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향한 모든 사과
새로운 세기를 앞둔 1990년대를 길 위에서 살아간 아이들이 있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서, 어디에도 그들의 자리가 없어서, 그들은 누구의 자리도 아닌 길로 나섰다. 길처럼 흐르는 작은 스케이트 보드 위에 자신을 전부 맡긴채 그렇게 흘러갔다.
이 영화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던 바로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며, 그들과 똑같이, 과거의 자신으로 머무를 수도 새로운 자신이 될 수도 없는 까닭에 늘 어정쩡한 품새로 소외되곤 하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은 이와 같은 우리의 지난 자화상에 대해 과잉되지도 무심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영화는 정말로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과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죄책감을 타인에게 떠넘기곤 한다. 우리를 아프게 한 상대로부터 발화된 "다 내 탓이야."로 시작하는 시리즈는,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 말에는 과도한 자의식 과잉만이 담겨 있다. 곧, 그 말의 주체는 실제로는 우리가 아닌 자기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자기의 당위적 입장과 그에 따라 올바른 행위를 수행하지 못한 죄책감만이 상대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는 모든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기, 자기뿐이다. 우리는 소외된다. 그래서 과잉은 언제나 무심의 다른 이름이다. 상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무심하다. 우리의 아픔에 대해서조차 상대는 자기만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결코 사과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얼마나 아팠는지 이해받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그 아픔에 대해 정확하게 다가선다. 우리의 아픔에 대해 과잉도 무심도 아닌 관심의 카메라를 비춘다.
우리가 2000년대라는 새로운 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세기말에 살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여전히 힘들고, 불안하며, 무섭다.
인간은 언제나 세기말에 살고 있다. 늘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에 살고 있다. 인간은 경계의 존재다. 이 경계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실존은 소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소외되었다. 우리는 소외되어서, 힘들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우리는 우리의 소외를 망각하고자, 힘세 보이는 누군가를 따라했고, 우상을 쫓아다니며 노예가 되었고,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 자신을 얼척없이 주장하며 우리가 결코 되고 싶지 않은 한심한 모습의 타인을 배척했고, 세간의 권위를 조롱했고, 조롱한 만큼 우리 자신이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괜찮은 누군가가 될 수 없던 우리 자신을 망각하기 위해 자극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우리는 길로 나섰다. 힘들고, 불안하고, 무서운 길로 나섰다. 그리고는 힘듦과 불안과 무서움을 망각하기 위해, 보이는 모든 것에 부딪히고 다녔다. 자극만을 추구했다. 그렇게 하드코어하게 자신을 몰아세우고, 충돌과 갈등을 만들어내면, 고통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의 환상처럼, 역사적 변증법의 착각처럼,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이 만들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비추어줄 시선을 원했다. 그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의 견고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 불안한 경계 속에서, 그렇게 우리 자신이 진정 있을 수 있는 자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우리는 그 시선을 만난 듯도 싶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두는 우리 자신과 같았다. 같은 힘듦과 불안과 무서움의 이유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한만큼 그들은 우리에게 조금은 더 관용적인 시선을 비추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일 수 있는 낙원에 어렵게나마 비로소 도착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길 위는 결코 낙원이 아닌 그저 경계일 뿐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두는 우리 자신과 같았고, 같은 힘듦과 불안과 무서움의 이유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우리가 자신을 보는 것만큼이나 꼴보기 싫었다. 똑같이 진절머리나는 벌레들이었다. 누구에게도 날개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나고, 속상하고, 미웠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이해하는 만큼, 날개가 없는 이 모든 군생이 더욱 화나고, 속상하고, 미웠다. 그래서 우리는 더 아팠다.
아파서, 아픈 이를 더 아프게 하고, 그 아픔으로 스스로를 더 아프게 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렇게 지난 시간 속의 우리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상냥한 관심으로 비추고 있는 영화다. 우리의 아픔에 어떤 죄책감도 들이대지 않으며, 어떤 과잉과 무심도 개입시키지 않으며, 오직 관심으로만 다가서고자 하는 영화다. 곧,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건네고자 하는 영화다.
그렇게 영화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지난 과거의 우리 자신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건넬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관심이 향해야 할 정확한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향한 그 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고, 무서웠는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아팠으며, 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더 몰아세운 결과로 오히려 얼마나 더 큰 상처를 쌓아왔는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소외의 아픔은 관심에서 종결된다. 실존은 소외된 타자에서 출발해 관심어린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언제나 동시적이다. 소외된 타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순간 동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게 우리가 찾아 헤매던 자신은, 견고한 우리의 자리는, 관심으로 인하여 이 길 위에 처음 출현한다.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이제 우리는 길 위의 모든 삶을 관심의 프레임 속에서 바라본다.
우리의 카메라가 삶을 담아내는 이유는 결코 미안해서가 아니다. 무엇이라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삶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다. 그 삶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관심에서 비롯한 사과의 핵심적인 표현은 "미안해요."가 아니다. "당신이 그렇게 아팠었군요."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렇게 살았군요."다.
살아 있는 것만이 아픔을 느낀다. 아픔을 느끼던 당신은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이 살아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당신의 자리를,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을 향한 모든 사랑 속에서.
당신을 향한 모든 사과 속에서.
Nirvana - All Apolog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