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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2021)

소년과 엄마와 별과 단짠단짠의 애착

by 깨닫는마음씨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 해."


소년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지 않을까.


이 말을 듣고 싶어 소년은 엄마 같은 소녀를, 또는 소녀 같은 엄마를 찾아 부른다. 1970년대에도,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20년대에도 소년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 소년에게는 분명 엄마 같은 소녀가, 또 소녀 같은 엄마가 그의 꿈이다. 메텔을 꿈꾸던 철이처럼, 레이를 꿈꾸던 신지처럼, 아마도 베아트리체를 꿈꾸던 단테처럼.


그리고 엄마 같은 소녀에게도, 또 소녀 같은 엄마에게도 소년이 그녀의 꿈이다. 일상의 통속성에 파묻혀 퇴색되어 가는 그녀를 영원한 소녀로 생생하게 되살려주는 것은 자신을 향해 바치는 소년의 열정이다. 자신을 꿈꾸는 소년을 소녀도 꿈꾼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서 영원성을 꿈꾼다.


낭만이란 단지 복고성에 대한, 곧 언젠가는 있었을 법한 과거의 낙원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모든 낭만은 그 낙원의 영원성을 암시함으로써만 배어나오는 향기다.


그러나 PTA는 PTA다. PTA(Paul Thomas Anderson)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풍으로 유사 부모-자식 관계를 은근히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가 되어서도, 시대정신을 통찰하는 그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1970년대의 시대상을 통해 2020년대를 비추고 있는 이 시선은,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사실적으로 전한다.


그것은 바로 애착과잉이다.


다른 말로는 관계중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관계는 애착 그 자체다. 관계에 영원성을 부여하기까지 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애착의 과잉이 된다.


애착의 속성은 언제나 단짠단짠이다. 웃음의 맛은 달고, 눈물의 맛은 짜기 때문이다.


2020년대의 기호다. 이 시대를 달리는 요식업의 숨은 비결은 대개 설탕이다. 감초(Licorice)를 토핑으로 올린 피자와도 같다.


재미있게도 이 달달한 감미가 낭만성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천국은 달달한 곳이라는 믿음이 만연한 까닭이다. 영원성을 함축하는 복고성을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달달한 이유다.


복고 중에서도 가장 복고적인 소재, 그것이 바로 모자(母子) 관계다. 모권주의의 여신신화가 창출하는 관계적 양태다. 다시 말하면, 신적인 위상으로서의 애착 관계다.


이 신적인 애착 관계의 맛은 분명 단짠단짠이다.


그러나 단짠의 변증법은 영원한 단맛을 실현하는 역사를 이야기로 실체화함으로써, 짠맛을 망각하고자 하는 의도를 펼쳐낸다. 단팥죽과 수박에 뿌리는 소금은 다만 그 감미를 더욱 신성하게 만들어줄 일시적 도구재일 뿐이다. 그렇듯이 우리 삶에 눈물이라는 것은 오직 영원한 승리의 웃음을 위해서만 의미있는 최소한의 필요악 같은 것이다.


영웅신화의 구조다. 그리고 이 영웅신화는 더욱 시원적이라고 가정되는 여신신화의 구조로 변주된다.


차라리 후지시마 코스케의 『오! 나의 여신님』을 떠올리면 여신신화에 대한 이해는 쉬워진다. 현실은 별 볼 일 없지만 꿈만은 순수한 남주인공이 엄마처럼 강하고 소녀처럼 예쁜 여신을 만나 현실과 꿈의 균형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PTA는 여신의 입장에서도 이 신화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묘사한다. 여신도 처음부터 강하고 예쁜 여신이 아니다. 여신으로 기능하는 그녀도 별 볼 일 없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만큼 여신후보생은 성모마리아가 아니며 그 성정은 도발적이고 거칠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은 별을 조준하는 화살촉의 날카로움이다. 별 볼 일 없는 현실에서, 늘 가깝게 별을 볼 수 있는 현실로 이행하고자, 별을 쟁취하려고 눈을 부릅뜨는 아르테미스의 눈매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현실에서 살던 소년과 소녀가 만났을 때, 더 구체적으로는 아직 별이 아닌 소년과 별을 따고 싶은 소녀가 만났을 때, 애착이 출현한다.


애착은 결핍이 만들어내지만, 그 지속력은 단지 결핍만으로 담보되지는 않는다. 결핍과 가능성이 혼재할 때, 애착은 굳건해진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용어로 묘사하자면, 불규칙적 가변비율일 때 가장 강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하자면,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또 늘 그렇지만은 않고 가끔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도 할 때, 그러한 상대에게 애착이 끈끈해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유사 모자 관계다.


유사 모자 관계의 핵심은 양육이다.


될성 싶은 꿈나무를 양육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던 별의 모습으로 만드는 일이다.


곧, 스타메이킹이다.


여신이 소년들 중에서 영웅후보자를 선정해 그를 성심껏 지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섭게 혼내기도 하면서, 종국에는 자신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 영웅으로서 키우려고 하는 일이다. 현실에서 이루는 실시간 육성시뮬레이션 게임과 같은 일이다.


이 경우, 소녀는 아직 소년의 연인이 아니다. 소녀와 연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소년의 요청은 상시 거절된다. 아무리 관계의 거리가 가까워도 아직은 엄마다. 그 경계가 명확해야 효과적인 양육이 가능하다. 동시에, 혹여나 육성에 실패할 경우 게임의 리셋이 가능하다. 나아가 자신이 어렵사리 키워야 할 별이 아니라 이미 별의 위상을 가진 대상이 나타나면, 그 즉시 게임을 그만 두고 그 별에게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까지 보장된다.


이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소년의 눈빛에서 반짝이는 영롱함을 발견하며 거기에 매혹되지만, 어떤 때는 유치한 철부지 아동의 미숙한 몸짓을 본다. 어떤 때는 이 한 몸을 다 바쳐 소년의 힘이 되고 싶지만, 어떤 때는 그 젖비린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지고 싶다.


같이 있으면 똑같이 덜 자란 수준으로 추락할 것 같아 두렵지만, 동시에 그 생동감에서 매혹의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없으면 소년이 똑바로 못 살 것도 같으며, 동시에 자신이 없이 소년이 혼자서나 자기 아닌 다른 이의 도움으로 별이 되는 일은 싫다. 전적으로 내 것으로 하기는 싫지만, 남의 것이 되는 일은 더 싫다.


이것은 더 양가적이며 분열적이다.


자신이 존경하고 의존할 수 있는, 자신보다 더 대단한 존재로 소년이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동시에 언제나 소년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입장으로 자신의 아래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부추기며 동시에 억누른다. 가까워지며 동시에 멀어진다. 껴안으며 동시에 밀어낸다.


정신병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애착이다.


별이 되고 싶은 소년에게, 별을 따고 싶은 소녀가 엄마가 되어 이루는 애착 관계다.


애착이 결핍과 가능성이 뒤섞여 낳는 역동이라고 할 때, 오늘날 이 애착이 과잉되어 있다는 것은 결핍과 가능성의 문제 또한 과잉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애착 속에서 결핍은 상대의 결핍으로 경험되며, 가능성은 상대의 가능성으로 경험된다. 그러니 늘 상대를 염려하고, 또 숭배하는 몸짓만 과잉되게 커져가는 오늘날이다.


"아... 별이 되고 싶어하는 저 아이의 아픔, 우리가 지켜줘야죠. 우리가 네 뒤에 있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조금 모자라도 언제나 응원할 거야. 영원히 사랑할 거야. 아... 저 아이를 별로서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너무 커. 저 아이의 눈빛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 혼자 똑바로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바쳐 너를 지켜줄게."


"아... 엄마가 실망하시지 않게 늘 바른 모습을 보여야지. 엄마에게 영원한 별일 수 있게, 내가 최선을 다해야지. 하루라도 허튼 모습 보이지 않으며 쉬지 않고 자기발전에 힘써야지. 아... 엄마의 슬픈 눈빛이 너무 무서워. 미숙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너무 죄송스럽기만 하다. 언제라도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이일 수 있도록 내가 힘을 내야지."


이렇듯이 모든 과잉은 모든 소진의 이유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대의 모습이란 사실 자기 자아의 면모다.


그러니까 자신과 애착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의 결핍된 측면을 보는 이는 자신의 결핍된 측면을 보는 것이고, 또한 상대의 가능성을 보는 이는 자신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년과 엄마는 서로를 다시 발견한다.


별이 되고 싶던 소년은, 실은 자신이 별을 따고 싶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는 다만 엄마처럼 강한 소녀를, 또 소녀처럼 예쁜 엄마를 별로서 얻고 싶었던 것이다.


별을 따고 싶던 엄마는, 실은 자신이 별이 되고 싶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녀는 소년에게 다만 엄마처럼 강한 소녀로서, 또 소녀처럼 예쁜 엄마로서 별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성이 실현된 그 전모다.


소년이 보던 엄마의 모습은 소년 자신이 되고 싶던 모습이었다. 엄마가 보던 소년의 모습은 엄마 자신이 되고 싶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상대에게 요청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실현하게 될 때, 결핍도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실현되었으니 더는 결핍일 이유가 없고 더는 가능성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난 엄마만 영원한 나의 별로 있으면 돼요."


그래서 이것은 여신신화의 완성이다.


이로써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 이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소년이 너무나 듣고 싶어하던 그 말을 소년에게 들려줄 수 있다.


"사랑해."


이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제 소년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이란, 언제라도 결국 엄마가 영원한 나의 별이라고 고백하는 그 일일 것임이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기각되고, 여신이 지배한다.


영화 속 남주인공에게는 아버지가 부재하고,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다만 형식적 권위주의의 표상이다.


부권은 필요하지 않다. 여주인공이 별로 착각했던 영화 속 그 모든 부권의 대상물들은, 자기고집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거나, 자기파괴적이거나, 자기회피적일 뿐이었다. 여주인공을 결코 별로 보아주지 않고, 오히려 여주인공이 별이 될 그 자리를 위협할 바로 그것이 부권이었다.


그래서 순수한 소년이다.


엄마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언제나 엄마에게 통제가능한 소년만이 무해한 돌고래처럼 엄마와 융합을 형성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영웅상이 부권적 마초가 아닌 순수한 소년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지금이 여신이 꿈꾸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시원적 복고의 낭만적 꿈은 이처럼 여신의 모태를 향한다. 늘 하나일 수 없고 둘이기에 생겨나는 애착의 지난한 줄달음을 끝내고 소년이 영원한 하나로 융합되어 쉴 그 자리는 여신의 자궁 속이다.


양수는 그래서 단짠단짠이 아니다. 무색, 무미, 무취다.


통합의 맛이다.


애착 관계로 분열되어 있던 소년과 엄마가, 소년이 엄마를 여신으로 고백함으로써, 또 여신으로 등극한 엄마가 소년에게 "사랑해."라는 세례를 내려줌으로써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


분열에서 통합으로 이행된 이 상태가, 이제 갈등과 대립이 없어진 낭만적 낙원의 상태처럼 스스로를 완성으로 자칭한다. 이제는 평화롭게 별이 가득히 빛나게 된 하늘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197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 별 볼 일 없다며 단순하게, 그만큼 명료하게 호소한다.


또 누군가는 엄마가 아닌 아빠를 요청하며, 자궁의 밖으로 뛰쳐나가려 함으로써 반복에의 시동을 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엄마도, 아빠도, 그 어떤 신화도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며 부르짖는다.


그러한 이들은 눈물의 짠맛을 상기했기 때문이리라.


낭만의 복고에 가려진 미각의 복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리라.


별과 설탕이기보다는, 빛과 소금이고 싶기 때문이리라.


PTA는 언제나 다른 멋진 감독들처럼, 영화의 끝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 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영화관 밖으로 이동시킨다. 영화의 끝에서 현실의 시작을 바라보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1970년대에나,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2020년대에나.


왠지 우리는 당뇨병과 같은 상태가 되어 단짠단짠의 소변을 흘린다. 그러지 않기 위해 다양한 쇼들을 소비하며 과잉된 웃음과 과잉된 눈물로 균형을 맞춰보려 하지만, 모든 것은 점점 더 수분을 잃고 건조해지기만 한다. 단짠단짠의 애착을 자기 몸에서 씻어내리고 싶다는듯이, 단짠단짠의 배뇨와 그로 인한 수분 상실은 계속된다.


사실은 자연스러운 짠맛을, 그 눈물을 회복하기 싶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로 한번 울어보고 싶어서, 과잉되게 웃고 과잉되게 울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를 잃은 이들이 여신을 꿈꾸어낸다. 여신을 꿈으로 만들어낸다. 엄마를 잃은 이들이 사랑할 여신을 얻으려 하고, 사랑받을 여신이 되려 한다.


모든 소년과 소녀는 반드시 엄마를 잃은 이들이다.


영화 속 소년도 엄마가 있지만 자기의 옆에 늘 함께 있지 않고, 소녀 또한 엄마가 있지만 있는 줄도 모르게 그 존재감이 거의 없다.


실상 그 둘은 고아의 입장과도 같다. 그리고 고아 둘이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 단짠의 변증법을 이루기 위해 채택한 스토리가 순수한 소년의 영웅신화며, 곧 강하고 예쁜 엄마의 여신신화다.


이처럼 이 모든 것이 해법을 얻은 그 완성판이 결국 감초를 올린 피자라면, 차라리 홀로 파파존스에서 페퍼로니 피자를 시켜먹고 싶다.


그리고 꽁다리만 베어 물으며, 당신은 꽁다리가 제일 좋다며 토핑이 있는 부분을 잘라 다 밀어주던 우리의 진짜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여신도 아니었고, 소녀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엄마도 아니었던 그 이가 자시던 꽁다리의 맛을, 지금 이 눈물의 맛으로 홀로 오롯이 다시 기억하고 싶다.


스즈키 선사는 말한다.


"모든 깨달음의 안에는 눈물이 있다."


1970년대에도,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2020년대에도, 우리는 어쩌면 그 눈물을 잊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피자는 원래 짠맛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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