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23

"트루먼 쇼의 끝"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상담에 대한 감을 잡기에 좋은 영화를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우리는 1998년작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세계'를 떠나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존이다.


세.계. 밖.에. 세.계.가. 있.다. 이 말은 하나의 세계를 떠나 더 큰 세계로 확장해가는 자아의 성장과 발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착각되어 있는가를 뜻한다.


실존상담자인 스피넬리는 세계를 지시하는 두 용어로서 worldview와 worlding을 구분한다. 전자가 보통 우리가 세계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얻은 만큼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 것처럼 경험하는 경우다. 이 입장에서는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다."라고 말하는 일이 정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언어의 한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언어로 확장되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언어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피넬리는 말한다. 이것은 오직 자.신.이. 모.험.하.며. 산. 만.큼. 펼.쳐.지.는. 것.이다.


worldview라는 단어의 직관적인 뜻 그대로 이를 '세상(世像)'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이는 이미지다. worlding은 굳이 번역어를 찾자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세계'를 떠나 <세계>로 향한다는 말은, '세상'을 떠나 '삶'을 향한다는 말로 다시 이해할 수 있다. 삶은 이처럼 세상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 집단성의 소재이며, 삶이라는 것은 절대적 주관성의 소재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누구라도 개인으로 태어나고 개인으로 죽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오롯한 개인만의 사건이다. 어떠한 '남의 이야기'도 거기에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죽지 않는다. 동시에 어떠한 '나의 이야기'도 삶과 죽음에는 개입될 수 없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려면 관측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나의 이야기'라고 말하려면 관측자가 내 자신이어야 하는데, 내 자신의 삶과 죽음은 내 자신에게 관측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관측자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우.리.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삶의 방관자로 있는 일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죽지 않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나온다. 침체된 우울감이 기본정서가 되며, 그 정서를 숨기기 위해 짓는 부드럽고 쾌활한 웃음이 기본태도가 된다.


좋은 가족,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이웃들과 함께 멋진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공동체적 정신은 여기에서 나온다. 관계지상주의의 출현이다.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매일밤 동네 호프집에 모여 수천 번은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그래도 이런 게 인생의 맛 아니겠냐며, 니가 있고 내가 있고 또 우리가 있으니 이 어찌 좋은 일 아니겠냐며, 500잔과 입가에 묻은 치킨기름처럼 번질번질한 대사들로 구질구질한 밤의 장면을 광내고자 하는 일들이다.


자신의 깜깜한 얼굴(面)을 어떻게든 빛(光)내보고자 관계는 시도된다. 왁스를 칠한 얼굴들로 관계 속에서 다들 웃음짓는다.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연출해본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서로에게 신실하다.


이것이 '트루먼 쇼'다. 진실한(true) 인간(man)으로 보이려는(show) 활동이다.


진실은 자신의 삶에 의미와 재미가 없을 때 그 대신 추구되는 거의 마지막의 것이다. 썩을대로 썩은 동아줄인데 그래도 붙잡아야만 할 것 같은 것이다. 왜 그럴까?


진실이란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진실은 다른 관측자와는 변별되는 하나의 관측자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특.정.한. 관.점.을. 정.당.화.하.고.자. 구.성.된. 이.야.기,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서로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긴다. 자신의 관점에 따른 정당한 진실의 이야기를 보유했다고 서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갈.등.은. 진.실. 대. 진.실.의. 갈.등.이.다.


상담소에 찾아온 내담자들이 그토록 열렬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상담자라는 심리학적 권위의 상징물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자신이 정말로 진실이었다는 보증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담자들이 상담소에서 일차적으로 하는 활동 또한, 자신을 진실한 인간으로 보이려 하는 트루먼 쇼다.


그런데 이 진실이 작동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서로 싸운 부부가 상담소에 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


"제가 이 관계를 망치지 않았고, 상대가 망쳤어요. 그게 진실입니다."


진실의 내용은 달라도, 진실의 목적은 같다. 그것은 관계에 대해 '좋은 사람'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실은 관계의 봉사재다. 사회적으로 진실을 다투는 일 역시도 결국 누가 사회라고 하는 관계구조를 위협하지 않는 더 '착한 아이'로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가의 일이다.


우리는 지금 진실의 쓰임새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 무수한 관점들이 있다지만, 그 관점들은 거의 모두 다 관계 안의 정당한 자기정체성의 확보를 위해서만 활용된다. 그렇다면 굳이 무수한 관점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든 관계 내에서 늘 좋은 사람!"이라고만 하면 될 일이다.


이 시대에 '진실한 인간'이란 이처럼 '관계적 인간'을 뜻한다.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다. 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하지만 않으면 또한 진실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일.종.의. 결.벽.증.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니 상담에서 다루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상담에서는 '사실'을 다룬다. fact가 아니라 real의 의미다.


"무엇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이것은 '관점주의'가 아니다. 그 모든 관점을 발생시킨 사건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건주의'다. 이를테면, A는 위도 38도, 경도 112도에서 어떠한 별을 관측했다. B는 위도 72도, 경도 45도에서 동일한 별을 관측했다. 서로는 자신이 진실을 보았다고 말한다. 최소한 자신의 진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을 하기 전에 상담은 그 관점들이 어떠한 사건을 바탕으로 일어났는가를 살핀다.


여기에는 지구가 구의 형상이며 자전한다고 하는 사실적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에 관점들도 출현 가능하다. 그리고 실은 이 사.건.에. 의.해. 관.점.들. 또.한. 변.해.간.다.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데 같은 좌표에서 관측하는 별의 형상이 늘 같을리가 없다.


그러나 진실은 관점을 이야기로 만들어 항구적인 속성을 갖게끔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늘 동일해야 한다는 자기강박을 갖는다. 이야기가 내포하는 동일성의 속성이다. 동일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붕괴된다. 이야기는 귀납이 아닌 연역의 소재다. 연역은 하나의 예외라도 출현하면 무너진다. 그러니 이야기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트루먼 쇼의 세상이 예외의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다. 모두가 그 세상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잘 통제된 '진실한 인간'으로 보이려는 연극만을 반복한다. 이 연극의 집행자들은 한 목소리로 이러한 진실을 말한다.


"모두가 다 네 편이야. 모두 다 너를 위해서라고. 요람 밖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무서운 곳이지만, 너를 위해 만든 이 요람 안에서는 너는 특별하고 안전한 존재야. 너는 여기에서 스타라고."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진실을 호소하는 이들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너를 위해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며 살았어."


그래서 모.든. 진.실.은. 사.실.이. 아.니.다. 개인의 삶이라고 하는 사건은 누구도 남을 위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린다. 누구나 자신으로 시작해, 자신을 향해, 자신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 말은 누구도 실은 진실한 인간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누구도 트루먼을 위해 살지 않는다.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트루먼을 이용할 뿐이다.


영화 속 트루먼은 공공의 아이다. "우리가 너를 지켜줄 거야."라는 자상한 표어 아래 모두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아이인 것만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가? 트루먼이 공공의 아이가 된 것은 5명의 후보군 중 그가 그저 방송날짜에 맞추어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적용하기 위해 쓴 이야기가 그가 누구인지를 만들 것이다. 대부분의 미디어차일드의 모습이다.


미디어차일드는 사람들이 자기의 외로움과, 새장에 갇힌 운명과, 그에 대한 연민을 투사할 보편재로서의 어린양이다. 원시사회에서 부족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대하던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정해진 시기에 수신에게 봉헌하기 위해 산채로 강물에 던져질 제물의 아이다. 그러한 공아(共兒)의 운명은 고아(孤兒)보다도 더 외로운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친절하게 웃어주며 함께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가 쓴 그의 이야기만을 본다.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보며 하고자 하는 일은 자기망각이다. 제물이 될 어린양의 운명에 울고, 웃고, 공감하며,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망각하고자 한다. 그 망각의 촉진이 제물의 역할이다. 여기에는 이 미디어제사를 집전하는 샤먼이 있다. 그가 바로 작가적 주체다. 작가적 주체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를 제공함으로써 모두가 트루먼이 되게 만들어 망각을 심화시켜 간다. 왜 그러는가? 작가적 주체 자신이 제일 자기의 인생을 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적 주체는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작.가.적. 주.체.는.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세상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 자신이 창조해내는 것이다. 진실은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만 있다.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다. 모두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줄 진실한 자신의 모습은 다정한 창조주다.


누가 이러한 일을 하는가? 실제의 삶에 대해 가장 두려움을 경험하는 이가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두려움의 크기가 망각의 크기가 된다. 그렇다면 왜 두려워지는가? 통.제.하.려.고. 하.기.에. 두.려.워.진.다. 삶을 가장 통제하려고 하는 이가 삶을 가장 두려운 것으로 경험한다. 그래서 언어로 삶을 가두어 인공적인 낙원을 만들어낸 뒤, 그 세상 안에서의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두려움을 철저히 봉쇄하려 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실'을 조금씩 눈치채게 된 트루먼이 예외적인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너무 두려워요."


분명 진실한 인간으로 보이려 하는 이에게 '사실'은 두려움의 소재다. 사.실.은. 언.제.나. 진.실.을. 깨.기. 때.문.이.다. 진실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낙원과 같은 '세계'로 여기며 그 안에 틀어박힌 이에게는 '세계'를 깨고 '세계 밖'을 향하는 것 같은 모든 언행은 결국 이것을 암시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진실의 창조주나 그 소비자나 동일한 믿음을 공유한다. 진실을 통해 죽음이 극복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작동할 수 없는 믿음이다. 진.실.은. 사.실.을. 이.길. 수. 없.다. 죽음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우리가 사실을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산다는 것이다. 삶은 원래 죽음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하루하루 죽음에 떠는 희생자로, 또는 죽음과 싸우는 영웅으로 산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감수성이 정확하다.


"죽어도 좋아."


언제 죽어도 좋은 삶을 사는 것, 그렇게 절대적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을 산다고 하는 것의 의미다.


모험이라고 부른다. 모험은 죽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살려고 나가는 것이다. 언제라도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살아야 우리는 정말로 살게 된다.


트루먼이, '진실한 인간'이 사는 세상은 산채로 죽어가는 곳이다.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트루먼에게 사람들은 "아이를 가져야지, 모험은 왜 해요?"라고 말한다. 관계의 구조를 강화해야 자기를 망각하고 싶어하는 쇼의 소비자들이 더욱 기뻐한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사네. 참 안심이 되고, 인간답고, 공감이 간다."라며 자신들의 삶이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위안을 얻는다. "이렇게 멋진 우리들이 지금 함께 걸어나가고 있어요!"라는 셀프감격을 얻는다.


불안하니 위안을 만들어내고, 감동이 없으니 감격을 만들어낸다. 진실은 이 위안과 감격을 위한 통제의 기제다.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관점은 관측자에 의해 좌우된다. 관측자는 결코 투명할 수 없다. 관측자의 관측행위는 언제나 관측되는 것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해는 현대의 상식이다. 즉,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관.측.자.에. 의.해. 통.제.된. 결.과.물.이.다. 관측자에 의해 통제된 관점을, 관측자와 동일한 주체인 작가가 다시 한번 통제하여 진실로 만든다. 진실은 이처럼 이중통제된 두 겹의 감옥이다.


세.계.는. 두. 번. 깨.진.다.


트루먼이 낙원과 같은 섬에서 나온 것만으로 그가 삶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작가적 주체는 그러한 이야기로부터의 탈주를 보며 찬사를 보낸다. "영웅의 모습이로군!" 작가적 주체는 카메라를 들이밀며 즉각 새로운 이야기를 집필해나간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의 정체다. 진실로 믿어왔던 남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정말로 진실된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가겠다고 하는 행위는 여전히 '진실'이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


관측자로부터 해방될 때, 관점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것이 두 번째의 탈출이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메타인지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메타적 관찰자아 같은 것을 경험한 이는 이제 자신이 그 관찰자아의 '시선' 같은 것이 되어 모든 것을 관측하고자 한다. 자기는 투명하게 전모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 투명한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따듯하게 돌보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트루먼을 지켜보는 트루먼 쇼의 작가의 마음이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죽여."


작가는 왜 트루먼을 자신이 키운 아이처럼 대하는가? 왜 트루먼의 아버지처럼 행세하는가? 자신이 여전히 아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상한 아버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투명한 관측자는 없다. 투명한 작가도 없다. 자기의 결핍을 투사해 관측하고, 또 관점을 형성할 뿐이다. 자기의 결핍을 보상해줄 소재와 방향성에 '진실'이라고 이름붙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작가적 주체의 '진실'은 한낱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보급되어 권위를 행사한다.


트루먼은 작가적 주체의 '진실'에 의해 착취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착취는 우리가 좌표에 따른 '자신의 진실'을 말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게 관계적 세상에 봉사하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늘 강요받고 있어서 생겨난다. 은밀한 권위의 강요에 의해 우리는 당당한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늘 관점들끼리의 대립과 갈등을 낳고 그것을 통합해줄 작가적 주체를 불러 청한다. 자신을 착취한 작가적 주체의 '진실'을 오히려 자신이 수호하며, 동일한 그 진실강요의 방식으로 또 다른 이를 착취하는 일을 재생산한다. 그렇게 작가적 주체의 '진실'만을 비대하게 정당화해준다.


이 비대함을 통해 우리는 작가적 주체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대전제를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다."


부족하니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통합의 역동이 이루어지고, 성공적인 통합의 결과 개인이 결핍을 극복하여 보다 완전해진 인간의 면모를 갖추어가게 된다는 성장과 발달의 '비대한 모델'이 이러한 전제에 따라 구성된다. 이것이 인간의 진실이며, 이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이야기다. 작가적 주체의 말이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작가적 주체는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미숙아 바보인 줄 안다. 아.니. 너.만. 그.렇.다. 보행기에 타서 엄지손가락을 빨며 응애 하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이지,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는 짐짓 점잔을 빼며 성숙한 척하지만, 요람과 같은 미숙아들의 낙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작가적 주체 그 자신일 뿐이다. 그러나 작가적 주체는 아이라고 하는 것을 유치하게 보기에 자신만은 아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실은 엄청 유치하지만 언어라는 포장지로 성숙을 위장한다. 그래서 정말로 유치해진다.


반면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는 무엇을 하는가? 바로 모험을 한다. 모.험.은. 아.이.와. 같.은. 정.신.의. 특.권.이.다. 동네 뒷산으로, 밤의 골목길로, 버스의 종점으로 모험을 떠나는 아이는 유치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어여쁘고 신성하다. 다만 사랑스럽다.


사.랑.은. 모.험.하.는. 인.간.을. 쫓.는.다. 그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 모험을 나서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사랑을 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험하는 그를 사랑이 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험하는 인간은 사랑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유치할 수가 없다. 유치함의 핵심은 무엇인가? 고집이다. 고집은 언제나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고집이다. 즉, 자.기.의.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고.집.이.다. 혼자 고생이 많은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위해 유치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서, 고집부리지 않는 척, 모든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며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척할 때 생겨나는 것이 유치함이다. 앞서 말했듯이, 유치한데 유치하지 않은 척하니 유치해지는 것이다.


진실은 유치한 것이며, 세상은 유치한 것이다. 작가적 주체는 가장 유치한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작가적 주체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탈서사는 이야기에서 나와 작가적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작가적 주체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갈매기 조나단』에서 조나단은 말한다.


"제발 나를 이야기로 만들지 마라."


상담은 내담자의 진실한 이야기를 찾아주는 일이 아니며, 내담자가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집필할 수 있는 작가적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그의 성장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다. 내담자가 사실을, 그의 삶과 죽음을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진실한 인간으로 보이려는 일을 멈추고, 차라리 미움받더라도, 진짜 사람으로 살도록 안내하는 일이다. '트루먼 쇼'가 아니라 '리얼맨 라이프'를 향한 활동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How's it going to end)?"


트루먼이라고 불렸던 한 인간을 거듭 깨우던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동일한 것이다.


"무엇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끝'을 묻는 것은 '사실'을 묻는 것이다. 곧, 삶을 묻는 것이다. 삶.은. 사.실.이.다. 통.째.로. 다. 진.짜.다. 삶에 대한 진실의 관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좌표에서 사는 그 누구이든 간에, 모두 다 죽는다. 그렇다면 더는 이렇게는 살 수 없지 않겠는가? 하루를 살더라도 진짜로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트루먼 쇼의 끝을 물으며, 모든 내담자는 상담소를 찾는다. 진실한 인간으로 그만 살고자, 트루먼으로 그만 살고자, 나아가 작가적 주체로 그만 살고자, 내담자들은 이 모든 것의 끝을 소망한다. 출구(exit)를 소망한다. '출구의 바깥쪽에 서는 일(existence)'을 소망한다. 그 바깥쪽에 삶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살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더라도 진짜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이. 그.의. 사.랑.을. 봉.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아니 모든 사랑은 원래 예외적인 것이다. 사건 중의 사건이다. 사랑이 언제나 '세계'를 박살낸다. 두 번 박살낸다. 사랑 자신이 이야기 안에 있지 않음을 알리고, 사랑 자신이 작가적 주체의 가슴 안에서 연유하지 않음을 알린다. 이 말은 무엇일까? 사.랑.은. 세.상.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랑은 조건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냥 막 들이닥치는 무조건적 사건이다.


이러한 것을 사태라고 부른다. 사랑은 사태다. 쏟아지는 것이다. 퍼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진실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방식이다. 진실의 폭우가 아무리 퍼부어져도, 사랑이 먼저 인간을 더 깊이 적신다. '이 멋진 세상' 속에서 '진실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위안과 감격이 아무리 강요되어도, 사랑이 먼저 그를 안심시키고 감동시켰다.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다. 사랑이 먼저 그를 휘어잡았기에 그는 '세계'의 끝으로 발걸음을 뗀다. 죽어도 좋은 것을 향해 모험한다. 문을 열고, 그가 사랑할[살아갈] 그 자신의 삶을 만난다. <세계>가 열린 것이다.


상담소의 문을 열고 인간이 걸어나간다. 상담이 무의식을 향한 모험 따위가 아니라, 상담이 끝난 후가 이제 그의 모험인 것이다. 『갈매기 조나단』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보아라. 사랑을 향한 그의 줄달음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무엇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언제인가 아득하던 때에 트루먼이었던 이는 그 끝에서 인간이라는 사실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의. 끝.은. 인.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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