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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06. 2019

자신을 벌레처럼 느끼는 그대에게

"내가 무섭지?"



  어느 날, 카프카는 그대를 떠올렸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의 아픔을 떠올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대에게 닿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대여, 그대는 이 시대의 그레고리다.


  그대는 이미 자신을 벌레처럼 느끼고 있다. 자신이 잘못된 존재인 것만 같다.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그대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탐독하며, "괜찮아! 지금의 나로도 괜찮아!"라는 무한한 자기긍정의 말들로 자신을 무장하려 하는 이유는, 그대가 이미 자신 안에 가득 자리잡은 수치심을 눈치채고 있는 까닭이다.


  그대는 벌레다. 가족들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동료들 앞에서, 연인 앞에서, 사회 앞에서, 그대 자신은 수치스럽기만 하다. 그들 앞에서 그대는 늘 당당하지 못하고, 어딘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생각된다. 그대는 그들의 수치다.


  그대의 느낌이 언제나 정확하다.


  그대가 속한 세계의 선량한 이들이 설령 그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대는 부정할 수 없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을 아무리 애써 떨쳐보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대는 자신을 벌레로 느끼고 있었고, 그 느낌은 그대를 둘러싼 선량한 이들 또한 그대를 벌레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대의 착각이 아니다. 그들은 그대를 벌레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그대도 자신을 벌레로 느끼고 있었다.


  그대는 언제나 이방인이고, 또 이단아였다. 부모가 원하는 것처럼 착한 아이로 살지 않았고, 사회가 원하는 것처럼 성실한 납세자로 살지 않았으며, 연인이 원하는 것처럼 희생하는 구원자로 살지 않았고, 국가가 원하는 것처럼 민주 시민이라는 이름의 한 표로 살지 않았다.


  그대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유교적 덕목을 수호하지도 않으며, 활력이 넘치는 사회의 역군이 되지도 않고, 온라인 게임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대는 대한민국을 빛내는 천만 관객의 한 사람에 속하지도 않고, 독립영화관을 자주 찾지도 않으며, SNS 스타의 영광에 감동받지도 않고, 개인방송 채널을 열지도 않는다.


  그대는 사실 그러한 것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대는 술먹고 주정부리는 아빠에게도 관심이 없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위하는 엄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진보언론인의 뜨거운 냉소에도 관심이 없고, 가스통 할아버지들의 차가운 고집에도 관심이 없다. 또한 그대는 짜장면에도 관심이 없고, 짬뽕에도 관심이 없다. 근본주의에도 관심이 없고, 다원주의에도 관심이 없다.


  그대는 그 모든, 강요된 흑백사고에, 종용된 진영논리에, 강제된 대결구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간이면 모름지기 보다 본질적인 어느 한쪽의 입장을 택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그 치열한 노력이 변증법적인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이와 같이 살지 않는 이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비겁자라고 그대에게 설파하는 그 모든 근대적 이원론의 폭력에 진실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대는 근대의 시민이 아니라, 현대의 실존이다.


  그대는 현대인이다.


  그대는 "왜?"라며 의미의 문제를 물을 수 있게 된 현대인이다.


  그래서 그대는 오직 단 하나밖에는 관심이 없다.


  "왜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있는 나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지금 삶이 펼쳐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직 그 일밖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는 정말로 알고 싶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그대 자신의 의미를.


  그대는 정말로 알고 있다. 그 모든 이원론의 대답 중 어느 것도 그대에게 정말로 그대 자신의 의미를 알려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여, 그대는 그저 그대 자신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대 자신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이기를 종용하는 그 모든 이원론의 세력들 앞에서,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대 자신임을 드러냈던 것뿐이다.


  그렇게 이원론을 거부한 그대는 그 대신에 언제나 이방인이고, 또 이단아였다. 그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의 빛을 따르지 않으며, 오롯이 그대가 누구인지를 비추는 그대 자신의 빛에 따라서만 항해하는 삶의 여행자였다.


  그래서 그대는 벌레였다. 모든 이원론의 세력들 앞에 그대는 필연적으로 벌레였다.


  모든 이원론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간은, 애초 통제불가능한 삶을 언어를 통해 임의로 분절함으로써, 좀 더 통제할 수 있는 모습처럼 삶을 가공하여 가상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곧, 이원론의 현실은 안정을 추구해온 인간이 발명해낸 가상현실과도 같다.


  그리고 이 가상현실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상반되는 언어들의 대립과 갈등이다. 마찰은 열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단순한 물리학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현실은 늘 하나의 언어적 입장을 택해 상대편과 대립하는 갈등의 반복을 통해 그 구조가 존속된다. 그리고 이 언어적 대립이 계속 유지되어야 할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 대립은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숭고한 기치를 내건다.


  그대여,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이원론이 낳은 근대의 망령이다. 안정을 얻기 위해 끝없이 적을 만들어 싸워야 하는, 너무나도 역설적인 가상현실의 구조다.


  전체주의는 그대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그대 자신의 의미는 전체주의의 관심사가 결코 아니다. 전체주의는 오로지 전체주의라는 구조 자체의 유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때문에 이러한 전체주의의 현실 속에서 그대는 늘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외된 그대의 이름이 바로 벌레다. 그대의 가족, 친구, 동료, 연인, 사회 등을 위시한, 구조의 안정적 유지만을 꾀하는 전체주의의 가상현실에 동의하여 살아가는 그 모든 선량한 이들 앞에서, 그대는 언제나 벌레다.


  그대여,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실존주의의 문제다.


  그대는 현대의 실존이다.


  그대는 진실로 근대적 이원론이 만들어낸 전체주의라는 구조의 유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망령과 같은 관념적 구조에 봉사하는 일은 그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몸이다. 구조가 아닌 삶이다. 그대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현실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태어난 소모품으로서의 도구가 아니고, 늘 당위적 책무로서 처절하게 누군가와 싸워야만 하는 발할라의 각본을 수행하기 위해 태어난 삼류연극의 배우가 아니다.


  그대는 전체주의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그대의 면모, 바로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 자신이 대체 누구인가를 알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는 정녕 현대의 실존이다.


  그리고 이 현대의 실존은 근대의 망령이 보기에는 벌레처럼 너무나 불순하고, 불결하며, 불경하기까지 한 것이다. 실존은 언제나 하나의 구조가 아무리 거대하고 완벽한 구조일지라도, 반드시 그 구조를 해체시키는 까닭이다. 더 구체적으로, 실존은 구조의 진리성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진리처럼 존속되고자 하는 구조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까닭이다.


  그래서 전체주의라는 구조에 몰두하는 근대의 망령은, 늘 집단의 힘으로 그대를 무시하려고 한다. 그대를 잘못된 존재처럼 만들고, 그럼으로써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끔 통제하려고 한다. 왕따의 논리다.


  그대여, 이것이 어떻게 그대가 자신을 벌레로 느끼게 되어왔는지의 그 역사다. 그저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었던 그대가, 얼마나 처참하게 벌레로 무시받아왔는지의 그 비극적 역사다.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다.


  그대여, 현대의 실존이여, 현대인이여, 이제 끝내자. 이제 나가자. 망령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자.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고통을 100%로 정확하게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대는 벌레다. 그대가 벌레인 것이 고통이다.


  그렇다면 그대여, 기꺼이 벌레가 되어보자.


  벌레인 그대를 떠올려보라. 그대는 가장 추악하고, 불결하며, 흉물스러운 벌레다. 길이 50cm의 바퀴벌레 쯤으로 해두자.


  그러한 그대가 하나의 깨끗한 방 안에 출현했다. 잘 정돈되어 안정된 구조를 가진 방이다. 방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늘 에너지를 많이 들일 것 같은 통제의 수고가 느껴지는 방이다. 그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선량한 이의 방이다.


  그렇게 그대가 그 방 안을 세심히 둘러보고 있을 때, 그대는 하나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그대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하나의 몸짓을 보았다.


  아마도 그 방의 주인일 것임이 분명한, 선량한 이가 그대를 포착했다.


  그대는 그저 방의 벽에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대는 그 선량한 이를 해칠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대는 그저 이 모든 것이 대체 왜 자신에게 일어난 것인지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선량한 이는 그대가 그 방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공황에 빠지고 있었다. 두꺼운 잡지책을 던지고, 멀리서 파리채를 휘두르고, 허리를 뒤로 뺀 채 살충제를 분사하고, 지인들에게 단체 카톡을 돌리고, 신에게 기도를 하고, 119에 전화를 할까 고민하며, 그 선량한 이는 대단히 분주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대는 그 선량한 이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선량한 이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대는 보았다.


  그대를 향한 너무나도 큰 무서움을.


  선량한 이는 그대를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여, 이해하겠는가?


  선량한 이는 그대를 감히 무시할 수조차 없었다. 그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그대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존재였다. 통제되지 않는 벌레인 그대는 무시되기는 커녕, 오히려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한치의 경계도 늦출 수 없이, 선량한 이는 그대를 끝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대는 선량한 이의 세계에서 어느새 모든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대여, 정말로 이해하겠는가?


  벌레인 그대는, 방의 주인을 자처하는 이보다도 오히려 더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고를 들여 방의 주인이 되고자 한 그 선량한 이의 어떤 행위보다도, 그대의 단순한 존재가 우선한다. 우선권을 갖는다. 구조에 대해 언제나 실존이 우선권을 갖는다. 선량한 이가 세운 모든 관념의 구조는, 그대의 단순한 실존 앞에 산산히 무너져내릴 뿐이다.


  그렇다면 그 방의 주인은 대체 누구이겠는가?


  바로 그대다. 그대가 그 자리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즉 실존하는 것만으로 모든 권위는 뒤집힌다. 모든 우선권은 그대가 갖는다. 그대가 바로 주인이다. 실존하는 그대가 그 어떤 관념보다도 강력한 진짜 주인공이다.


  현재 그대에게 느껴지는 그대로 자신이 벌레임을 받아들인 그대는, 이처럼 역설적으로 그대가 벌레인 까닭에 결코 무시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진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로 도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는, 이제 그대가 주인공이라는 가장 신성한 사실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선포한다.


  "내가 무섭지?"


  그대여, 바로 이것이다.


  나는 무서워야 한다.


  나를 무서워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존귀하다는 것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결코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무서움은 언제나 경외의 감정에 속한다. 그리고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가 전하듯이, 경외는 통제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총체적 반응이다.


  그대여, 그대 자신은 경외로운 존재다. 그대는 경외되어야 한다.


  모든 망령들은 그대의 앞에서 벌벌 떨어야만 한다.


  살아있지 않은 모든 관념들은, 살아있는 그대의 실존 앞에서 무서워 고개를 들 수 없어야 한다.


  그대는 그 어떤 관념의 당위에도, 그 어떤 집단의 압력에도, 그 어떤 구조의 통제에도 복종하지 않는 자여야 한다. 그렇게 복종하지 않기에, 그대를 복종시키려고 한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자기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그대를, 결코 통제되지 않는 그대를 무서워하며 견딜 수 없어야 한다.


  통제될 수 없는 삶 그 자체, 그것이 원래의 그대다.


  통제될 수 없는 삶 그 자체가 하나의 귀한 몸으로 드러나 지금의 주인공인 그대가 되었다.


  그러한 그대의 이름은 바로 사람이다.


  그대는 사람이다.


  그대는 단 한 번도 벌레였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바로 이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다.


  붓다가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때, 모든 신들이 건방지게 붓다를 내려다 보고 있던 하늘에서 내려와 붓다 앞에 가장 머리를 낮추며 엎드렸다.


  그대도 이와 같다. 그대는 사람으로서, 그대를 가상현실 속에 몰아넣고 벌레 취급해온 그 모든 망령들에게 고해야 한다.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처럼 호령해야 한다. 그대를 비루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통제의 구조를 뒤흔들어야 한다. 관념이라는 귀신의 집을 무너뜨려야 한다. 살아있는 그대 앞에서, 이미 죽은 것들이 감히 나대고 있었던 역사를 종결지어야 한다.


  그대는 원래 그러함이 마땅한 바로 그 삶이다. 그대는 원래 그러함이 마땅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대는 마땅히 무서워야 한다.


  그대를 마땅히 무서워해야 한다.


  "내가 무섭지?"


  그대여, 그대에게 닿은 카프카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묻고 또 물으라.


  그럼으로써, 사람 귀한 줄 모르는 망령들이 사람 귀한 것을 알게 하라.


  그대 귀한 것을 알게 하라.


  나 귀한 것을 알게 하라.


  그것이, 그대가 그 모든 벌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왜?"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진실된 대답이다.







Alice In Chains - Nutshell
We chase misprinted lies
우리는 잘못된 거짓말들을 따르고 있어
We face the path of time
우리는 시간의 길에 직면해 있지
And yet I fight
그래도 난 싸우고 있어
And yet I fight
그래도 난 싸우고 있어
This battle all alone
이 싸움은 혼자만의 것이야
No one to cry to
울어줄 누군가도
No place to call home
집이라 부를 곳도 없어
My gift of self is raped
내 재능은 유린당했고
My privacy is raked
내 고유한 삶은 착취당했지
And yet I find
그래도 난 찾을 거야
And yet I find
그래도 난 찾을 거야
Repeating in my head
늘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
If I can't be my own
내가 내 자신일 수 없다면
I'd feel better dead
차라리 죽는게 나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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