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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Jul 25. 2019

나랏말싸미(2019)

자유의 선포



  이 영화는 판타지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 현실이기를 바라게 되는 그러한 판타지다.


  어떠한 판타지는 하나의 현실을 증강시키고, 어떠한 판타지는 하나의 현실을 해체시킨다.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해체의 판타지다.


  해체의 판타지의 목적은, 하나의 판타지로 하나의 현실을 해체함으로써, 그 현실이 실은 또 다른 판타지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판타지는 꿈이다. 그리고 꿈으로 꿈을 파훼함으로써, 그 어떤 꿈에도 의존해 있지 않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 이것은 분명하게 선(禪)의 대표적인 방법론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 현실의 해체를 겨냥하고 있는가? 즉, 어떠한 현실이 실은 꿈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절대주의적 유교의 현실이다. 오래된 조선의 꿈이 만들어내 유지되어 온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가장 위의 자리에서 하늘을 대행하여,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소위 당위적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타협이 없고, 인격적으로 어질며, 사리사욕 없이 도덕적이고, 백성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성인군자 같은 실체로 형상화되는 지도자의 모습은, 정확한 유교적 지도자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적 지도자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정치적 이상형이다.


  역사 속에서 비단 세종은 이러한 유교적 지도자상을 구현한 실체로 곧잘 평정되곤 해온 인물이다. 이 영화는 먼저 그 세종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세종과 유교주의를 갈라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지 유교주의의 꿈에 봉사하는 세종이 아닌, 더 넓은 지평에서 드러날 수 있는 세종의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해석학적 작업이다.


  첨언하건대, 이 영화는 과거의 실체적 역사의 가치에 대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담지할 수 있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의미를 향한 해석학적 시도다. 그래서 더욱 의미깊다.


  때문에 이 영화는 유교적 가치 대신에 불교적 가치를 예찬하는 영화 또한 아니다. 이 영화가 유교만큼이나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유교가 굴절된 절대주의적 우상화의 모습과 똑같이 우상화된 불교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의도와 일맥상통하는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조주 선사의 이야기다.



  부처에게 열심히 예배하고 있는 한 승려를 보고 조주가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그 승려가 물었다.

  "부처님께 경배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닙니까?"

  조주는 대답했다.

  "훌륭한 일이지만, 훌륭한 일 따위는 없는 것이 더 낫다."



   이러한 우상 파훼의 맥락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훌륭한 지도자 따위는 없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것이 훌륭한 것인 만큼 그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다란 형태로 우상을 만드는 까닭이다. 그리고 르네 지라르의 지적처럼, 우상은 반드시 소외되는 희생양을 낳아, 고통의 총량은 오히려 증가한다.


  유교적 정치의 이상향인 태평성대나, 불교적 정치의 이상향인 불국토나, 똑같은 우상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 두 이념을 동시에 해체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소위 유교 대신에 불교가 사람들이 따라야 할 원리로 채택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러한 유교적 이념 그리고 유사-유교적 이념이 전부 다 판타지임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지평을 개방하는 데에만 그 모든 목적이 있다.


  이 새로운 지평을 향한 목적은, 이 영화가 세종이라는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르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자 하는 그 목적과 궤를 함께 한다.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어 보급하려 했는가?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자신의 이야기[말]가 있고, 그 이야기는 고유한 자신의 형식[글]으로 널리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자신의 다양한 이야기가,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형식에 갇혀서 구속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 의미다.


  이 영화가 재구성해낸 세종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가 자유롭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교의 절대주의적 속성은 공자 및 맹자라고 하는 위대한 남의 이야기에 모든 것을 구속시킨다. 마치 거푸집처럼 유교가 진리로 숭상하는 그 하나의 형식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며, 동일성의 폭력이고, 통합주의의 전횡이다.


  한글을 보급함으로써, 공자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은, 또한 부처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은, 똑같이 어불성설이다. 임금이라는 이름의 독재자, 또는 승려라는 이름의 독재자나 꿈꿀 일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세종과 신미는, 둘 다 이 독재의 꿈에서 시작하였으나 끝내 이를 함께 뛰어 넘는다.


  한글의 보급으로 인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 세상은 신미의 표현과 같이 누구도 주인이 아니고 동시에 누구도 나그네가 아니게 되는 세상일 것이다. 곧, 사람 위에 정말로 사람 없는 세상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유학자들은 이 사람 위에 사람 없는 세상을 반대한다. 위대한 사람이 언제나 위에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바로 다른 사람 위에 설 그 위대한 사람이기를 꿈꾼다.


  그러나 세종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찾음으로써, 결국 왕족의 지위조차도 무너지게 될 수 있는 이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신미 또한 자신의 모든 공로를 유학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남들 위에 설 수 있는 승려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자유만을 노래한다. 그 자유란 위대한 성인군자가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애초 사람들의 것이었음을 노래한다.


  영화 속 세종과 신미는 결코 위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유를 전하는 우편배달부의 역할일 뿐이다. 그들이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자유의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일 뿐이다. 그 둘은 끝내 그 사실을 이해한다. 이해함으로써 위대한 그 어떤 실체보다도 가장 고귀한 자신으로서 드러난다.


  한글의 창제와 보급은, 바로 이 가장 고귀한 자신으로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어떤 위대한 자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 어떤 우상의 꿈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자신이 오롯이 서는 현실을 사람들에게 다시 개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해석이다.


  이는 이학인과 왕흔태의 걸작 만화인 『창천항로(蒼天航路)』에서 새롭게 해석해낸, 이 만화의 주인공인 조조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장대한 푸른 하늘 아래 사람은 오직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라는 만화의 주제를 견인하며, 조조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유교주의에 대해 동일한 질감의 해체를 기획한다.  










  이와 같이, 이 만화에서도 유교주의라는 하나의 절대주의적 형식을 해체함으로써,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하게 갖춘 자신의 귀한 면모를 자유롭게 다시 해방시키고자 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잘 알려진 훈민정음의 서문에서도, 이러한 해방에의 의도를 향한 재구성은 또한 가능할 수 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빼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할 노미 하니라
  우리의 말이 중국과 달라 글이 서로 맞지 않으니
  이런 이유로 어여쁜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중국이라는 실체적인 국가가 아니라, 절대주의화된 하나의 권위다. 그 하나의 권위가 제공하는 형식과 거기에 담긴 이야기가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와 맞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로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억압된다는 것이다.


  뜻은 마음이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뜻이 있다. 즉, 자유로운 자신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표현된 것이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형식 속에 담긴 것이 글이다.


  그렇게 보자면, 글은 마음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글은 마음의 그릇인 몸과 같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몸을 보면, 이미 남의 몸과 같지 않다. 남의 몸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의 몸을 맞추려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미 내 몸이 네 몸과 서로 같지 않고, 내 마음이 네 마음과 서로 같지 않다. 때문에 내 몸만이 내 마음의 그릇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내 몸(自身)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과 다른 자신이, 바로 다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사유 속에서 절대주의는 해체되고, 다원주의는 개방된다. 하나를 향한 통합의 폭력은 소멸되고, 하나로부터의 위계적 소외는 극복된다.


  이 영화는, 세종이 이상적인 하나의 진리를 당위적으로 추구하는 유교주의자가 아니라는 판타지를 통해, 절대주의적 유교가 만든 하나의 현실이 대단히 폭력적인 판타지라는 사실을 함께 드러냄으로써 이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 모든 판타지가 날아간 자리에서, 인간이 이미 다양성 위에 성립되는 고유한 자신이라는 귀중한 사실을 선포한다.


  마음은 저마다 자유롭다. 이 자유로운 마음만큼, 마음의 그릇인 고유한 자신(自身)도 이미 자유롭다. 때문에 고유한 자신, 즉 고유한 몸과 고유한 형식에 대한 선포는 그대로 자유에 대한 선포가 된다.


  이와 같이, 한글의 선포는 곧 자유의 선포다.


  그리고 선포는 그것을 이미 살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를 사는 자만이 자유를 선포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재구성해낸 세종의 모습은 결국 이처럼 자유를 살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남을 절대적 진리로 놓고서, 그에 따라 남의 눈치만 보며 자신의 마음을 소외시키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을 향해 자신의 귀한 마음의 뜻을 당당히 펼쳐가는 자의 모습이다.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특정한 시공을 넘어서 모든 시공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자유를 선포하는 세종의 모습은, 가장 거대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은유다. 그것은 한낱 작은 유교주의 국가의 왕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은유의 형식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세종을 우리의 상상보다 더 거대한 존재로 상상하고자 했다.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상상보다 더 거대한 것으로 상상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판타지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 현실이기를 바라게 되는 그러한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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