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심리학, 대안상담, 반언어주의"
실존상담의 성립은 당신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그 사실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당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만 실존상담의 모든 이론 및 실제의 활동은 구성될 수 있다. 당신이 없으면 시도될 수조차 없는 것이 실존상담이다.
당신의 정직성을 요청해보자.
당신이 만약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면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행복한데 심리학 내지 심리상담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은. 살.지. 못.한. 삶.의. 찌.꺼.기.다. 그렇다고 그 찌꺼기를 모아서 세탁기에 돌린 뒤 햇볕에 잘 말린다고 당신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소설쓰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잠을 자는 최소의 시간 외에는 소설을 쓰는 일에만 자신의 시간을 다 쏟고 있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방안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고, 몇 년째 빨지 않은 이불은 곰팡내가 가득하며, 그의 몸에서 떨어진 생물학적 찌꺼기들은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할 수 있다.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을 왜 쓰는가? 삶이 그에게 시켰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가 그러한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운명과 자유는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두 표현이다. 이렇게 삶을 사는 이는 행복하다. 삶과 일치하여 자유롭기 때문이다.
운명을 따르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이는 그러면 무엇을 하는가? 마.음.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살 수도 있었는데 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가능성 같은 것을 끌어와, 성찰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아직도 그 가능성을 실현할 여지가 남아 있는지를 점검하고, 분석하고, 통합하려 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활동을 '심리학적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소위 '심리학적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하는 이것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줄기차게 거부하고자 하는 목적에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러한 것을 심리학이라고 정의한다면, 실존심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탈심리학'이다. 우.리.는. 마.음.이. 아.니.라. 삶.을. 말.한.다.
삶은 우리에게 따를 것을 요청한다. 따르지 않으려고 우리가 만든 것이 '주체'라는 개념이다. 주체의 다른 이름은 '자아정체성'이다. 자아정체성의 가장 은밀한 권위자적 형태는 '메타인지'다. 보통 '참나'라고 부르는 작가적 주체의 개념이다.
이것은 삶을 따르는 대신에, 자신이 마음을 만들어낸 뒤 그 마음을 통솔하는 입장에 선다. 이러한 그림을 떠올려봐도 좋다. 자기가 교수보다 잘났다고 설치다가 그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대학교 생활에 실패한 이가, 유치원을 차린 뒤 유치원생들 앞에서 대장놀이를 하는 그림이 있다. 이처럼 삶에서 좌절한 이가 '삶의 열화된 모방품'인 마음을 만든 뒤 자신이 마음의 대장이 되고자 한다.
삶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 방식으로 기만된다. 기만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잘 알면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럴리가 없다. 유치원생들 앞에서 아무리 노련하게 대장놀이를 잘 한다고, 그가 대학교 생활에 적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미 자신의 인생을 잘 살고 있는 이들은, 기만자들이 자기만 가진 특별한 자격 및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메타인지니 하는 것들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상태다. 대학생들에게 구구단을 9단까지 다 외우는 일이 유난스러워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과 같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쉽게 말해보자. 사.회.부.적.응.자.들.이. 마.음.의. 마.법.사.처.럼. 보.이.기.를. 꿈.꾼.다. 그러니까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가장 실패한 이들이, 인생을 마음으로 대체한 뒤, 자기가 인생 사는 일의 달인인 것처럼 스스로를 입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끌려 찾아오는 이들 또한 자신의 인생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들이다. 이들도 인생을 마음으로 대체하고 싶어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이라는 것을 요리조리 잘 요리하면 인생 또한 잘 풀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공동체'를 형성한다.
이것이 주술이다. 이를테면 번개가 무서운 이가 찰흙으로 작은 번개 모양을 만든 뒤, 그 장식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성난 아이를 대하듯 말을 걸어주면, 이제 현실에서의 번개가 자기에게 통제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술.적. 논.법.에. 따.라. 마.음.이.라.는. 것.을. 다.루.는. 방.식.이다. 심리학이 이러한 주술의 논리에 봉사하는 소재가 되어 있다면, 실존심리학은 더욱더 심리학이 아니다. 탈탈탈 찌꺼기를 털어내는 탈곡기의 심리학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윌리엄 제임스를 말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마법사'가 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을 그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마법사들은 이론적 축적뿐만 아니라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도 지지받는다. 그들이 권위를 확보하게 되는 데는, 크든 작든 간에 소위 '신비체험'이라고 하는 경험의 여부가 기능한다. 제임스의 명민함은 이 신비체험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데에 있다. 신비체험은 어떠한 이들에게 생겨나는가?
정.신.이. 분.열.된. 이.들.이.다.
오늘날 DSM-V와 같은 진단체계에서 다양한 신비체험의 양상들이 다 이상심리학적 증상으로 진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투박한 환원론적 과학'의 폭력이 절대 아니다. 높디 높은 영적 세계를 아직까지 이해 못하며, 오직 유물론적 시각으로만 무식하게 행위하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은, 70년 전의 융 같은 사람이나 가질 법한 생각이다. 물론 실제의 융도 정신분열이었다.
"신비체험은 정신분열이 낳는다." 제임스는 여기에서부터 정직하게 출발하자고 말한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 정신분열에서 비롯한 신비체험이 개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 어떠한 효용을 지닐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신비체험이 타인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가? 즉, 신비체험은 개인을 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주는가? 여기에 대해 제임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정신분열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일 수가 없다. 그래서 제임스는 신비체험을 한 많은 이들이 오히려 더욱 정신분열을 악화시키는, 그리고 그 상태에서 더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 고집스러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도 말한다. 정신분열을 야기한 자아의 과대망상이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게 되는 신비체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분명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제임스는 고통의 문제와 신비체험을 연결짓는다. 자아정체성의 고집으로 인해 누적되는 커다란 고통이 신비체험을 촉발하는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긴장과 이완의 문제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긴장이 커질 때, 자연스럽게 신비체험이 생겨남으로써 그 긴장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자기의 모습을 영웅으로 꿈꾸며 무거운 양동이를 계속 들고 있던 이가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는 결코 양동이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영웅은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무거움의 고통과 근육의 긴장으로 인해 그가 '정신이 조금 나갔을' 때, 어느덧 양동이가 바닥에 내려놓아져 있음을 그는 이내 목격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마치 용서받은 것만 같다. 해방된 것 같다. 평온한 이완감이 전신에 몰려온다. 우주가 그를 사랑해주고 있는 것처럼 경험된다. 영웅이 될 시련을 다 이겨낸 끝에 비로소 그는 영웅의 자격을 인정받고 당당하게 천국에 입장한 것 같다.
우리는 그 밖에서 이러한 이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양동이를 들고 한 시간 동안 아이언맨처럼 버티던 초등학생 하나가 슬그머니 양동이를 자신의 옆에 내려놓는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근엄한 채다. 그러다가 초등학생이 눈을 뜨고는 놀라운 광경인 것처럼 그 양동이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다 가졌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쥔다. 몸을 부르르 떤다.
복도에서 혼자 이러한 쇼를 하고 있던 이 초등학생은 무엇인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인가? 양동이의 사건 전후로 그에게 모종의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인가? 그는 영적으로 차원이 높아졌는가? 그는 탁월한 마음의 마법사가 되었는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양동이를 통한 긴장과 이완의 연쇄적 경험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똑같은 초등학생이며, 똑같은 과대망상증이다.
그러나 이 초등학생은 이제 다음날 학급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한 놀라운 체험을 종교적으로 또는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한 소설을 쓴다. 어제 자신이 특별한 영웅으로 하늘에 계신 토니 아저씨로부터 인정받았음을 감격에 차 눈웃음을 지으며 고백한다. 방과 후 복도에 줄지어 앉은 양동이의 행렬도 이제 생겨날 것이며, 학교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의 한숨도 깊어질 것이다.
신.비.체.험.은. 자.아.가. 스.스.로. 만.든. 고.통.의. 감.옥.을. 견.디.다. 못.한. 우.리.의. 몸.이. 스.스.로. 이.완.된. 현.상.이.다. 새로운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바보짓을 그만 둔 것뿐이다. 자아에게 영광이 돌려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신비체험은 다만 자아의 바보짓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드러내줄 뿐이다. 이렇게 잠시 자아가 기각됨으로써 우리에게는 분명 기회가 생겨난다.
과.거.에. 했.던. 자.아.의. 방.식.으.로. 동.일.한. 것.을. 하.지. 않.을. 기.회.다. 그리고 동시에 자아가 삶을 따르지 않기 위해 완강히 저항하던 그 고집에서 벗어나, 우.리.가. 삶.을. 따.를. 기.회.다.
이렇게 신비체험을 활용하게 되면, 우리는 신비체험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그러니 필연적으로 정신분열에서도 벗어나, 이제 삶을 향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아니라 삶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신.비.체.험.의. 유.일.한. 의.의.는. 탈.신.비.체.험.에. 있.다. '신비'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으면 '심리'라고 또는 '마음'이라고 바꾸어 이해해도 좋다. 심리체험은 탈심리체험이 될 때만, 또 마음체험은 탈마음체험이 될 때만 의미있다.
마.음.은. 마.음.에.서. 벗.어.나.라.고. 작.동.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모든 심리학은 그래서 탈심리학일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의 원리 및 구조 등을 복잡하게 말하며 그것들을 개인이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의도를 취하는 접근들은 사실 심리학이 아니라 오컬트이며 주술이다.
'깨달음' 등과 같이 신비체험을 묘사하는 용어가 무협지 등에서 아주 곡해되어 있기에, 오컬트의 추종자들은 작게라도 신비체험을 하면 그만큼 자신이 특별한 능력과 위상을 얻게 되는 것처럼 간주한다. 무협지 초딩의 망상이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있다가 신비체험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어떠한 특성을 가진 이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은 무고하고 억울하며, 오히려 피해자인 상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이들이 마치 미리엘 주교에게 용서받은 장발장과 같은 신비체험을 한순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어디에 쓰이는가? 자신의 순수한 무오함을 우주가 알아준 것 같은 증거로 쓰인다.
때문에 이러한 이들은 이후 더 당당하게 자기 자아가 원래 하던 일들을 한다. 왜? 우주가 자신이 올바르다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며 마치 신적 엄마와 같은 존재가 자기를 지지해주는 것만 같다. 그렇게 이들은 양동이를 더 힘차게 들며,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양동이 사업을 펼치는 데 더 거침이 없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왜 길게 서술하고 있을까? 바로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이 신비체험으로 지지된 '자아사업'의 영토가 '상담'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담이라면, 실존상담은 상담이 아니다. 실존상담은 '대안상담'이다.
대안상담은 크든 적든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는 이들이, 그 정신적 문제를 자기의 자아정체성을 강화하는 체험으로 쓰이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체험에서 벗어나 삶.으.로. 복.귀.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자들은 명쾌하게 말한다. 삶.은. 당.신.이.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은하함대의 중심에 앉아 있는 천재 책략가 대장으로 삶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응답이 아니다. 주체의 지시다. 차라리 뉴에이지 영성서적인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나오는 내용이 더 정확하다. 응답은, 생존을 넘어 삶이 시키는 것을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감각인데, 삶이 시키는 것을 하면,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임을 금방 알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삶이 책임진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삶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방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삶에 응답하며 사는 이는 세상에 좋은 것들을 창조해낸다. 그러니 세상의 필요가 된다. 자연스레 생존은 담보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아의 고집'을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 내지 '마음의 소망' 등으로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늘 생존과 삶의 실현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분열시켜 놓고, 그 분열을 통합하기 위해 힘쓴다. 그 과정 속에 신비체험도 또 생겨날 것이다. 자아가 늘 승리할 것이고, 분열은 영속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주체'의 문제다.
한국의 문화적 토양은 이 주체에 잠식되어 있다. 언어습관을 살펴보자. 우리말에는 원래 수동태 표현이 없다며 어떻게는 문장을 능동형으로 바꾸어 묘사하도록 우리에게는 요청되어 왔다.
그러나 수동성은 삶에 응답하는 태도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우리에게는 수동성이 필요하며, 오히려 증진되어야 할 유일한 감각이 있다면 바로 이 수동성이다.
수동성으로 오해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황희정승이나 종가집 큰마님처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주체'의 모습이 보이는 특성이다. 다가오는 모든 사건을 자신에게 다 수렴시킨 다음에, 이들은 자신이 최후의 결정권자로 행위한다. 수동성을 위장한 방식으로 이들은 가장 높은 권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수동성은 이 반대에 있다. 수동성은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나 잘났어요."를 떠벌리는 일을 그만 하는 것이다. '잘난 주체' 내지 '잘난 자아정체성'을 기각하는 일이 수동성의 의미다.
누가 주체적 언어습관을 권장하는가? 노예들이다. 노예들이 늘 자기가 수동적으로 부려져야 했던 상황을 고통으로 경험함으로써, 양반족보를 산 후에는 이제 누구보다도 능동자로 보이려 한다. 권위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 노예근성에 종속된 이들이다. 노예가 아닌 이들은 시도때도 없이 자기의 잘난 능동자적 권위를 짹짹이처럼 떠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주인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주인과 노예라는 이분법으로 보고 있는 것은 오직 노예일 뿐이다. 우리는 수동적 노예에서 능동적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노예가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할 뿐이다.
노예가 아닌 인간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가장 명료한 정의를 내려보자. 노예가 아닌 인간이란 '남을 위한 몸'이 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사는 인간이다. 이보다 더 명료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남.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사.는. 인.간. 그리고 이러한 삶은 수동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능동적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다. 결국 남을 위한 삶이다. 양반처럼 보여야 하고, 마음의 마법사처럼 보여야 하며, 권위있는 주인처럼 보여야 한다. 언.어.라.는. 것.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 조.형.된.다.
수동성은 이 '언어로부터의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언어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반언어주의'라고 말해볼 수 있다. 탈심리학과 대안상담은 반언어주의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왜일까?
정.직.한. 당.신.의. 삶.이. 바.로. 반.언.어.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절대로 언어에 담길 수 없다. 윌리엄 제임스가 아주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당신의 삶은 언어로 결코 표현될 수 없으며, 그저 당신이라는 존재의 향기로만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이 무슨 경험들을 해왔는지 그 경험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하지 마라. 소설로 쓰지 마라. 랩으로 만들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지 마라. 현재 당신의 존재가 다 말해준다. 당신이 당신의 체험을 자아사업에 봉사시켜 왔는지, 아니면 삶에 응답하는 일에 써왔는지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이 당신이 숨길 수 없는 당신 삶의 정직성이라는 것이다.
삶이 당신에게 '보여지고' '되어지고' '행해지는' 그 모든 수동성 속에서만 당신은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 설령 자잘한 찌꺼기가 있다 해도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게 당신의 시간을 후회없이 누릴 수 있다.
삶은 사건들의 연쇄로 우리에게 경험된다. 삶이 이미 능동적이다. 그러니 당신은 수동적이면 된다. '수동적'이라는 이 말이 왠지 무력하게 경험된다면 이 표현을 첨가해보자. 자.발.적.으.로. 당신은 삶에 자발적으로 수동적이면 된다. 스스로 산다는 것은 '능동성'이 아니라 이 '자발성'을 말하는 것이다.
"오 삶이 이러한 장면에 응답하라고 하는구나. 오케이. 내가 하고 싶은 거였어."
삶의 신비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삶이 장면으로 펼쳐낸다는 데에 있다. '기투' '참여' '뛰어듬' '결단' '내던짐' 등과 같은 실존주의의 표현들은 이러한 신뢰 속에서 작동하는 것들이다.
수영하고 싶어하던 사람을 삶이 물가로 이끌어갔는데 그 앞에서 "아하! 이 두려워하는 마음도 온전하구나! 약해서 두려웠던 거야. ㅜㅜ 잘못이 아니었어. 괜찮아, 나야. 니 잘못이 아니야. 너는 온전했던 거야. ㅜㅜ 물에 뛰어들지 않아도 괜찮아. 너에게는 물에 들어가지 않을 자유도 있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물에 들어가지 못한 네 자신을 상냥하게 용서해주렴. ㅜㅜ"라고 하는 일은 조금 많이 이상하지 않은가?
'알려지는 자'인 '마음'과, '알아주는 자'인 '주체'로 분열된 이 구도는 분명하게 '능동적 주체'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다.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는 주체의 힘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자.아.이.니.까.
자아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아는 언제나 '이상적 자아'이기에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통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연출력'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쇼맨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쇼맨으로 작동한다. 한동안 쇼의 시대가 지속되어 온 것은 자아의 세력들에게는 행운이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쇼에 아주 많이 지쳐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게 보이려는 쇼를 할 시간에, 왜 그것을 실제로 하지 않을까? 이것은 모든 상담자가 품고 있는 질문이다. 그런 사람으로 보이려는 일을 그만 하고, 그런 사람이 되어보는 일이 더 좋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되려면 그런 삶을 살면 된다. 그런 삶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삶이 알아서 이루어준다. 그러나 왜 이것이 힘든지도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찌꺼기가 많다. 그리고 그 찌꺼기들을 우리는 재산으로 여긴다. 찌꺼기들을 세탁하며 잘 관리하는 시간에 모든 여력을 다 쏟는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은 가용할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찌꺼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이러한 책을 쓴다. 당신의 인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은 정직한 것이다. 탈심리학과, 대안상담과, 반언어주의는 오직 당신의 행복에만 기초해서 구성한 표현들이다.
왜 상담자는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이것은 상담자가 자신의 삶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어떻게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종교의 기원이 된 이 질문이 상담자들에게는 늘 실시간으로 물어진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안된 방식이 더 큰 고통을 만들어내는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상담자들은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질문은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언어주의의 언어다. '산울림'의 김창완 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우리가 답을 구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라,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그러니 당신에게, 또 모든 상담자에게 함께 청해본다.
우리의 앞에 다가와 있는 삶에 마음의 답을 내리지 말고, 한번 물어봐주었으면 좋겠다. 왜 왔냐고,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싶냐고, 또 네가 이토록 아끼며 간곡히 청하는 나는 누구냐고. 그리고 침묵 속에서 수동태가 되어보자. 이것은 가장 세련된 응답의 방식이며, 등불의 빛처럼 환히 번져갈 삶의 기쁨이다. 행복은 머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