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닫는마음씨 Aug 09. 2019

양육의 심리학과 실존의 심리학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심리학은 분명 현대의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운용하거나 소비하는 이들이 근대적 정신 내지는 전근대적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까닭에, 심리학 또한 그러한 양상으로 환원되곤 한다.


  아주 단순하게,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은 바로 '나'의 출현이다. 이 구체적인 몸을 가진 자신(自身)이, 결코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착취되는 도구나 소외되는 부품이 될 수 없이, 애초 온전한 전인적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대는 착취와 소외의 이유가 되는 대상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인간은 더는 대상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보하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대상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얻어내기 위해 즐겨 해왔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우상과 희생양의 논리를 반복적으로 악순환시키는 사태를 멈추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대상화의 기제는 바로 부모-자식 관계에서의 양육의 논리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때문에 현대적 삶에서 거부되는 가장 핵심적인 기제는 바로 양육이다.


  양육은 포유류를 대표하는 종적 특성이다. 곧, 동물의 자연적 생태에서 드러나는 본능적 특성이다. 때문에 모든 본능과 같이 양육 또한 맹목적이다. 맹목적이라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양육은 자유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자유는 언제나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양육은 그 반대로 하나의 경계 안으로 끝없이 통합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때문에 양육은 경계를 넘어 자유롭고자 하는 개인에게는 그 자신을 위협하는 논리가 된다. 곧, 죽음에의 암시가 된다.


  실제로 양육은, 인간이 언어적으로 모든 긍정적 수식어를 덧붙이며 가공하는 미학적 형태와는 상반되게, 불편한 진실을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다.


  양육의 핵심은 선별이다. 우수하게 태어난 종자에게는 젖을 더 먹이고, 그렇지 못한 열등한 종자에게는 과감하게 그 목숨을 박탈하는 선별을 이룬다. 포유류는 결코 낭만적인 종이 아니다. 양육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시키기 위해 적자생존의 원리에 최적화된, 냉정한 자연의 기제일 뿐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부모가 원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하려할 때, 우리에게 죄책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선별작업으로 인한 죽음의 암시가 작동하는 까닭이다. 죄책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곧, 우리가 부모의 경계를 벗어난다면, 열등한 종자로 인식되어 죽게 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죄책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부모-자식 관계의 양육이라는 포유류의 기제에 입각하여 그의 정신분석이론을 구성했다. 이러한 이론 속에서, 우리는 늘 부모와의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결국에는 건강한 부모의 모습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에 따라, 우리 또한 건실한 성인주체가 되는 것으로서 그 목표가 제시된다. 즉, 잘 양육된 인간상을 실현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목표가 된다.


  나아가 프로이트의 제자인 아들러는 이 포유류의 기제를 형제-자매 관계로까지 연장했다. 포유류의 어린 개체들이 더 우수한 종자로 부모에게 인식되어 더 많은 젖을 공급받기 위해 늘 서로 간에 경쟁을 펼치는 생태를, 인간의 심리적 관계론에 적용한 것이다. 그렇게 포유류의 생존경쟁에서 야기된 열등감을 극복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효능감을 담지해가는 심리적 주체의 모습이 아들러에게 있어서는 건강한 인간상으로 제시된다.


  이밖에도,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의 후예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포유류의 기제를 그 근저로 삼아 이론을 전개해나간다. 어떻든 간에 정신분석 계통의 접근에서 결코 거세될 수 없는 핵심은 부모-자식 관계다. 양육에 대한 집착은 정신분석 계통의 본질적 특성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포유류의 심리학 또는 양육의 심리학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신분석 내지 정신역동의 영향을 크게 받는 심리치료의 전통 속에서는, 상담자가 양육자로 묘사되는 일이 빈번하다. 부모에게 제대로 양육받지 못한 내담자를, 상담자가 건강한 양육자가 되어 재양육하는 일이 마치 심리치료의 진리명제인 것처럼 진술된다.


  이는 바로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상담자의 착취 및 희생을 당연하게 종용하는 구조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끝없이 부활하는 근대의 망령이다.


  이처럼 양육의 심리학을 심리치료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은 내담자로서 상담자에게 온갖 폭력을 시도하곤 한다. 이를테면, 상담자가 무조건 자기의 말에 동조해줘야 하고,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우쭈쭈 내 새끼가 젤 이뻐."라고 해주듯이 상담자 또한 자기를 절대적으로 칭찬해줄 의무가 있으며, 상담자는 그냥 입을 닫고 자기가 하는 말에 따듯한 공감만 해주면 되는 공감자판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특히 공감이라는 신성한 개념은 이러한 방식으로 양육의 심리학에 의해 크게 오염되어왔다.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본주의 심리학의 아버지인 칼 로저스가, 부모의 양육은 인간의 전인성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이들 양육의 심리학의 추종자들은 애써 무시한다. 오로지 양육을 절대적인 진리의 자리에 놓고, 모든 개념들을 양육지향적인 개념으로 굴절시키고 환원시켜서 양육의 개념 아래 종속되게 할 뿐이다. 이 또한 철저하게 근대적인 전횡이다.


  로저스는, 애착이론에서 말하듯이 부모가 나쁜 양육을 해선 안되고 좋은 양육을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무리 좋은 양육이라 할지라도, 양육 그 자체가 반드시 개인의 전인성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온전한 유기체로 자각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은, 양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양육 때문에 훼손당한 자신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로저스는 보았다.


  때문에 로저스가 그의 심리치료론에서 핵심적으로 제시한 공감은 결코 양육의 논리가 아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심정을 알아봐주고, 대변해주며, 위로해주는 것처럼 내담자에게 행위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공감은 부모-자식의 관계 구도에서처럼, 위에 있는 이가 아래에 있는 이의 심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타자와 동일한 유한자적 입장에 수평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 사실에 감응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공감은 보살핌의 원리가 아니다. 돌봄의 원리가 아니다. 양육의 원리가 아니다. 성황당에서, 기도원에서, 산신각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가 간절히 기도하다가, 고된 자식의 심정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그것은, 최소 로저스가 말한 공감은 결코 아니다.


  로저스가 실존주의를 자신의 심리치료론의 핵심적인 근거가 되어주는 사상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실제로 1980년대에 로저스는 미국의 실존주의 심리학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실존주의의 접근이 얼마나 그 자신의 인본주의적 심리치료론과 맥을 함께하는지를 진술하면서, 자신도 실존상담자로 불리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바 있다.


  때문에 공감은 사실 대단히 실존적인 개념이다. 공감의 작용은 오히려 실존주의로부터 출발한 학자들,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가브리엘 마르셀, 모리스 메를로퐁티 등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묘사된다.


  공감의 핵심은 단독으로 마주해서 느끼는 것이다. 즉, 타자 앞에 선 단독자로서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바로 공감이다. 때문에 그것은 결코 양육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는 타자에 대해, 보살피고, 돌보며, 양육하는 일은 애초 성립되지도 못하는 까닭이다.


  롤로 메이, 커크 슈나이더, 반 두르젠, 어네스토 스피넬리, 믹 쿠퍼, 한스 콘 등과 같은 실존주의 심리학자들 그리고 실존상담자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실존주의 심리학을 정신분석과 명확하게 변별하려고 한다. 정신분석은 이미 인간의 심리를 교리적 구조로 구축하고 있는 본질주의 심리학이며, 때문에 이와 같은 본질주의적 구조 속에서는 그 구조 밖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미지의 타자성이 소외되는 까닭이다.


  이는 다시 한 번 경계의 문제를 시사한다.


  정신분석의 계통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넓은 경계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경계 안이다. 융과 같은 이가 아무리 방대한 체계를 구성했다고 하더라도, 핵심은 그 체계 안이다. 그것은 경계를 유지하고, 경계 안의 것들을 안정적으로 돌보는, 경계의 경영에 대한 논리다.


  그러나 실존의 심리학은 다르다. 실존주의의 전통과 유사한 동양의 전통인 선(禪)에서는 격외선(格外禪)이라는 표현을 쓴다. 깨달음은 하나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거대하고 통합적인 포괄적 경계일지라도, 반드시 그 모든 경계 밖에 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실존 또한, 본질이라고 가정된 하나의 경계 밖으로 언제나 빠져나가려는 운동에 대한 묘사다.


  선에서 깨달음이라고 말할 정도의 놀라운 현실, 그리고 실존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감을 실감하게 되는 바로 그 현실은, 경계 밖에 있다. 때문에 경계 안을 관장하는 양육의 논리로는 결코 닿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양육의 논리가 바로 포유류의 동물적 생태에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양육의 경계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곧 동물의 경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실존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동물로 태어났지만, 그 동물이라는 경계, 즉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자기초월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실존주의의 전통에 서있는 니체가 말하듯이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초극자다.


  아주 단순하게, 양육은 자기보다 높은 위상의 남에 의해 자기가 나아지는 것이라면, 초월은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 온전해지는 것이다. 정신분석 계통의 치료자들이 늘 내담자에 대해 권위를 담지하게 되는 경향성은 바로 이러한 양육의 구조 위에 그 활동이 성립되고 있는 까닭이다. 반면, 실존상담자들은 내담자에 대해 그 어떤 양육의 입장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은 자신들이 내담자와 동일한 한계 속에 놓여 있는 표현 그대로의 동반자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실존상담자들은 내담자들과 같은 한계를 체험하며, 내담자의 문제를 정확하게 자신의 문제로 삼는다. 그럼으로써 상담자 자신이 그 한계의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현실을 탐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며, 결국 실현된 한계 밖으로의 초월은 내담자에게 그 자체로 실증적인 자유의 본이 된다. 바로 이것이 진짜 공감이다. 공감은 따듯한 위로와 지지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상대와 같은 한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초월의 단초가 된다.


  공감을 통해 하나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 경계 밖으로 초월되어 나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이처럼 초월의 다른 이름은 바로 자유다. 때문에 전술한 것처럼 양육이 자유의 반대편에 놓이듯이, 동시에 양육은 초월의 반대편에도 놓인다. 양육을 통해 초월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의 경계에 놓인 자기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나'로 살 수 없게 된다.


  한 번 더 상기하건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은 바로 '나'의 출현이다. 그리고 이 '나'를 부르짖은 것이 바로 실존철학이다. 실존철학이 반동한 근대의 시대정신은 양육의 정신이다. 근대의 인간은 자기를 최고의 양육자로 자처해왔다. 신을 대신해 세계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위대한 존재로까지 스스로를 상격시켰다. 완벽한 궁극의 부모가 되기를 꿈꿨던 존재, 그것이 바로 근대의 인간이다.


  그러나 이 관념적인 최고 및 완벽이라는 목적에 대한 추구 속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짓밟혀왔다. 진보사관 아래 인간은 숨막히는 성장과 발달의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야 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목표 안에, 분명하게도 '나'는 없었다. 언제나 내가 아닌 가족이, 혈족이, 국가가 중요했으며, 나는 그것들에 대한 봉사물이었다. 자기최면을 위해 근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인, 주체적 시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만 가진 채, 나는 말라죽어가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양육을 절대적 가치로 삼는 군집의 포유류로 사는 일은 이처럼 힘든 일이었다. 비극이었다. 양육의 논리 속에서 오히려 나는 더 열등하고 비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양육의 논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결과처럼, 나는 늘 죽음을 위협받았다. 나와 같은 열등한 종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며, 이 모든 양육의 사회가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양육을 숭상하는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 언제나 죄인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그리고 이처럼 비루한 나를, 한계에 갇혀 시름하는 유한자인 나를, 그 한계 밖으로 자유롭게 안내하기 위해 실존철학이 찾아왔다. 예수가 찾아왔고, 붓다가 찾아왔으며, 체 게바라가 찾아왔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누구의 구원자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구원자가 필요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을 구원합니다."


  이것은 실존의 심리학의 목소리였다.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의 심리학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나에게는 양육자라는 이름의 구원자는 필요하지 않다. 바로 이 자체가 핵심적인 구원의 기제다. 즉, 구원자를 포기하는 순간, 양육을 포기하는 순간, 나는 반드시 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양육의 경계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 경계 밖으로 자유로워진다. 포유류로 살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된다. 군집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된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우리는 포유류를 신으로 모시며, 포유류의 논리 속에서 점점 더 열등한 종자가 되게끔 우리 자신을 방치해왔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포유류의 대명사는 바로 개다. 우리는 그동안 동네 골목길의 터줏견을 신으로 모셔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비참한 일이다.


  양육의 심리학 속에서, 이처럼 우리는 나날이 비참해진다. 이 비참함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무엇인가가 대단히 부조리하다는 실존의식이 싹트는 순간이다. 실존적 역설이 꽃을 피우는 영광의 순간이다.


  유한성의 자각은 바로 우리가 지금 하나의 경계에 갇혀 있다는 명확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그 경계 안에는 우리를 구원해줄 어떠한 답도 없으며, 경계 안이 고통스러운 우리에게는 오직 경계 밖으로 나가는 일만이 필요하다는 명료한 사실을 시사해준다.


  포유류의 경계 속에서 우리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열등한 종자로서 판정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포유류로서 이미 열등하다.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양육의 논리는 일찌감치 우리를 하등한 개체로서 선별했다. 때문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자기를 변화시키려 해도, 끝없는 불만족과 죄책감만 경험하게 된다.


  양육의 논리에 순응하며, 하나의 성실한 아이로서, 혹은 또 하나의 유능한 양육자로서 우리 자신을 다잡으려 해도,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현대에 진입해 '나'라고 하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우리는 더는 우리 자신을 포유류라고 속일 수 없다. 우리는 더는 우리 자신을 양육이 필요한 존재라고 속일 수 없다. 우리는 더는 '나'를 속일 수 없다.


  터져나온 나를 이제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울분인 까닭이다.


  그것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열등한 종자로 태어나, 그 모든 수모를 당하고, 그 모든 살해의 협박을 받으며, 그 모든 한계의 고통 속에서, 이제서야, 이제서야 어렵사리 터져나온, 나라고 하는 인간을 부르짖는 울분인 까닭이다.


  '나'는, 포유류로서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인생이 망했던 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겨우 발견해낸 바로 그 자리다. 자신이 창조해낸 자신의 자리다. 자신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으로 살고자 결단한 삶의 자리다.


  이처럼, 양육의 논리가 낳은 포유류로서의 열등함은, 역설적으로 나라는 인간을 향한 초월의 가능성이었다.


  포유류의 군집이 우리를 울타리 밖으로 추방했을 때, 그 울타리 밖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포유류를 넘어선 인간임을 외쳤다. 포유류로서 열등했던 까닭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열등하게 만든 포유류라고 하는 그 한계를 넘어 서 있는 온전한 인간을 외쳤다. 바로 '나'를 외쳤다.


  열등하게 태어난 모든 포유류는 이 스스로가 인간임을 외치는 선언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구원해냈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해냈다.


  이것을 우리는 바로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모든 암울한 결정론적 조건을 넘어서, 그 조건의 한계 밖으로, 자신의 온전함을 무조건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이 경이로운 운동이 바로 사랑이다.


  때문에 실존의 심리학에서, 자유, 초월, 사랑은 다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들이다. 이는 인간이 인간인 바로 그 이유들에 대한 묘사다.


  인간은 자유할 수 있고, 초월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곧, 인간은 인간할 수 있다.


  나는 자유할 수 있고, 초월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곧, 나는 나할 수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현실이다.


  인간에는 이처럼 더할 것이 없다. 나에는 이처럼 더할 것이 없다. 부족하지 않고, 온전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의 말을 살짝 변주해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최후의 술어다."


  "나는 최후의 술어다."


  인간은, 나는, 언제나 경계 밖의 그것이다. 하나의 경계에 사로잡혀도, 다시 또 그 바깥의 것이다. 최후의 것이다. 끝없이 탈존한다.


  즉, 인간이 언제나 가장 크다. 내가 언제나 가장 크다.


  가장 큰 자를 양육할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인간이라는 신비의 크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담지한 많은 고등종교들에서 양육의 논리를 철저하게 사랑과 경계짓는 이유다.


  양육이라니 정녕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양육의 크기로 인간은 결코 축소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양육 이상의 것이고, 포유류 이상의 것이며, 양육의 심리학 이상의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인간은, 나라고 하는 그 신비는 하늘만큼 장대하고, 바다만큼 깊다.


  이러한 나는 양육자의 재산이기에 앞서, 먼저 우주의 보물이다. 양육자의 소유이기에 앞서, 먼저 우주의 자유다. 양육자의 조건적인 선별의 희생자이기에 앞서, 먼저 우주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수혜자다. 이처럼 내 자신이 자유라고 하는, 우주의 사랑받는 보물임을 자각하도록 안내하는 일, 이것이 실존의 심리학이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 단 하나의 활동이다.








Nine Inch Nails - La Mer
and when the day arrives
그 날이 오면
i'll become the sky
나는 하늘이 될거야
and i'll become the sea
나는 바다가 될거야
and the sea will come to kiss me
바다가 나에게 키스해줄거야
for i am going home
나는 집에 갈거야
NOTHING CAN STOP ME NOW
이제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어



작가의 이전글 자신을 벌레처럼 느끼는 그대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