착각이 놓여 있다.


아주 쉽게, 폭력을 강함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이가 그 폭력을 가한 주체를 강자로 보며, 자기도 동일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면 비참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폭력의 경험자는 자신이 당한 그 폭력을 실은 동경하게 된다.


그렇지만 폭력에의 부정적 경험에 의해 "폭력은 나쁜 것이다."라고 인식한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폭력을 동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언어적 우회가 이루어진다. 자기가 동경하는 것은 나쁜 폭력의 힘이 아니라 착한 정의의 힘이라고 바꾸어 말하는 식이다. 자신이 강해지면 그 힘을 결코 폭력적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로 기만한다 하더라도, 그가 동경하는 것은 자신이 당했던 바로 그 동일한 방식의 폭력일 뿐이다.


이처럼 폭력을 그 언어만 바꾸어 강함이라는 이름으로 동경하고 있는 동안, 강함에 대한 착각은 이어진다. 폭력적인 것을 자꾸만 강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에 대한 태도도 이중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은 그 폭력을 행사할 능력을 얻고 싶어하면서, 남이 얻으면 맹렬히 비난한다. 쉽게 말해, 내가 얻으면 강함, 남이 얻으면 폭력이다. 내로남불의 분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실제의 강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강자가 아니라 언제나 약자다.


단적인 예로, 남을 괴롭히는 일진 애들은 강해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약해서 남을 괴롭힌다. 일진들이 대개 남을 괴롭히는 데 활용하는 도구는 패거리다. 관계라고 하는 도구다. 약한 이가 무리를 지어 그 안에서 강한 척하며 다른 이를 괴롭히는 모습이 일진들이 행하는 폭력의 양상이다.


자신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어주던 패거리들이 다 가출해서 혼자만 학교에 나와 있는 일진 아이를 한번 떠올려보자. 평소와는 다르게 수줍은 문학소년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 뒷자리에서 조용히 잠이나 자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모습은 흡사 자기가 찐따라고 부르며 괴롭히던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할까?


약자만이 약자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보이는 이러한 그림도 있다. 일용직 노동자 청년 하나가 철근 틈새에 버려진 새끼고양이를 발견하게 된다. 굶주려 있던 새끼고양이는 무섭지만 먹이를 청하러 미유미유 울면서 청년에게 기어 다가간다. 청년은 한참을 열심히 움직여 자기에게 끝내 도달한 그 고양이를 들어올려 웃음을 짓고는, 새끼고양이가 출발했던 저편으로 휙 집어던진다.


공포와 충격으로 새끼고양이는 더욱 크게 울기 시작하며, 그럼에도 다시금 청년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한다. 도착하면 똑같이 다시 한 번 던져질 그 운명을 향해, 그럼에도 절박한 최선으로 몸부림을 친다. 이 과정은 몇 차례 반복될 것이고, 그럴 때마다 청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더욱 크게 지어질 것이다.


이 청년은 강자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기가 전능한 왕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는 약자에 불과하다.


약자만이 왕이 되려고 한다. 다른 약자를 지배함으로써 자기는 약자에서 벗어나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그렇게 약자만이 악이 된다.


이 세상에는 음모론 사업의 종사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악의 근원 같은 악한 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약자라는 만악이 무수하게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약해서일까? 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인간이 악이 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이 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약하다는 착각이 만연해진 것이다.


바로 이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인간 자신이 약하다는 착각을 양산한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갈등의 요소가 있어야 이야기로 성립되며, 최고의 갈등은 바로 성장의 갈등이다.


성장의 내러티브가 성립되려면 먼저 주인공이 약자여야 한다. 약한 주인공이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이것이 제일 잘 팔리는 이야기다. 세간에서 성공을 담보해주는 이야기다.


이처럼 주인공으로 성공하려면 약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야기가 지배적으로 확산시키는 가운데,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 이야기의 세뇌작용을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약자라는 자기정체성을 적극 채택한 뒤 견고히 유지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실제로 약자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의해 약자처럼 만들어진다. 나아가 그 약자의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삼는 일에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약자를 예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언어적 획책을 꾀한다 하더라도, 정신병은 예찬의 소재가 아니라 돌봄의 소재다.


조금 극단적인 예로, 외팔이 무사가 주인공으로 나와 강력한 검술을 선보이며 '착한 정의의 힘'을 집행하는 이야기에 감격한 이가, 결국에는 자기의 팔을 일부러 자른 뒤 이제 진정한 주인공으로 자기의 길을 갈 것이라며 수련을 위해 외팔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근력을 키우기 위해 배달봉지를 든 한 팔을 직각으로 유지하려는 동작으로 인해 그가 배달하던 짬뽕국물이 다 새어나와 소비자로부터 항의를 받게 되었을 때, 그의 생각은 이러하다.


'이 더러운 자본주의 돼지새끼들, 약자인 나를 배려해주지 않고 이렇게 부당하게 무시하다니, 어디 두고 보자. 진정한 나의 길을 가서 성공한 뒤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겠어.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동물처럼 미개한 네 얼굴에 짬뽕국물을 부어주겠어. 그리고 5만 원권 지폐 100장을 세탁비나 하라고 땅바닥에 던져주겠어.'


물론 다른 생각도 가능하다.


'허허. 저 분이 오늘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있으신가 보구나. 그래서 나에게 화를 전가하시려나 보다. 그래, 아직 완전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그 독소를 받아주는 것도 수련하는 이가 해야 할 도리겠지. 자, 화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듣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외팔이지만, 당신을 향한 이 마음만은 온전합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해도 좋다.


짬뽕만 제대로 배달한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 빠진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러한 자기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간주하기에,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자각이 없다. 즉, 자신이 남을 괴롭히는 악을 행하면서도, 늘 선량한 약자 내지 순결한 피해자처럼만 자신을 입지화한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각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은 100%로 선량한 인물의 행위를 하고 있다. 이야기가 '약하니까 선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이러한 경우, 자기를 비난하는 강한 언행을 보이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악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야기에 따라 '강하니까 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야기는 망상구조를 심화시킨다.


강함과 약함의 개념을 뒤바꾸어, 정확한 현실의 인식을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언어를 기만적으로 남용하는 방식 속에서는, 우리에게는 연애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흔히 자신을 약자로 입지화하고 있는 이야기 소비자들은, 자신이 바로 그렇게 약하기 때문에 연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약함을 보상해줄 소재로서 연인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연인이 아니라 엄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를 요구하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연인과 엄마는 다르다는 것이다.


강함과 약함을 뒤바꾸듯이, 연인과 엄마를 뒤바꾸는 이 언어용법이 우리가 착각 속에서 길을 잃도록 만든다. 연인에게 향하는 길이 보이지 않도록 만든다.


공사장의 새끼고양이가 그 모습 그대로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일과 같다.


한번 이렇게 물어보자.


마음은 약할까, 강할까?


이것은 공사장의 새끼고양이가 약한지 아니면 강한지, 또는 아스팔트 틈새로 피어나 있는 들꽃이 약한지 아니면 강한지, 또는 전쟁의 포화 속에 황폐해진 아프리카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5살 여자아이가 약한지 아니면 강한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것만은 분명하다.


불발된 포탄이 박혀 있는 건물의 폐허 속에서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 놀고 있는 아이의 웃음처럼, 그 모든 것의 실제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서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보다는 강하다.


그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야기보다는 강하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생환한 실존상담자인 빅터 프랭클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할 것이다.


"Yes!"


"그 모든 비극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Yes!'라고 말하겠습니다. 그 모든 비극의 이야기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언제나 더 강했습니다. 'Yes!'"


마음은 생명작용이다.


생명은 강하다. 결코 약할 수 없다.


마음은 강한 것이다. 그 마음으로 사는 인간도 강하다.


모든 인간은 원래 강하다.


마음이 있는데 약할 수가 없다.


마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연인이 있는데, 인간이 도무지 약할 수가 없다.


마음도 강한 것이고, 마음의 연인인 우리도 강한 것이다.


강한 것과 강한 것이 만나 피어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인간이 본래 그렇게 태어난 바인 강자는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는다. 강자는 사랑의 작용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약자는 자신을 강자처럼 꾸미는 이야기로 살고, 강자는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사랑으로 산다.


여기에서 약자의 메카니즘은 전술한 것처럼 복잡하게 꼬여 기괴하기까지 하다.


인간이면 누구도 약자가 아니라 강자인 그 출발점에서, 일부러 약자의 이야기를 소비해 자기를 약자처럼 만들고, 또 다시 성장의 이야기를 소비해 자기를 언젠가는 강자가 되리라고 예언된 주인공인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는 계속 약자로 입지화해 자기의 피해자적 정당성을 주장하며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는 일에 매진한다.


병약한 것을 동경하는 병적인 고집이다. 니체는 이 병약한 것에 대한 탐미적 집착을 데카당스라고 부른다. 그 본질은 사실 고급언어로 미화된 유아적 퇴행욕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가 관심 가져주지 않으니 인생이 허무하구먼. 그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다 이렇게 공허한 것이지. 나의 언어만이 이 잿빛의 무의미한 세상을 채색해주는 유일하게 허락된 축복이로소이다. 언어여 비상하라! 이야기여 영원하라! 인간이여 이야기 속에서 그대는 불멸일지어라! 하하하!"


이것을 만약 엄마를 찾는 마음이라고 정직하게 개방한다면, 심지어는 이 마음조차도 실은 약하지 않다.


엄마를 찾아 부르는 포유류 새끼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들어보지 못했는가?


악에 받쳐 운다.


악을 쓴다고도 말한다. 악을 다른 것을 괴롭히는 악(惡)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본래의 목적으로 쓴다.


그러니까 악도 제대로 못 쓰는 것들이 악한 약자다.


이야기가 이렇게 만들었다. 이야기 내내 "미융! 미융! 미융!" 하며 새끼고양이가 엄마를 찾아 울고 있으면 스토리가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끼고양이가 자기 존재의 포효를 빨리 멈추고 약자로 남아 이야기가 부여하는 시련의 사건들을 극복해간 뒤 나중에 강한 라이온킹이 되어 왕좌에 오르는 스토리여야 다들 박수도 하고 돈도 지불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이야기가 인기있냐면, 다들 자기가 약자라고 착각하는 이야기의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시 이와 같은 류의 이야기를 소비하게 됨으로써 언젠가는 자기 또한 왕이 될 수 있다는 최면효과가 연장되는 것이다. 이야기로 병에 걸리게 하고, 이야기로 다시 그 병의 통증을 완화해줄 마약을 공급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가 걸리게 되는 경우를 한번 상상해보자.


"너는 평생 진짜 마음[진심]으로 연애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사악한 저주가 아닌가?


이야기가 바로 그러하다.


약자를 예찬하는 이야기는 마음의 연인이 되고 싶었던 우리를 고작해야 마약의 연인이 되게 할 뿐이다.


진심은 강하다. 이야기와 달리 진짜이기 때문이다. 진짜는 언제나 이야기 밖에 있다.


그러니 연인도 이야기 밖에 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진짜인 모든 것은 이야기 밖에서 성립된다.


자신의 존재를 우리의 고막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저릿하도록 강하게 알리고 있는 저 새끼고양이를 공사장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 싶지 않은가?


늘 약자인 스토리의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서만 포착되는 우리 자신의 강한 존재를 저 비루한 전시회의 액자 속에서 빼내고 싶지 않은가?


강한 마음에 어울리는 강한 마음의 연인이 되어 함께 웃음으로 뛰어 놀고 싶지 않은가?


"Yes!"라고 좀 해보자.


우리가 착각해왔던 강함에 대해 이제 "Yes!"라고 강하게 긍정해보자.


그것이 바로 마음에 대해 하는 "Yes!"다.


"나 좋아해?"


"Yes!"


만연한 이야기들 속에서도, 이 마음의 연인들은 생환할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보다 더 큰 사랑의 작용 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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