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트레이닝: 강한 인간의 선택"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다. 그것은 강한 인간이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위버멘쉬(Übermensch)를 묘사하는 문장이다. '초극인'이라는 번역어가 자주 채용된다. 위버멘쉬는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고 다시 창조하는 이다. 그러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넘어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초월자다.
자신을 초월한다는 것을 아주 쉽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나는 이는 새로운 인간이다. 그 힘이 약동한다. 그는 강한 인간이다. 이와 같이 강한 인간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즈키 선사는 이러한 말을 한다.
"모든 깨달음에는 눈물이 있다."
아주 큰 눈물이 강한 인간을 태어나게 한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눈.물.이.야.말.로. 초.월.의. 실.증.이.다. 그러나 이 눈물이라는 것은 뜨거운 압력솥의 뚜껑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화가 만든 수증기다. 아직 눈물이 아니다.
우리는 왜 우울한가? 화가 아주 많이 나있어서다. 왜 화가 났는가? 우리가 꿈꾸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세상의 탓인지, 아니면 그 둘 다가 문제인지, 원망할 곳은 많은 것도 같지만 정작 그 원망의 화살이 향할 수 있는 그 어느 방향성도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소망이 좌절된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에게 속은 것뿐이다. 자기 자신이 작가적 주체로서 만들어낸 환상에 스스로 속아 농락당한 것뿐이다. 그러니 이 화는 어쩔 줄 모르고 고이기만 한다. 내적인 압력만 높아진다. 이러한 압력에 치이느라 머리도 멍하고 힘이 나지 않는다. 매사에 무기력하다. 이것이 우울의 상태다.
사우나를 생각해보자. 우울은 무겁고, 갑갑하며, 습하다. 물방울이 맺힌다. 가득하게 고인 화가 조금씩 기화되어 물방울의 형태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폭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우나 안에서 시종일관 버티고 앉아 물방울이나 눈에서 찔끔찔끔 떨구는 이는 강한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약함의 표본이다. 약.한. 이.만. 버.티.려. 한.다. 고집과 집착은 약함의 증명이다. 그렇다면 사우나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인간이 강한 인간인가? 어리석게 사우나 안에서 버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시원하게 냉탕에도 입수하고, 또 휴게실에서 삼각커피우유도 쭉 빨며 여여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그 이가 진정 지혜롭고 강한 인간인가?
세상은 우리가 사우나의 뜨거움과 냉탕의 차가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놀이터와 같다며, 이것이 마음의 비밀이라며, 휴게실 TV 안에서 떠들고 있는 저 강연자가, 강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리려 하는 짜라투스트라인가?
갑자기 번개가 내리쳐 이 모든 것을 산산조각낸다.
남은 것은 폐허다. 목욕탕은 재가 되었다.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갔다.
진짜 짜라투스트라는 지금이 기회라고 외친다. 멍하니 잘 알아듣지 못한 이를 위해 목록도 건넨다.
1) 당신이 우울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는 척하는 것을 살펴보라.
2) 그것은 당신이 이미 잃은 것이다.
3) 당신이 잃은 것은, 당신이 아주 사랑하던 것이다.
4) 그렇다. 당신은 당신의 유일한 사랑을 잃었다. 그것은 진짜로 이제 없다.
5) 당신의 방을 둘러보고, 당신의 활동영역을 둘러봐라.
6) 그것은 정말로 없다.
7) 그것의 빈 자리에 당신만이 계속 홀로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인위적으로 울게 만들 수는 없다. 당신의 웃음만큼이나 울음도 신성하다. 그 둘은 같은 것이다. 당신의 울음은 당신이 소망하던 그 모든 것, 그리고 유일한 것을 정말로 잃었다는 사실을 사실로 이해하게 되는 자리에서 스스로 터져나온다.
당신은 왜 우울했는가? 커다란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상실하지 않은 척해야 했기에 우울했다. 당신은 왜 힘이 들었는가? 당신이 사랑했던 것의 빈 자리를 마치 그것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당신 혼자 메워야 했기에 힘들었다.
번개가 다시 내리쳐, 이 모든 장면을 환히 비춘다. 당신이 먹구름 속에 혼자인 것은, 당신이 혼자 책임져야 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애초 당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번개 앞에 당신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번개 앞에 당신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번개는 그 사실을 비춘다. 당신 앞의 사실을 비춘다.
당신 앞의 그것이 이제 당신의 눈에 빈 자리로 보일 때, 그 부재의 공간에 모습들이 떠오른다. 당신이 잃은 것들이 그 앞에 생생히 떠올라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진다. 실은 당신이 인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사랑했던 것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8) 그동안 당신을 지켜줘서 고마웠다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다고, 다시 태어나도 그럴 거라고, 전하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전해라.
태초의 바다가 우물에서 힘차게 쏟아져 나와, 방황하던 불길을 잡고, 세상을 다 적시며, 그 안에서 당신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다시 태어난 당신은 또 그럴 것이다. 또. 사.랑.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내린 속에서도, 당신은 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소하는 거의 대부분의 심리적 문제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존재를 다루는 실존상담은 이 부분에 특화되어 있다. 그 의도와 방향성이 분명하다. 존.재.는. 부.재.로. 말.미.암.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별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된다. 사랑이 없으니 죽어간다. 우울은 우리가 숨만 붙어 있지 실은 죽어 있다는 징후다.
강한 인간은 다시 살고자 하는 인간이다. 눈물이 언제나 우리를 다시 살린다. 생명은 바다에서 왔다. 우리가 이별하지 않은 척, 그 모든 것이 유지되는 척 기만하고 있는 자신을 초월해, 부재의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럼으로써 펑펑 울 수 있을 때, 우리는 강한 인간이다. 정말로 울 수 있는 인간은, 정말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다. 건강하다. 이해하겠는가? 건.강.한. 것.이. 바.로. 강.한. 것.이.다.
'건강한 인간'은 무의식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해. 생.긴. 잔.재.들.이다. 숲속에 쭈그려 앉아 무너진 폐허의 벽돌조각들을 하나하나 긁어 모은다고 진정한 무엇인가가 회복되는 일은 없다. 보아야 할 것은 벽돌퍼즐 맞추기의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이 사라진 부재의 배경이다. 그럼으로써 회복되는 것은, 폐허 속에서도 그 폐허를 넘어 사랑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면모다.
사랑은 원래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부재를 사랑할 때, 사랑은 사랑의 원래 온전한 크기로 살아난다. 온전한 사랑은 무슨 일을 하는가? 사랑은 통제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이게 한다. 사라진 것을 사라진 것으로 놓아둔다. 그래야 그것은 살아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돌이켜서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이미 살았던 것이고, 잘 살았던 것이다. 그.것.을. 잘. 살.았.기.에. 그.것.과. 이.별.하.게. 된. 것.이.다.
이별하지 못하는 이들은 늘 같은 것을 반복한다. 이들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성장과 발전이다. 언제나 자신이 과거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며, 과거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며 이들은 곧잘 말하곤 한다. 이러한 것이 불건강한 모습이다. '건강한 인간'은 성장하고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러한 불건강한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다. 즉, 과.거.의. 자.신.과. 이.별.할. 수. 있.는. 존.재.다.
달라지는 것과 이별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달라진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려면, 과거의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계속 변별해나가야 한다. 그러니 실은 달라지려 하는 만큼 우리는 과거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별한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그냥 끊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미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미 현재는 과거의 자신을 구성하던 그 조건이 아니다. 이미 그러한 자신이 없다. 작별인사만 못했을 뿐이지, 이미 남이다.
실존상담을 일부러 악의적으로 오해하려는 이들은, 실존상담이 마치 따듯한 인간관계를 억지로 단절시키는 냉혹한 베니스의 상담자들의 접근인 양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기만이다. 기만은 언제나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구는 일이다. 실존상담은 사람들을 이별시키는 접근이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이루어져 있는 이별을 통해 그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접근이다. 기만자들에게는 이것이 싫다.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하지 못해야만, 자신이 그들을 자상하게 돌보며 상냥한 부모놀이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심리학적 건강이 '관계를 잘 하는 법'이 아니라 '이별을 잘 하는 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아주 유익하다. 우리가 불건강할 때 우리는 관계를 잘 하고자 한다. 우리가 건강할 때 우리는 이별을 잘 함으로써 사랑도 잘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건강하게 살고 싶은가, 건강하게 살고 싶은가? 이것은 선택이다. 이 선택은 또 이러하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고 싶은가, 강한 인간이고 싶은가?
당신의 눈물이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