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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에서 정답을 찾느라 지쳤다면 결단하라

"펜보다 칼을 높이 들어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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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최고의 정보다. 가장 유용한 가치를 지닌 정보가 곧 우리가 찾아야 할 정답이 된다.


그러나 이 정답을 찾는 일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까지 하다.


왜 그런가?


이제 더는 이 시대의 정보량은 한 개체가 소화해내기에는 너무나도 과도해졌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정보과잉의 시대다. 평생을 더 좋은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만 매진한다 하더라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선택장애가 생겨난다.


아주 단순한 예로, 아이를 학원에 보내려고 해도 도무지 어떤 학원이 좋은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학원을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또 필요해지는 식으로, 하나의 정보를 취하려고 하면 그에 수반되는 2차 정보, 3차 정보의 양까지 함께 증대한다.


애인과 같이 볼 최고의 영화를 선별해줄 전문가와, 그 전문가들 중에서 누가 또 최고의 전문가인지를 선별해줄 전문가의 전문가가 필요해진 상황과도 같다.


이것을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끝없이 펜이 굴러가며 이야기가 끝없이 써지고 있는 현상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만 읽고 싶어도 계속 읽어야 한다. 최고의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속편의 속편까지, 그리고 후일담과 외전까지 다 읽어야 하고, 심지어는 한정판의 굿즈까지도 소비해야 한다.


정보과잉의 시대란 진정 이야기에 미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이제 더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SPA 브랜드에 가서 그냥 널려 있는 옷들 중 편한 옷을 구매하고 싶고, 그냥 단짠단짝으로 적당히 맛있고 배가 차는 음식을 먹고 싶으며, 성가신 선택의 과정이 생겨나는 일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다.


이해하겠는가?


우리는 정보에, 그리고 이야기에 정말로 질릴대로 질려버린 것이다.


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니 이야기 따위는 더욱더 듣고 싶지 않다.


이제 더는 그만, 정보를 우리의 눈앞에 그만 들이댔으면 좋겠다. 비명이 나올 것 같다. 구토가 올라온다.


그래서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칼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동서기를 하는 펜대를 끊어버릴, 수억 장이 쌓여있는 원고를 절단해버릴, 정보의 무더기산을 시원하게 난도해버릴 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여기에서 칼이란 무엇인가?


바로 결단이다.


결단은 정말로 살아있는 삶, 즉 실존의 핵심적 태도다.


정보라고 하는 이야기의 원리, 즉 펜의 원리로 살아갈 때 우리는 최고의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최고의 정보를 찾지 못하면 최고의 정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야 한다는 식으로 도착적이다. 최고의 정보에 대한 추구란 이처럼 이미 병적이다.


그러나 결단이라고 하는 실존의 원리, 즉 칼의 원리로 살아갈 때 우리는 최고의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게 된다. 그보다는 자신이 결단함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삶을 최고의 삶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최고라는 것은 사실 비교급이 아니다. '남보다 잘난'이 아니라 단순하게 '남다른'의 의미다.


남다른 최고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칼이 필요하다.


칼은 잘라내는 것이다. 곧, 포기하는 것이다.


결단이란 명확한 경계를 지어, 포기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실존적 삶이란 선택과 집중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칼을 쓰지 못할 때 생겨나는 이상심리학적 증세가 바로 분열이다. 분열은 아무 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을 때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잘 알려진 시인 '가지 않은 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포기를 이룸으로써만 하나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망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이 시대의 이야기는 망상구조를 갖는다. 끝없이 펜을 놀리면 그 펜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망상의 작용을 다른 말로 통합이라고 일컫는다.


통합은 언제나 펜이 써내려간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펜대가 만들어낸 분열을 다시금 펜을 통해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표현 그대로 병주고 약주고다.


이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살지 않으려는 의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한다는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룸펜들이 삶을 부정하고 방구석에서 망상의 펜끝을 놀리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진짜 작가들은 물론 이 반대로 움직인다.


진짜 작가들은 펜을 칼로 쓴다.


무엇인가를 명확한 경계로 끊어내기 위해, 곧 잘 포기하기 위해 진짜 작가들은 글을 쓴다.


진짜 작가들의 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거기에는 반드시 망상의 이야기를 포기하고 진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친 그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진짜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펜촉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창조해내고자 하는 마법빗자루의 솔기가 아니다. 시리도록 섬세하게 벼려낸 시퍼런 칼날이다. 그 칼끝으로 진짜 작가들은 한 지점만을 무섭도록 한결같이 겨냥한다. 그 칼끝이 향하는 황금과녁의 정중앙, 그것은 바로 삶이다.


군더더기를 일도에 양단해 그 삶의 정수만을 남긴 것, 우리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문학은 역설적이다. 모든 문학은 이야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다.


단순한 말이다. 문학은 정보이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최고의 정보라는 말은 성립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나는 내 삶을 살았는데, 너도 제발 네 삶을 살아."


문학은, 남의 이야기에 빠지지 말고, 제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그 자체로 너무나 역설적인 구조를 갖는다.


그래서 붓다나 예수와 같은 이가 남긴 말의 기록인 경전도 문학인 것이다.


결국 펜이 아니라 칼로 쓰인 것이 문학이다.


칼은 이야기를 자르고 삶을 남기며, 환상을 자르고 사실을 남긴다.


그리고 남이라고 하는 대상을 자르고, 나라고 하는 존재를 남긴다.


남을 잘라냈으니 표현 그대로 더는 남이 아닌, 남다른 것을 남긴다. 바로 나다운 것을 남긴다.


결단이라는 실존적 태도는 이처럼 나답게 나로 사는 길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정보들을 수집해 통합함으로써 이루는 최고의 나로 사는 길이 아니다. 아무리 후진 것이라도 그것이 내가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기에 그것을 가장 나다운 것으로 사는 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긍정, 긍정, 그리고 또 긍정이다.


"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또 한 번!"이라고 외치던 니체의 태도다.


삶에 대한 전적이고 무한한 긍정 그 자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통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금껏 경험해온 성공의 요소로 판정되는 모든 것을 다 적극적으로 통합해서 최고의 완성체를 이루는 일을 긍정하라는 따위의 말이 결코 아니다.


"앗싸! 내가 지금까지 한 게 잘못된 게 없다는 거구나! 최고로 잘했던 것들만 모아서 내 멋진 이야기를 세상에 펼치면 된다는 말이구나! 기다려라 세상아! 이제, 내가, 간다!"


19세 미만 구독불가로 정해져야 할 것은 사실은 포르노물이 아니라 니체의 저작들일지 모른다.


긍정을 인정이라고 바꿔 읽으면 더욱 명확해진다.


삶에 대한 긍정은, 그것이 네 삶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사기친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사람을 죽인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시저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그렇게 이루어진 너의 삶을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랬구나."


그래야 너는 거기에서부터 네 자신이 된다. 네 삶 앞에서의 단독자로 바로 선다.


그러면 너는 이제 변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초극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후진 네 자신이 아니려고 만들어낸 최고의 정보로 가득한 이야기를 이제는 포기할 수 있다.


지금 너는 네 자신이기 때문이다.


칼로 베고 있는 자가 바로 너다.


네가 아닌 이야기들을 칼로 과감하게 잘라내어 더욱더 네 자신인 것이 바로 너다.


그러니 부질없이 성마른 이야기들에 많이 지쳤다면, 이제 결단하라.


칼을 높이 들어, 문학을 하고, 삶을 살고, 네 자신이 되어라.


망상의 펜대를 부러뜨리고, 네 자신이 칼끝이 되어 걸어가라.


누가 그러리라.


"저거 최고네?"


당연하지. 네 자신이 남다른 최고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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