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지 않는 삶에 전하는 넉넉한 미소
좀비가 생겨난 발단은 자기들의 이득만 추구하는 타락한 기업체 때문이고, 그 우행으로 인해 자연의 질서는 파괴되고, 파괴된 질서는 알 수 없는 모종의 오컬트적 원리로 변질되고, 신비한 힘의 결정체인 달의 초자연적 마력도 거기에 한몫 거들고, 그렇게 되살아난 시체들은 살아 있을 당시 그들이 쫓던 욕망의 대상에 여전히 집착하고, 인류는 죽으나 사나 똑같이 어리석고, 외계인은 깝깝한 지구를 떠나 귀향하고, 모두는 좀비화되고, 미래는 깜깜하고, 영화의 크레딧은 오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수한 좀비영화들에서 반복되어 온 진부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어여쁘다.
이 의도적인 진부함을 통해 영화는 연결하고자 한다. 깊은 골짜기와도 같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미소 사이를.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좀비들은 왜 죽어서도 생전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일까?
죽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욕망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움직임을 뜨겁게 느끼면서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즉 죽지 않는 것처럼 간주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좀비의 가장 진부한 정체성은 바로 생각없는 존재다. 좀비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프로그램처럼 주어진 행동양식을 맹목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욕망의 속성이 그러하다. 우리는 남의 욕망을 자기 안으로 내사시켜 그것이 마치 자기의 욕망인 것처럼 자동적으로 추구할 뿐이다. 우리는 욕망의 자동기계다. 그러한 우리가 하는 생각이라고는 오로지 그 욕망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의 고민뿐이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왜?'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메타 인지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말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실감하게 된다. 정말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죽지 않는 좀비들은 살지도 않는다. 죽지 않는 시체의 다른 이름은 살지 않는 삶이다.
살지 않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좀비와 같은 맹목적 추종이다. 이처럼 우리는, 영화에서도 말해지듯이, 이미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좀비와 같다.
그런데 이 좀비화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좀비가 되는 일을 감수해서라도,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이득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바로 불안의 극복이다.
인간을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좀비처럼 만드는 전체주의 및 집단주의의 논리에 왜 무수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복속되었는지에 대한 이유 또한 동일하다.
좀비가 되면 불안이 극복된다. 욕망을 추구하면 불안이 극복된다. 남의 말을 따라 살면 불안이 극복된다.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불안 앞에,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의 한 형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다. 이미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The Dead Don't Die).
영화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사태 앞에 불안해하던 이들이, 시종일관 침착함을 보이는 인물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이 영화의 각본을 다 보았거든요."
그렇게 제 4의 벽을 넘어 진술하는 예언자적 인물의 말을 듣고는, 다른 이들 또한 불안에서 놓여나는 장면은 분명 의미깊다.
남의 영화, 남의 각본, 남의 욕망에 우리는 언제나 열렬히 투신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잊고자 한다. 남의 말에 스스로를 위탁한 채, 그저 남의 각본 속에서 정해진 자신의 역할만을 톱니바퀴처럼 잘 수행하면, 모든 것에 문제가 없어지는 것처럼 행위한다. 상부의 명령을 신처럼 따르며 아무 죄 없는 민간인 마을에 미사일을 폭격하는 파일럿의 심리다. 자동 파일럿 모드다.
이것은 좀비의 생태며, 동시에 우리의 생태다.
이것은 영화며, 동시에 삶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사실을 전한다. 좀비와 인간 모두가 동일한 행동 원리로서 남의 말, 남의 욕망, 남의 각본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삽화를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영화의 현실과 우리의 실제 삶의 현실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전한다. 동시에 이 영화 자체도, 무수한 좀비영화들, 즉 남의 영화들에 따라 만들어진 진부한 형상으로 스스로를 기꺼이 설정함으로써, 이 사실을 더 명징하게 만든다.
죽지 않는 좀비처럼, 우리는 살지 않는 존재다. 죽지 않는 것은 살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남의 말에 따르는 진부함으로만 지루하고 생기없게 반복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이러하다. 살지 않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살지 않는 삶에 대해 이 영화는 무엇인가를 촉구하지 않는다.
그저 이러한 삶의 속성에 대해 미소지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줄 뿐이다.
그 미소는 자조라고 하기에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너그럽고 넉넉한 성격의 것이다.
자조는 작은 자기에게 갇힌 작은 자기가 행하는 자학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띄우는 미소에는, 작은 자기를 바라보며 그 한계의 애달픔을 이해하는 커다란 시선이 있다. 그 시선으로 말미암아 넉넉함이 개방된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비로소 미소지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영화는 깊은 골짜기와도 같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미소 사이를 다시 연결짓는다. 우리로 하여금 삶을 향해 다시 미소짓게 한다.
이 영화가 코미디인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