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24

"근대성과 꼰대성: 청소하는 인간"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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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에서 상담을 한다면 '꼰대'라고 하는 현상에 대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담자들은 자신의 꼰대성으로부터 연유한 고통으로 인해 상담을 시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꼰.대.는. 실.존.의. 좌.절.이.다. 적어도 자신의 실존이 좌절되어 있다는 자신의 꼰대성을 자각하고 상담소를 찾는 내담자는 정직하고 아름답다. 대부분의 꼰대는 상담소를 찾지 않는다. 꼰대의 핵심특성이 무엇인가? 자.기. 자.신.은.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꼰대는 자신이 젊고 열려있는 생각을 가지며, 자유로운 영혼이자, 늘 순수하고 무오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런 즉,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이 추악한 사회와 덜 떨어진 우민들이다.


이처럼 꼰대는 단순한 '권위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꼰대는 오히려 '결벽주의'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꼰.대.는. 자.신.이. 먼.지.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다.


칼 라너는 인간의 '유한성'을 먼지(dust)로 비유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이 먼지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먼지성'을 타인에게 투사해 그를 짓밟고 이 세상에서 추방하려 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자신만은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날아드는 '더러운 타자'를 청소하고자 하는 결벽주의의 모습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꼰대는 일종의 '영적 결벽증(spiritual mysophobia)'이다. 꼰대의 표어는 이러하다.


"치우자. 정리하자. 청산하자."


이 표어에 충실하게 행위하는 만큼, 꼰대는 자신이 더욱 높은 수준의 정신적 존재로 거듭난다고 믿는다. 표현 그대로 영적 결벽증은 꼰대의 영적 성장론이다. 그래서 꼰대는 본질적으로 '수행자'다. 이것은 선(禪)의 전통에서, 늘 열심히 쓸고 닦아 깨끗하게 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 신수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선에서는 절대로 이러한 방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그 경계를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꼰대는 고집스럽다.


이러한 고집에는 꼰대라고 하는 현상을 만들어낸 독특한 기원이 작용한다.


첫 번째로, 우리가 '꼰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근대성'이다. 근.대.성.이. 곧. 꼰.대.성.이.다. 사상사적으로 근대를 완성했다고 말하는 헤겔을 돌이켜보자. 헤겔이 근대의 완성자이지만 동시에 근대를 초월하고자 했다는 해석은 잠시 차치하고, 우리가 헤겔을 이해하는 그 전반적인 '인상'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자기완결의 사상가이다. 그런데 그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엄청나게 크다. 우주를 포괄한다. 인도의 베단타 철학과 헤겔의 사유는 아주 닮아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베단타 철학에 영향을 받은 칼 융이나 켄 윌버와 같은 이들 또한 헤겔과 커다란 유사성을 갖는다. 이러한 유사성, 곧 근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핵심을 묘사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앎으로 삶을 청소하자."


이 근대주의자들에게 있어 삶이란 '정리되지 않은 먼지덩어리'와 같이 성가신 것이다. 삶에는 청소가 필요하다. 더러운 삶을 깔끔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근대성의 지지자들은 마치 자기 엄마의 모습처럼 요란을 떤다. 삶을 임의로 잘라낸 뒤, 변형시키고, 치장한다. 이 '삶의 미화작업'에 동원되는 도구란 당연히 언어다. 인간의 이성 그 자체의 힘인 언어를 통해 삶의 미지성(未知性)에서 발로한 불결함과 혐오스러움을 제거하거자 하는 것이 곧 근대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실제적 표현은 아주 은근하다. 삶에 대한 단호한 숙청의 형태라기보다는, 이 또한 자기 엄마의 모습처럼, 삶을 불쌍한 것으로 만들어 마치 약한 아이를 따듯하게 돌보듯이 이 미화작업을 펼치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는 뉴스를 우리는 자주 접하곤 한다. 근대성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러한 일을 하게 된다. '다정한 돌봄'의 형태로 삶을 충분히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근대성의 주체들은 대신 '다정한 죽음'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성.의. 본.질.이. 앎.을. 통.해. 삶.을. 죽.이.려.는. 일.이기에 이는 당연하다.


친.절.하.고. 자.상.해.야. 통.제.하.기.도. 쉽.고. 죽.이.기.도. 쉽.다. 그래서 근대성의 주체들은 늘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다. 꼰대가 왜 사람들에게 미소짓는가의 그 이유다. 꼰대는 겉으로는 넉넉하고 인자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삶을 통제하려는 자기의 앎의 권위를 더욱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한다. 근대성의 은밀함만큼이나 꼰대성도 아주 은밀하다.


꼰.대.의. 본.질.은. 분.명.하.게. 가.스.라.이.터.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꼰대가 갖고 있는 또 다른 기원은, 이러한 근대성이 단지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에서만 발현된 것이 아니라, 실은 인류의 거의 모든 역사 속에서 드러나왔다는 점에 있다. 근대성은 단순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비실존적 태도의 총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근세와, 시민혁명 및 산업혁명을 통해 열린 근대를 통으로 묶어 '근대성'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이러한 근대성이 보이는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또 해냈습니다. 인간이 또 해냈습니다. 이성으로 비이성적인 삶의 잔재들을 청소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근대성'은 '인간과잉성'이다. 이것은 인간찬가가 아니다. 인간의 우상화다. 특히 근대에는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청소도구로 채택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우상화되었다. 꼰대는 이 인간의 '자기우상화의 현상'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1960년대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에게도 일어났다. 환각제, 명상, 자연주의, 인도철학, LSD 등의 소재를 통해 이 베이비부머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인간의 변혁을 이루어냈다고 믿었다. 그 승리에 도취되었다. 히피들에게 인간은 '영적 동물'이었다. 영성이 인간의 추악한 삶을 청소해줄 가장 탁월한 도구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인간은 영적으로 자기우상화되었다. 그 뒤로 30년이 지나 이들의 자녀는 창고에서 '정리되지 않은 거칠고 더럽고 땀내나는' 음악을 하는 그런지 세대가 되었다. 그런지 세대는 자기들의 부모 세대를 분명하게 이렇게 불렀다.


"X같은 꼰대들(Fxxking boomer)!"


2022년의 한국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586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당당하게 '꼰대'의 표본이 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야말로 이들에게는 인간의 더러운 삶을 씻어줄 거룩한 도구다. 그래서 정치만 하고 있으면, 또는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은 미화된다. 탈탈탈 세탁기가 돌아간다. 이 한국의 꼰대들은 정치적 자기우상화를 이루었다.


한국의 586 꼰대들이 여전히 자신을 자유로운 정신과, 열린 가슴과,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존재로 생각할지라도, 때문에 꼰대라는 단어를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단어로 여기며 그 체감이 잘 안될지라도, 이들은 꼰대다. 왜냐하면 이들이 정말로 생물학적 연령에 있어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연령이 지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꼰대가 정말로 꼰대로 드러나는 그 핵심적인 조건에 대한 의미다.


꼰대를 유발하는 그 세 번째의 기원이자, 이 모든 꼰대현상에 총체적으로 관여하는 그 결정적인 소재를 이제 말할 때가 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꼰대란 결국 '청소하는 인간'이다. '수행하는 인간'이라고 말해도 좋다. 호모 뭐시기로 부를 법한, 인간종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꼰대현상을 통해 창출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청소를 잘 해야 그것이 인간조건을 달성한다. 곧, 청소를 잘해야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꼰대의 청소란 '버리는 일'이 그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남기는 일'이 핵심이다. 무엇을 남기는가? 바로 '자기 자아'다. 자기 자아와 친밀한 소재들, 자기 자아를 강화시켜주는 관계들, 자기 자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만 자신의 주변에 '더욱 커다랗게' 남기는 일이, 바로 이들이 의미하는 청소다. 그러니 꼰대들은 SNS 활동과 인맥관리에 필사적이다. 그것이 자기 자아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꼰대 플랫폼이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말은 "삶의 쓰레기를 청소한다."라고 하지만, 그 삶 속에 꼰대 자신은 언제나 빠진다. 이처럼 꼰대는 삶과 자기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삶을 넘어서 있는 모종의 작가적 주체와 같은 것으로 입지화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꼰대는 삶이라고 하는 인간 유한성의 근간을 늘 무시하고자 한다. 자신이 먼지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한다.


자신이 삶 위에 선 청소의 집행자로 유능하게 행위하면, 삶이 계속 영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여기에 있다. 통제의 행위가 죽음을 기각하고 삶을 안전하게 지속시킬 것이라는 환상이 여기에 있다.


누가 그러한 믿음과 환상을 열렬히 소비했는가?


바로 꼰대의 엄마다. 꼰대는 꼰대의 엄마로부터 핵심적으로 연유한다. 꼰대의 엄마는 어린 시절의 꼰대에게 반복적으로 말한다.


"빨리 치워.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잘 치워야 어른이야."


꼰대는 엄마가 무서웠다. 자신이 잘 청소하지 않으면 엄마가 돌변한다. 어떤 때는 자신을 세상 끝으로 추방해버릴 것 같은 사악한 악마의 모습으로, 또 어떤 때는 한숨을 내쉬며 금새라도 죽을 것 같은 연약한 병자의 모습으로, 늘 꼰대의 가슴을 사정없이 울렁거리게 한다. 숨이 막히고 긴장이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청소를 잘 하면 된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깔끔하게 정돈하면 긴장은 사라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꼰대에게 '치운다'라는 말과 '해결한다'라는 말은 동의어가 되었다.


꼰.대.는. 해.결.사.다. 꼰대가 왜 잔소리를 많이 하는가? 해결하기 위해서다. 꼰대는 왜 권위를 부리는가? 자기 말을 들으면 해결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의 도처에 산재한 문제들을 잘 해결하는 만큼, 꼰대는 자신이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꼰.대.에.게. 있.어. 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유.능.한. 해.결.사.다.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 결벽주의를 갖게 된 신경증적인 엄마가 어떻게든 삶의 미지성을 통제하기 위해 자기 자식에게 집행했던 그 통제의 방식을 그대로 배워, 꼰대는 동일한 통제의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가한다. 다른 이들을 마치 여리고 불쌍한 자기 자식처럼 보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꼰대는, 이것이 참된 어른의 모습이라고, 자신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꼰대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엄마 말을 잘 들어야 어른이 된다."


꼰대가 하는 모든 꼰대적인 말은 다 자기 엄마의 말이다. 자.기. 엄.마.의. 말.을. 자.기.의. 말.인. 줄. 알.고. 하.는. 것.이. 꼰.대.다. 상담장면에서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상담자에게 훈계를 하고 오히려 상담자를 가르치려드는 내담자들은 어린 시절 자기를 그렇게 혼냈던 자기 엄마의 모습이 되어 상담자에게 동일한 비난을 가한다.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그.것.을. 우.리. 자.신.이. 열.렬.히.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꼰대는 자기 엄마의 결벽주의적 행동원리에 사로잡혀, 그 원리대로 살아야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결과적으로는 영영 어른이 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수행자들이다. 더 정확히는 '삽질러'들이다.


이러한 꼰대의 다른 이름이 바로 '초딩구루'다. 이것은 초딩과 구루라고 하는 서로 다른 성질을 드러내는 단어들의 합성어다. '애어른'과 같은 것이다.


초딩구루는 같은 초딩인데 자기는 초딩이 아닌 척하며, 오히려 초딩의 문제를 '치워주는' 어른 흉내를 내려는 초딩이다. 자신의 이성적 능력과, 영적 지식과, 정치적 성향에 의거해, 초딩구루는 자신이 초딩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들으면 엄청 유치한 이야기를 대단히 심오하고 진보적인 이야기인 것처럼 한다. 표현 그대로, 꼴값을 한다. 초딩구루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유치한 꼴이다.


자기 자신이 제일 미발달된 유치한 모습을 보이면서, 초딩구루는 사람들이 그런 줄 안다. 사람들이 아직 계몽되지 않아서, 마음의 비밀을 알지 못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민도가 낮아서, 자기 자아의 동료들 말고는 다 수준낮게 사는 줄 안다. 그러다가도 또 그 덜 자란 까닭에 심약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마음을 다잡고 그들에게 다가서고자 한다.


이처럼 초딩구루는 세상 누구를 보든 다 자기 엄마의 모습만을 본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 엄마만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애어른인 것이다. 어떠한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쇼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엄마의 푸념을 들어주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엄마는 왜 니 아빠가 엄마랑 이제 섹스를 안하는지 모르겠다며, 엄마가 혹시 여자로서 매력이 없냐며, 초등학생에게 그 심정을 성토한다. 초등학생은 그러한 엄마에게 말한다.


"섹스를 하지 않는 아빠의 마음도 참 온전해요.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할까봐 섹스를 하지 않으려는 그가 얼마나 엄마를 항상 행복하게만 해주고 싶어하는 착한 사람인지를 한번 봐보세요. 또 아빠에게 여전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어하는 엄마의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쁜 마음인지를 한번 봐보세요. 엄마도 참 온전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온전한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저도 참 온전하죠. 우리가 바로, 이러한 인간이에요, 엄마. 부족하지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여기에 있어요, 엄마."


이것이 초딩구루다. 이것이 꼰대의 본질이다.


꼰대는 이 순간 자신이 꼬마 대현자라고 경험한다. 자기보다 한참 큰 어른들의 문제도 자기가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어른보다 더 큰 존재로 스스로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꼰대에게 그 파장이 큰 '영광의 시절'로 기억되며, 그 강렬함 때문에 꼰대의 특유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꼰대의 독특한 인격적 특성이란 바로 권위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다. 꼰대는 분명 권위에 대한 양가적 특성을 갖는다. 꼰대 자신이 부모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된 것처럼 경험했던 그 기억으로 인해, 꼰대는 자기 위의 권위를 무시하게 된다. 어른이 실은 아주 우습게 보인다. 다 유치한 존재들로 보인다. 이것이 꼰대가 자기 자신을 반권위주의적인 저항적 인물로 생각하게끔 되는 이유다.


그러나 동시에 꼰대는 권위를 갈망한다. 자기는 자기의 부모보다 높은 존재인 만큼, 또 일반적인 어른이라고 하는 것보다 높은 위상을 갖는 만큼, 꼰대는 필연적으로 그 이상의 권위를 원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권위있는 존재로 보아주는 일에 꼰대는 늘 목말라 있다. 어떻게든 권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또 얻은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결핍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꼰.대.는. 남.의. 권.위.는. 무.시.하.면.서. 자.기. 권.위.는. 인.정.받.고.자. 하.는. 모.순. 속.에.서. 살.게. 된.다. 남의 권위를 흠집내고, 조롱하며, 공격할 때는 아주 신나고 좋다. 그러나 누가 자기의 권위에 대해 그렇게 하려고 하면 꼰대는 자기 엄마의 모습 같은 극렬한 결벽주의의 태도로 역공을 가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내로남불의 현상은 이에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이, 꼰대가 정말로 꼰대로 드러날 때는, 초딩구루인 애어른이 결국에는 자신도 시간에 떠밀려 실제의 생물학적 어른이 될 때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이. 어.른.의. 권.위.를. 무.시.하.고.자. 쏘.아.댔.던. 화.살.이. 이.제. 정.확.하.게. 어.른.인. 자.신.에.게. 돌.아.온.다. 현재 자신의 적은 과거의 자신이다. 이것은 피터팬의 비극이다.


피터팬은 시간을 무시하며 사는 이의 상징이다. 시간을 무시하면 시간에게 두들겨 맞는다. 시.간.이.란. 것.이. 바.로. 삶.이.다. 그러니 피터팬은 언제나 자신이 먼저 배신한 그 자신의 삶에 의해 배신당하는 것처럼 경험한다.


자신의 이성적 앎, 영성적 앎, 정치적 앎으로, 정말 부단히도 삶을 통제해왔던 그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꼰대가 받는 공격은 전부 다 그 자신이 과거에 사람들에게 했던 그 공격이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해봤자 의미가 없다. 생물학적인 실증으로 지금 '그런 사람'이다. 다시 한 번 피터팬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피터팬은 '나쁜 어른'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 자체'를 적대한다. 어른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자기 밑으로 보며 조롱한 꼬마 대현자인 초딩구루가 똑같은 연령대의 어른이 되어 조롱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꼰대의 유일한 실책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차마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상상력의 부재가 실책이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우습다. 꼰대는,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로. 흐.른.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꼰대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또 '비실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을 다른 말로 '비실존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꼰대는 정말로 비실존적 태도의 총체다. 실존적으로 살지 않으면 누구나 꼰대가 된다.


'근대성'의 통제가 가져온 인간착취와 폭력의 현실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출범된 사조가 바로 실존주의다. '근대성' 그 자체인 '꼰대성'과 '실존'이 반대편에 위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더 쉽게 비유하자면, 꼰대는 어른의 권위에 대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힌 초딩구루로 사는 것이고, 실존은 단순하게 어른으로 사는 것이다. 권위가 어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어른의 조건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여. 사.는. 인.간.이. 어.른.이.다. 곧, 시간을 살아가며,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이가 어른이다. 라너의 표현을 빌려, 어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먼지다."


자신이 이미 먼지다. 청소해야 할 것이 아니다. 치우고, 정리하고, 청산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꼰대가 유한성을 철저하게 오해하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유한성을 "쟤도 착했어."라는 세탁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그도 얼마나 여리고 착하고 온전했는지. ㅠㅠ"라는 갸륵한 눈물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 청소의 의도다. 꼰.대.는. 일.부.러. 오.해.한.다. 자기 엄마가 통제를 위해 일부러 오해했던 그 방식과 같다.


그러나 꼰대가 오해하건 말건, 꼰대는 먼지다. 꼰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표백제를 한가득 넣고 아무리 세탁기를 돌려도, 꼰대는 더럽고, 역겹고, 추하다. 그리고 꼰대와 똑같이 이 우주는 이 더럽고, 역겹고, 추한 먼지로 만들어졌다. 꼰대의 결벽주의의 의지가 아무리 이 우주의 근본을 부정하려고 해도 본인만 힘들 뿐이다. 꼰대에게는 분명 우주가 먼지로 만들어졌다는 이 사실이 코즈믹 호러처럼 경험될 것이다. 꼰대가 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무서워하는 이유다.


이 또한 무서워하건 말건, 라너는 엄격하다. 사실의 경계를 세우는 일은 언제나 엄격해야 할 것이다. 라너는 말을 잇는다.


"이 먼지(dust)를 들어 하나님은 살(flesh)로 만드셨습니다. 먼지에서 모든 것이 나왔고 인간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과거에 먼지였고 미래에 먼지가 될, 지금 살아있는 이 살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그 어떤 분자도 '깨끗한 것'이 없다. 다 더럽고, 역겹고, 추한 먼지다. 그런데 창조주는 이렇게 말한다.


"먼지로 만들어진 살아, 네가 나의 가장 귀한 것이다."


이것을 라너는 '먼지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이와 유사하게, 청소의 달인 신수 대신에 선의 후계자가 된 혜능은 말한다.


"청소하지 마라. 청소할 것이 아닌데 왜 청소하니?"


이것은 다른 것은 다 청소해도, 자기 자신만은 청소할 것이 아니니 분리시켜 남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청소하는 인간'의 결벽주의적 자아론이다. 베단타 철학의 아트만설이다. 혜능선사의 이 말은 오히려 분리를 깨는 말이다. 삼라만상의 그 어떤 것도 청소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 더러운 먼지다. 불순한 것이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청소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 대신에, 더러운 이 모든 것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용서해야 하는가? 초딩구루는 그렇게 유혹한다. 꼰대의 표정이 늘 힘겨운 것은, 자기를 비난하는 것들조차도 십자가를 진 마음으로 어떻게든 다정하게 용서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우상화다.


용서란 무엇인가? 자.신.이. 용.서.할.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이. 용.서.다. 이것이 바로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이 먼지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삶의 해결사가 아니라 먼지임을 정말로 알 때, 우리는 자신이 살을 가진 인간임을 알게 된다. 살로써 삶이 가능해진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먼.지.로. 산.다.는. 것.이.다. 먼지의 특성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가볍다. 자유롭다. 삶의 바람에게 맡길 수 있다. 그러니 봄바람을 타고 꽃향기의 분자가 널리 퍼진다. 먼지로 사는 이가 가는 길에 꽃내음이 가득하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이 향.긋.한. 인.생.이다. 인간의 살내음이 그러할 것이다.


꼰대는 현재를 살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지금이 없다. 왜일까? 이들이 과거의 '영광의 시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꼰.대.는. 과.거.를. 잊.지. 못.해. 지.금.에. 있.지. 못.한.다.


그렇다고 꼰대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영광의 시절'을 만들어준 그 화살들이 미래에 꼰대를 기다리고 있다. 초딩구루가 공격했던 과거의 '그 어른'이 미래의 자기 모습이다. 그러니 꼰대는 미래로도 차마 나아가지 못한다.


현재는 무시하고, 미래는 봉쇄한 채, 과거만을 붙잡고 있는 인간의 전형, 이것이 결국 꼰대다. 과거만 열심히 파고 있다 보면 그 결과로 현재와 미래가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 모습은, 자기 안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무의식 탐험놀이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림자가 어떻니, 아니무스가 어떻니, 철지난 이야기들이나 색시 때 흑백사진처럼 꺼내보며 눈물짓는 엄마의 비극적 낭만이다.


꼰대는 자신을 분명 낭만주의자라고 여긴다. '멋'이 꼰대의 키워드다. 물론 꼰대가 자기를 멋스럽다고 여기는 그 표현은 조금 많이 촌스럽다. 현재에 살고 있지 않은데 촌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에게 촌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꼰대가 동시대적 유행을 소화하기 위해 아주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더욱 촌스럽게 만든다. SNS에서 유행하는 밈을 자기의 언어활용패턴에 접목하려고 연습하며 내일 직원들의 반응을 기대하는 부장님의 미소가 해맑다.


앎으로 삶을, 곧 언어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이 모든 촌스러움을 만든다. 동시대적 언어를 학습해서 활용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현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거울을 보며 자기의 볼살을 만져보자. 그것이 현재다.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우.리.는. 시.간.을. 산.다.


거울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자기라고 인식하며 언어로 만들어낸 자아정체성과, 거울 속에 비친 실제의 몸이 너무나 다르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거울에서 눈을 돌리면서 우리는 현재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분명하게 본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먼지임을.


이.것.이. 나.는. 절.대. 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그. 어.른.의. 모.습.이.었.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청소하고자 했던 그 더럽고 역겨운 인간의 모습을 본다. 보라. 이것이 당신이 매일같이 매타작을 해왔던 그 인간의 모습이다. '청소하는 인간'과 '청소되어야 할 먼지'는 다른 것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살이었다. 아무 죄없이 매맞던 살이었다.


그러면 현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에게는 선명해진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살.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남의 것인 줄 착각하고 살을 폭행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먼지를 치운다는 것은 살을 치운다는 것이다. 살이 치워지면 우리는 죽는다. 더러운 먼지가 없는 곳에 깨끗한 살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곧 살이다.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라, 가.볍.고. 따.듯.한. 것.이다. 삶의 속성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제제를 쓰다듬는 뽀르뚜가의 손길이 그러했을까. 아이들에게 사탕을 건네주는 제제의 손길 또한 그러했을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어른이 된 후, 제제는 알게 된다. 어른의 세계도 아이의 세계와 똑같이 부조리한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이지만, 어른은 그 모순을 깔끔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청소될 수 없는 먼지의 역설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욱 먼지가 된다는 것이며 그만큼 살가워진다는 것이다. 그 눈이 깊다. 이것은 누군가를 용서해주기 위해 한없이 자애로움을 담고 있는 눈이 아니다. 이것은 기.다.릴. 줄. 아.는. 침.묵.의. 눈.이다. 성장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잘할 때까지 참을성 있는 관심으로 지켜보는 엄마의 자상한 눈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리는가?


당.신.을. 기.다.린.다.


눈을 마주보며 한번 같이 웃기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눈이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2006년작 '유레루'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이다. 흔들리던 것들이 전면적으로 접촉되는 그 한순간이다. 그 질감과 온기가 평생이다. 눈맞춤은 살맞춤이다. 이것이 만남의 순간이다.


꼰대는 청소하기에 바빠 고개를 들고 눈을 잘 맞추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살가움이란 다만 자신에게 우호적인 포유류 집단의 애착행위이며 정서표현으로 간주된다. 신경증적이던 엄마에게 꿈꾸던 것이다. 이처럼 애착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꼰대는 동일한 '애착의 폭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한다.


훈련되지 않았음에도 상담자를 자임하는 이들 중에 이러한 꼰대는 많다. 포유류의 왕이 되어 자신이 내담자의 문제를 해소해주고,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함께하는 '살가움'을 전해주기 위해 열심히 애착의 사업을 진행한다. 상담자와 가스라이터는 정말로 한 끗 차이다.


내친 김에 좋은 상담자를 알아보는 법을 말해볼 수 있다. 어떠한 상담자가 좋은 상담자인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지.루.해.하.는. 상.담.자.가. 좋.은. 상.담.자.다. 이것은 진담이다. 애초에 좋은 상담자는 "당당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세요!"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상담소를 찾게 된 내담자의 그 상태, 바로 꼰대의 상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더 강화하려는 일은 하지 않는다.


꼰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지루하다. 상담자는 정확하게 이를 반영한다.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어떠한 꼰대의 언어에 속박되어 그 꼰대의 언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조력한다. 여기에는 언제나 꼰.대.의. 말.을. 따.르.면.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착.각.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표현이 조금 반어적이지만, 상.담.자.는. 내.담.자.를. 죽.이.는. 이.가. 된.다. 죽음을 내담자 앞으로 끌고와, 꼰대의 말보다 실제의 죽음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를 상담하는 과정과도 같다. 가스라이터는 내담자의 생사가 위탁된 신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스라이터의 권위를 해체하는 일은 분명 내담자에게 유사죽음이 된다. 완강한 저항이 일어난다. 이것은 세습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세뇌를 이룬 가스라이터도 또 다른 선배 가스라이터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다. 다른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질 주제이지만, 요는 꼰대라고 하는 초딩구루의 역사는 유구하게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죽음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꼰대가 된다. 꼰대는 자기의 죽음이 두려워, 대신에 남의 문제를 청소해주려는 해결사들이다. 그러는 동안 자기의 죽음은 연기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꼰대는 왜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지금 살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가. 살.지. 않.는. 만.큼.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려.워.진.다. 이것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영광의 시절'을, 그 환상의 '엄마의 젖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한, 우리는 현재를 살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지며, 두려워지는 만큼 더 통제하는 꼰대가 되어간다.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대체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질문과 같다. 실존주의는 근대성을 어떻게 끊어내려 했는가?


실존은 시작으로 돌아갔다. 자.기.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을. 했.다. 여기에서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 본질이라고 상정된 꼰대의 언어를 전부 다 기각하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알고자 한 것이 실존의 운동이다. 이.것.은.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無)로부터의 출발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무는 아니다. 현재가 있다. 현재가 그 출발점이 되어준다.


'영광의 시절'로 우리는 왜 회귀하는가? 현재의 어떤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것 앞에 자기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게 된다. 그러한 현재가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재 자기의 수준에 맞는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하는 일이다. 바로 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모든 것의 전문가인 양 행세하며 꼰대가 된다.


현.재.는. 언.제.나. 자.신.의. 현.재.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자신에게 맞는 기초를 배우라는 말이다. 꼬마 대현자로 잘난 척할 시간에 만화로 된 쉬운 교재라도 보면서 현재의 장면 속에 있는 것들에 응답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이는 전혀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살갑게 배워가는 이다. 모두가 다 그를 도와주고 싶어진다. 그가 바로 '인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인간은 이러한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살아갈 수 있다. 늘 젋게 사는 일이다. 젊다는 것은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청소를 시작한다. 어려운 수학문제집을 붙잡고 있으면 청소가 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수학대천재라는 권위를 포기하고, 산수부터 시작하면 청소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이렇게 정말로 삶을 기초에서부터 즐겁게 살고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시험을 못보는 일이 두렵지 않다. 현재의 시간이 너무나 알찼기 때문이다. 행복한 먼지다. 매일매일 더 살고 싶다고 바라게 된다. 내담자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싶어서, 꼰대의 시간을 끝내고 싶어서, 상담소에 온다.


결.국. 꼰.대.가.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사.실. 권.위.의. 죽.음.인. 셈.이.다. 가스라이팅은 이 '권위의 죽음'을 봉쇄하기 위해 시도되며 또 세습된다. 마치 엄마가 "우리 애가 공부는 못하지만 머리는 참 좋아."라며 부여해준 그 권위를 지속하기 위해 꼰대는 필사적이다. 꼰대는 또 이 권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끌어안고 열심히 무의식을 탐구하며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숙제로 삼을지는 모르는 일이나,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는 먼지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은 먼지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모든 것의 시작의 시작이며 기초의 기초다. 우리는 늘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다시 또 쌓아올릴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시 무너뜨리며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인간적인 것이며, 이것이 살가운 것이다. 인간이 이 먼지인 한, 인간은 불멸이다. 누구도 먼지를 죽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청소불가능한 것, 이것이 바로 온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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