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30

"기억력이 좋아 고통받는 인간의 전모"

by 깨닫는마음씨



기억은 인간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 같다. 기억력이 좋아 인간은 지금과 같은 위상을 얻을 수 있었다. 문명의 발전이란 기억에 의거해 이루어진 것과 같다. 인류사에서 하나의 좌절이 '실패'가 아닌 '시행착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은 더욱더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켜왔다. 음성언어의 구전으로부터 문자언어의 축적 및 보급으로, 나아가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실시간적 공유로 인하여, 인간은 기억의 열화를 최대한 방지하는 동시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장치들을 개발해왔다. 문명의 핵심은 분명 이 '기억장치'다.


이 기억의 효능에 입각해 문자언어의 가치를 예찬하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가진 힘의 정수는 바로 글로부터 나온다며, 글의 영원성을 칭송하고, 나아가 그 영원성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면모에 감격하는 작가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그러하다. 물론 사실이 아닌 이야기다.


기억의 핵심은 글이 아니라 이미지다. 그림이다. 오히려 기억은 영화적인 것이다. 꿈을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3.인.칭.으.로. 꿈.을. 꾼.다. 자신이 1인칭의 시점에서 경험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의 영역에 담겨 꿈으로 재생될 때면 언제나 3인칭화가 된다. 즉, 우리는 마치 영화를 보듯이 꿈을 경험한다.


여기에 '자각몽(lucid dream)'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 상황은 더 흥미로워진다. 자.각.몽.의. 구.조.는. 아.주. 쉽.게. 게.임.과. 같.다. 3인칭이지만 꿈속 사건의 체감이 1인칭의 주동성을 갖는다. 오늘날 영화의 적이 게임이라는 점은 공공연하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만화, 웹툰, 에니메이션 등 모든 미디어 산업의 가장 큰 경쟁자는 게임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억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그대로 시사한다. 인.간.은. 기.억.을. 게.임.화.하.고. 있.다.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것이다. 게.임.은. 기.억.을. 유.희.재.로. 삼.는. 놀.이.방.식.이.다.


무의식을 중요하게 다루는 정신역동적 접근들이 그 과학적 오류와 무근거성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심리상담의 대세가 되어 있는 현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기억의 창고'다. 비유하자면 게임 소프트웨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초대형 게입샵과 같다. 게다가 대여료는 무상이다. 몸 대신에 '마음품'만 조금 팔면 된다.


그러니 이와 같은 류의 심리상담을 찾는 이들은 사실 어떠한 삶의 문제를 정직하게 탐구하고 싶다기보다는, 무의식을 신기한 게임처럼 즐기고 싶어서 상담소를 찾는다. 꿈분석, 과거퇴행, 전생체험, 주산기경험, 집단무의식의 원형 등이 다 이러한 소재들이다. 최면은 더 노골적이다. 최면은 아예 카우치 위에 차려 놓은 '마음게임'의 테마파크다. 최면가라는 '게임고수'로 상정된 이가 태워주는 '버스'를 타고, 피험자는 가상의 게임세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치유효과? 진심으로 게임에는 분명 치유효과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동물의 숲'이나 '마인크래프트'가 최면보다는 더 그러한 효과가 있다. 심지어는 '슈퍼마리오 1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리듬을 타고 절묘한 점프를 연쇄함으로써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농락하며 순식간에 스테이지를 깨는 그 쾌감은 엄청나게 치유적이다. 나아가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를 사는 것이 최면을 받으러 다니는 것보다 비용도 훨씬 절감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상담자라면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이 감각에 대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상담자가 자신의 상담방법론을 게임처럼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게.임.이. 아.닌. 것.이. 상.담.이. 위.치.할. 자.리.다. 게임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삶'이다. 기억장치를 신앙하는 이들은 이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시기별로 대세이던 '기억장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묘사들을 해왔다.


"삶은 이야기다."

"삶은 소설이다."

"삶은 쇼다."

"삶은 영화다."

"삶은 게임이다."


다 틀린 말들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삶은 기억장치다."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렇지 않다. 소설과 쇼와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렇게 말해볼 수는 있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그.것.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것을 표현할 언어가 있다고 그러한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착각이다. 심지어 삶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고 쓰지만, 우리는 사실 여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조금은 안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인간도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삶.을. 안.다.는. 말.은. 죽.음.을. 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표현해보자.


"죽음은 이야기다."

"죽음은 소설이다."

"죽음은 쇼다."

"죽음은 영화다."

"죽음은 게임이다."


딱 봐도 정신나간 이야기들로 보이지 않는가? 삶이 이야기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언제나 궁금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의 희망사항이 사실은 아니다. 삶이 이야기였다면, 게임처럼 삶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었을텐데 유감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앎'의 의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표현 그대로 우리가 아는 것이다. '기억장치'는 '앎의 장치'다. 다양한 기억장치들을 통해 인간이 앎을 증폭시킬 수 있었기에, 우리는 과거의 왕들이 부럽지 않게 크나큰 혜택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다시 말해도 최고의 일이다. 인간에게 감사하며, 인간이어서 감사한다. 그러나 문제는 생겨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다.고. 고.집.부.리.고.자. 할. 때. 출.현.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기억장치에 대한 과신이다. 기억장치의 우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고.집.이. 언.제.나. 고.통.을. 낳.는.다. 붓다의 말이다. "우리가 대체 삶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이것은 실존주의자들의 말이다. 우리가 삶을 이야기로, 소설로, 쇼로, 영화로, 게임으로 착각하며, 그것을 안다고, 자기가 남 못지 않은 그것의 전문가라고 고집을 부릴 때, 우리는 고통받는다.


대표적으로 실존상담은 이 자리에서 기능한다. 실존상담은 삶을 '모르는 것'의 자리로 되돌리고자 한다. 삶이 우리에게 다시 미지(未知)가 되었을 때 발견되는 것이 혹시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이 바로 '자유'다. 그리고 자.유.는. 고.통.의. 유.일.한. 치.유.책.이다.


이를 더 쉽게 말해보자. 기억장치에 대한 우리의 맹신이 우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왜 맹신하는가? 기억장치가 아주 유능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고.통.받.는.다.


우리의 좋은 기억력은 아주 많은 경우 우리에게 감옥이 된다. 실증적인 예가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무나 멋진 이가 우리의 앞을 지나간다. 턱하고 숨이 막히며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지금 말을 걸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말을 걸지 않는다. 왜인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은 기억을 통해 만들어졌다. 뛰는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기억의 스프링쿨러가 뿌려진다. 자신은 이성에게 굳이 관심이 없는 착실한 심리학자다. 융의 뒤를 이어 신비한 고대의 지혜를 파악하는 연금술의 연구만이 자신이 전념할 인생의 과제다. 자신은 그것만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신성한 기억'이 그를 정신차리게 한다. "어쿠, 내가 누구인지 잠깐 까먹을 뻔 했구나!" 아마도 왜곡된 그의 과거의 경험 중 하나가 올라와 잠시 그를 자극했나보다. 그는 여여하게 미소지으며, 그 일그러진 마음을 평화롭게 또 고요히 띄워보낸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 이의 뒤편으로 우아한 작별인사를 고한다. '오늘도 큰 공부 했구나. 좋은 마음을 만났다.' 이처럼 또 한 번의 '마음게임'에서 승리한 그 자신이 내심 대견하다.


차.라.리. 기.억.상.실.증.이.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우리는 삶이 이끈 기적의 한 장면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입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지만,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 바.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삶에 대한 기억상실증은 언제나 권장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2008)'와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듯이, 삶에 대한 기억상실증은 개인으로 하여금 삶을 다시 찾게 해주는 기회가 된다. 처음으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온당하다. 삶은 원래 우리 각자에게 있어 다 처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나무위키나 전문가리뷰를 먼저 찾아 읽고 영화관에 가며, 게임을 하기 전에 메뉴얼을 숙지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영화나 게임을 즐기는 그들만의 유희방식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삶은 애초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SNS 전문가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삶? 마음의 메뉴얼에 따라 실천하는 삶? 이런 것도 정말로 삶인가?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고집은 대체 왜 생겨나는가?


우리는 이제 기.억.장.치. 중. 최.고.의. 기.억.장.치.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최고의 기억장치, 그것은 바로 '관계'다. 두둥, 효과음을 넣어보자.


블록체인, 비트코인, NFT,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 SNS 등의, 오늘날의 시대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소재들의 함의를 살펴보자.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너를 기억할 거야."


관계라고 하는 기억장치가 아예 구조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러니 이 현실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장치의 권역에서 소외되지 않고자 각종 SNS에 가입을 해 매일같이 '좋아요' 순례를 다닌다. 기억장치의 신(神)을 위한 참배의식이다.


"기억되지 못한 것은 죽은 것과 같다."


여기에는 분명 이 착각이 어마어마하게 작동한다. 특히 관계라고 하는 기억장치가 신적인 위상으로까지 승격해있는 까닭에, 이 착각으로 인한 두려움은 더욱 심대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모두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명확하다. 여기에도 실증적인 예가 있다. 우리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자꾸만 옛날 이야기를 꺼내 "너 그때 그랬잖아."라며 비난의 소재로 삼는 부모님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죽을 맛인가. 사실적으로 우리의 모습이 지금 그러하지 않으며,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고정된 정체성으로 우리 자신이 평가받는 일은 그야말로 우리를 속박하는 감옥으로 경험된다.


관.계.라.고. 하.는. 기.억.장.치.는. 개.인.의. 정.체.성.을. 고.착.시.킨.다. 이것이 관계가 가진 최악의 역기능이다. 관계는 구조이며, 구조는 그 구조로부터 개인이 벗어나는 현실을 아주 싫어한다. 그러면 구조의 힘이 유지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구조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그 안에 붙잡아두려고 획책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구조가 너희에게 자유를 보장해줄 거야."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권위를 독점하고 싶은 이가, 자기의 울타리 안에서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다 허용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다. 답은 이미 다 정해놓았으면서 마치 자유로운 선택지가 아이에게 있는 것처럼, 또 아이가 주체적으로 그 선택지를 택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부모나 선생의 은밀한 전략이 이러하다. 그들은 지금 허.용.하.는.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의 발명품인 자아가 늘 시도하는 가장 더럽고 기만적인 술책이다.


자.아.는. 기.억.을. 먹.고. 산.다. 편집은 기억을 먹기 좋게 언어로 요리하는 일이다. 자아는 요리된 기억을 섭식함으로써 비대해진다. 때문에 관계를 위시한 모든 기억장치는 자아에게 있어서는 젖줄과 같은 것이다. 자아의 비만한 생육을 위해 기억장치가 끝없이 재료를 공급하고 언어가 그 재료를 유능하게 요리해낸다. 돼지들의 역사다. 여기에서의 '돼지'라는 표현은 착하고 똑똑하며 귀엽기까지 한 네발 포유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으로 위장이 비틀어진 섭식중독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욕심도 온전한 거예요. 그가 얼마나 약했으면 욕심을 부렸을까요. ㅠㅠ" 그만 좀 꿀꿀거려라. 정말로 약한 이는 섭식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생리다. 우리가 약하고 아플 때 음식이 들어가던가? 우리가 진짜로 약해서 힘들 때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한다. 오히려 기억을 잊으려 한다. 백지 상태로 돌아가 다만 쉬고 싶을 뿐이다.


자아의 섭식중독의 상태는 '약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악이라는 것이 있다. 악한 이들의 표어는 "나는 온전하다."이다. 자아는 자꾸 자기가 온전하다고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온전하든 말든 간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악의 정의는 분명하다.


'삶을 억압하는 것.'


억압의 최고봉은 앞서 말한 것처럼, 허용하는 방식으로 지배하는 일이다. 이것이 최고의 악이다. 이 최고의 악을 집행하는 이들은 결코 무식하게 타인을 위력으로 제압하거나 하지 않는다. 친근한 눈웃음과, 예의바른 태도와, 경청하는 몸짓으로 지배를 행한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온전한 마음을 자신이 귀하게 듣겠다며, 외로운 사람들을 불러 청한다.


"우리가 너를 기억할 거야."


바로 이 실천이다. 오늘날은 프로이트의 시대처럼, 기.억.이. 억.압.을. 해.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기.억.이. 억.압.한.다.


이 시대에 '기억'이라는 양날의 검은 우리 자신을 향한 면이 더욱 위협적으로 날이 서있다.


'기억하다.'라는 뜻의 영단어인 'remember'를 살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re + member'다. 간신히 빠져나온 곳으로 고무줄처럼 다시 당겨져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늪과 같다. 정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기억을 잊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reset'이 필요하다. 다시 새롭게 판을 갖추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을 '창조적 기억상실증'이라고 불러보자. 인간은 원래 이것이 가능한 존재다. 선(禪)의 핵심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처.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실존상담의 실천적 기제인 현상학도 이 일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삶에 대해 가진 것은 선입견과 편견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다. 그 다음은, 우리는 정말로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억.은. 과.거.의. 마.음.이.다. 우리는 기억력이 좋아 '과거의 마음'을 현재로 끌고 와서 그것이 현재의 것인 양 계속 작동시킨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의 마음은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억압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강연장 등을 찾아 다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강연 도중부터 늘 화가 나있다. 그러다가 그는 답을 발견한다. 강사가 권위있는 존재로 보이려는 마음으로 화내며 강연을 했기에, 자신도 그 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라는 식의 답이다. 화는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강사의 것이다. 자신은 온전하다. 그는 이 답에 만족해한다. 오히려 화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강사의 화를 자신이 대신 이해해주었다는 극적인 상황에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답은 틀렸다. 그것은 강사의 화가 아니라, 그의 화다.


그는 해당 분야에서 자신이 강사보다 더 권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보다 권위도 없는 강사가 성대하게 강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그가 모든 강연장에서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어떤 강사들보다도 자신이 더 진정한 권위자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이처럼 권위에 목을 매게 되는가? 과거의 마음에 지배되어 있는 까닭이다. 과거에 자신이 권위를 행사하던 이들에게 그 권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이가, 그 자신의 유능한 기억력으로 인해 언제나 그 장면을 모든 장면 속에 실시간으로 겹쳐낸다. 그럼으로써 세상 모든 것이 자기의 권위를 위협하는 잠정적인 적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그는 권위를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하는 데 필사적이다. 시종일관 자기가 대단하다는 자기선전만을 반복하며 산다.


과거의 마음에 갇혀 사는 일은 일종의 가상현실에서 사는 일과 같다.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자에게는 마치 진짜인 것처럼 경험된다. 이상심리학적 용어로는 이것을 '망상장애'라고 부른다.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고,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며,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는 모든 일이다. 이.야.기.를. 삶.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망.상.장.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마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무의식을 깊게 탐구해감으로써, 하나하나 과거의 마음들을 만나 온전하게 정화시키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더 억압 속으로 빠져든다. 망상만 심해진다. 이러한 기억의 방식이 분명 어느 시기에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아니다.


다.루.지. 않.는. 것.이. 그. 답.이.다.


현상학에서는 왜 '괄호치기'라는 것을 하는가? 다루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의 마음인 선입견과 편견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내며, 그것을 직접 다루려 하지 않는다. 게슈탈트 접근의 프릿츠 펄스는 이를 더 간명하게 말한다. 그는 '현재의 필요'에만 집중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게슈탈트를 위시한 실존적 접근들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다. '현재의 필요'를 알리는 것이 바로 '현재의 마음'이다. 이것은 불교적이기도 하다.


현재의 필요를 느끼는 것이 현재의 마음이라고 할 때, 이 현재의 마음에만 응답하면 그것이 바로 삶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 일어나는 삶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면, 곧 삶과 일치하게 되면, 과거의 마음이라고 하는 일종의 '응어리'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녹아 사라진다.


너무나 직접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돈이 궁한 한 청년이 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잔소리가 시작된다. 그는 기억력이 좋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에게 이러셨다. 언제나 자신은 착취되어 온 인생이었다. 분노가 이글거린다. 한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전화기를 내동댕이치려는 그 순간에 아버지가 말한다. "아빠가 10억 정도 너한테 지금 이체해주려고 하는데, 필요한 곳에 알아서 잘 쓰렴." 그는 바로 행복해진다.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한이 풀리며, 둘코락스를 먹은 것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쑥 내려간다. 아버지, 영원히 사랑합니다. 불세출의 효자가 지금 막 탄생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아버지의 전화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그 길로 상담소로 달려가 카우치에 누워 '마음게임'을 시작했다고 해보자. 100회기가 지나도 그의 한은 풀리지 않는다. 과거의 마음의 지배력은 영속적이다. 왜? 그의 기억력이 좋기 때문이다. SNS와 대중심리학의 책들에 나오는, 자기와 똑같이 아버지에게 착취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자신을 지지해준다. 관계망의 동료들을 통해 그의 기억은 더욱 강화된다. 이처럼 편집된 기억은 망상의 제국을 향해 줄달음친다.


상담은 이러한 '마음게임'을 서비스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상담은 '마음게임'의 밖에서 성립되는 일이다. 내담자의 사실적인 '현재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상담이다. 상담은 사실을 다루는 일이지, 허구를 다루는 일이 아니다. 과.거.의. 마.음.은. 전.적.인. 허.구.의. 것.이.다. 물론 허구에는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허.구.는. 우.리.가. 그.것.을. 믿.는. 한. 우.리.에.게. 영.향.력.을. 갖.는.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쓰레기다.


우리가 더욱더 사실을 보려고 할수록, 허구에 대한 믿음은 약해진다. 끝내는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영영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다시 한 번, 자유다. 자.유.가. 치.유.다.


이. 시.대.는. 허.구.가. 지.배.하.는. 시.대.다. 과거의 마음과 기억장치에 입각한 허업이 번성하고 있다. 플랫폼이라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실은 컨텐츠가 아니다. 빈 상자다. 커다란 컨테이너 안에 똑같이 비어있는 무수한 상자들만이 적재된다. 이러한 허업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빈 상자를 볼 때 그 안에서 꿈을 본다. 꿈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과거의 마음'을 본다.


미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과거만이 있을 뿐 미래로는 결코 연결되지 않을 허망한 꿈들만이 가득하다. 뉴트로는 그저 언어놀이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닫혀 있다. 누가 그것을 했는가? 과거의 마음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닫아 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암울하고 비극적인 그림인 것 같지만, 우리는 이것을 게임의 감각처럼 하고 있다. 즉, 디스토피아의 게임을 현재 즐기고 있는 중이다. 게임 속에서 성내고, 게임 속에서 우울하며, 게임 속에서 상담을 받는다.


사실적인 우리는 비교적 괜찮다.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일단 당장 죽을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사실 큰 걱정이 아니다. 생존이 위태로운 척하는 세기말적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필요'보다 더 중요하게 '과거의 마음'을 늘 반추하며 경험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좋은 팔자다.


그런데 누군가는, 어쩌면 아주 많은 수는, 아무리 좋은 팔자일지라도 그 팔자 자체에서 벗어나기를 꿈꾸기도 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철서의 우리』에서는 이러한 말이 나온다.


"선(禪)은 살아있는 채로 뇌의 주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거라네."


팔자를 관장하는 기억장치로부터의 자유! 이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든 적든 간에, 여하튼 상담은 이 자리에 선다. 왜인가? 상담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감소는 자극의 감소다. 쾌도 불쾌도 동일한 자극이다. 우리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고통의 자극을 쾌락으로 창출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심.심.함.은. 상.담.의. 황.금.열.쇠.다. 상담은 심심할 때 우리가 게임 대신에 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다. 또 다른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게임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가 상담에서는 가능하다.


말해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창조'다. 심심함은 우리가 리셋된 상태다. '창조적 기억상실증'에 막 들어선 상태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순간 우리가 거대한 백지로 된 것과 같다. 이 백지에 늘 반복해온 과거의 마음만 똑같이 복제하듯 그리기에는 조금 아쉽다. 심.심.함.은. 삶.이. 우.리.에.게. 준. 기.적.같.은.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는 일은 아주 많이 곤란하다.


삶은 정말로 창조하라고 우리가 단 한 번 받은 기회다. 심심함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상담은 고통을 감소시킴으로써 우리가 이 상태에 이르도록 도우며, 창조할 여력을 준비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상담의 핵심적인 임무는 크게 두 가지, '고통의 감소'와 '창조의 자각'이다.


창조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 용어라면, 더욱 쉽게 풀어보자.


창.조.는. 스.스.로.를. 즐.기.는. 일.이.다.


관계, 이야기, 게임 등의 그 모든 기억장치의 방식은, 스스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즐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즐기려면 스스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재에만 있다. 과거의 마음 속에는 스스로가 없다. 이러한 스스로의 감각에는 인칭대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1인칭도 3인칭도 아니다. 당연히 2인칭도 아니다. 거기에는 그저 몰입의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는. 곧. 삶.과. 하.나.된. 감.각.이.다.


물론 관계에도, 이야기에도, 게임에도 몰입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참 좋은 관계였어."

"참 좋은 이야기였어."

"참 좋은 게임이었어."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좋은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컨텐츠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는 아직 요원하다. 저 멀리에 있다.


"나라는 것이 진짜 끝내주는 거였구나!"


아, 당신이 이렇게 말하게 되는 순간은 그러나 선하다.


그 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만남 속에 있다. 삶이란 이 만남의 기회며, 창조란 만남의 실현이다. 만남은 이 모든 것이 허구라 할지라도, 결코 허구가 아닌 것, 가장 실한 것이다. 그것을 다시 존재라고 부른다. 존재는 만남이다. 그리고 상담은 이 존재만을 향한 활동이다. 당신의 전모를 만나고자 하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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