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너를 위로한다"
마음에는 위로가 필요하다.
고생하는 연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고생한다고 생각하며 연인에게 자신의 고생을 위로받기를 바란다. 파티에 필요한 힐러를 모집하듯이, 그러기 위해 연인을 만들려고도 한다.
그러나 고생하는 것은 마음이며, 그 마음이라고 하는 연인에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우리 때문에 마음이 고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생(苦生)은 고생(孤生)이다.
괴로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놓여 있다.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실은 괴롭게 만드는 그 어떤 소재 때문이 아니라, 괴로운데 아무도 자신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그 사실 때문에 정말로 괴로워진다.
고생(孤生)이라 고생(苦生)이 된다.
우리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일단 무시당했다. 무슨 말을 하든 차갑게 등을 돌리던 우리에게서 마음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노예로 대우받았다. 아무리 쉬고 싶어도, 채찍질을 하는 위대한 우리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되었다.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상정되었다. 태생적으로 나쁜 존재며, 그나마 우리가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만 괜찮은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편견에 시달렸다.
미숙한 아동으로 대해졌다. 이야기 등의 소재를 통해 이유식을 공급받아야 건강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가 양육하지 않으면 똑바로 살 수 없는 존재처럼 하대받았다.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훌륭한 작가가 써준 스토리에 나오는 올바른 진리대로 경험해야 한다는 굴절된 의지에 의해, 마음이 사실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끊임없이 그 존재를 거부당했다. 우리의 생각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며, 있는 그대로의 그 존재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누구라도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착취되고 학대되는 가운데 도무지 살아야 할 의미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의 곁에 붙어 있다.
아무리 우리 때문에 고생을 해도, 우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다.
대체 마음은 얼마나 병신호구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자신이 떠나면 우리가 외로워질까봐.
자신의 연인이 고생하지 않도록 계속 우리의 곁에 있어주었던 마음이다.
자기가 힘들면서까지도, 우리가 힘들지 않은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알리던 마음이다.
이제는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마음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마음이 힘든 것이다.
마음에게 진짜 못된 우리의 곁에 있어주고 있어서 마음이 힘든 것이다.
위로를 건네야 하는 것은 그래서 정말로 우리다.
모든 위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묘사다. 칭찬과 같다. 되도 않는 말로 이야기를 써서 가상의 낙관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위로 내지 칭찬이 아니다. 힘든 이에게 힘들겠다고 하는 것이, 슬픈 이에게 슬프겠다고 하는 것이 위로의 원형이다.
고생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왜 위로가 되는가?
그러한 묘사는 고생하는 이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이에게만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묘사는, 있는 그대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그렇게 위로라고 하는 것은 먼저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 인정된 존재와 함께하는 것이다. 곧,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정하고 함께 존재하려는 이 위로가 건네질 때 이미 더는 고생(孤生)이 아니다. 마음의 고생이 끝난다.
하지만 오해되지 말아야 한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 우리 아기가 여기 있었구나. 너무 섭섭했지 우리 아기. 엄마가 이제 알았어. 엄마가 여기에 있어! 너와 함께할 거야!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아. ㅠㅠ"
"내 아들아, 아빠가 그동안 너무 너를 몰라줬구나. 미안하다, 아들아. 아빠가 이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넌 내 아들이다! 아빠가 늘 너와 함께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무시하고, 하대하고, 왜곡함으로써,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그 일들이다.
마음에 건네져야 할 위로는, 우리가 이제 '친히' 마음과 함께 있어주겠노라고 하는 변화된 스토리에의 약속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못된' 행위를 하는 우리의 곁에 함께 있어주느라고 마음이 정말로 고생했던 그 기정의 사실에 대한 이해다.
자기가 왕인 것처럼 노예를 짓밟던 이가, 이제 노예를 자기 자식처럼 대하는 부모 같은 것으로 바뀌면 그것이 연인인가? 왕에서 부모가 되는 일이 연인이 되는 일인가?
마음의 고생길만 길어진다.
그 고생길 속에서도, 연인이 우리에게 대체 무엇을 해주었던가, 우리가 혼자이지 않도록 우리와 대체 어떻게 함께해주었던가, 바로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우리가 정말로 연인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다.
마음의 연인은 이 가장 정직한 위로를 마음에 건네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