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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12. 2019

나는 예수님이 싫다(僕はイエス様が嫌い, 2018)

사랑은 영원을 향해 완벽을 깬다



  결코 찢어지지 말아야 할 순백의 창호지가 있고, 결코 더럽히지 말아야 할 순백의 운동장이 있으며, 결코 다치지 말아야 할 순백의 마음이 있다.


  그것이 완벽이다.


  모든 아이는 이 완벽을 꿈꾼다. 자신을 감싸는 울타리 속에서의 완벽을 꿈꾼다. 완벽한 세상 속의 자신을 꿈꾼다.


  눈 덮인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이 영화의 주인공 아이도 완벽을 꿈꾼다. 작지만 충실하게 다 채워진 공간을 꿈꾼다. 하루하루 충만하게 채색되는 시간을 꿈꾼다.


  그리고 아이를 둘러싼 모두는 아이에게 그러한 완벽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늘 아이 앞에서 웃는 얼굴을 보이고, 아이의 편에 서서 염려하고, 관심 속에서 배려하며, 아이가 원하는 완벽한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아이를 돕는다.


  그렇게 아이 주변의 모두는 아이를 향해 한정없는 긍정의 허락을 보내는 YES(イエス)님이다. 그렇게 아이 주변의 모두는 아이를 향해 한정없는 긍정의 시선을 전하는 예수(イエス)님이다.


  아이는 이제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YES의 예수님으로 인해 완벽한 세상을 얻는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만 같은 완벽한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완벽한 세상의 한 가운데서,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벅차게 실감한다.


  이 완벽한 세상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는 소망한다. 반드시 소망한다. 간절하게 소망한다.


  아이는 소망한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YES로도 허락될 수 없는 영원의 소망을, 간절한 만큼 YES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세상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그 소망을.


  아이는 몰랐던 것이다.


  간절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소망하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 없다고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때문에 간절한 소망은 그 어떤 지금 여기의 YES라도 전부 다 부정하는 NO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아이는 몰랐던 것이다. 삶의 역설에 대해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배우고 있는 것이다. 모른다는 이 사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좌절될 아이의 소망은 정확하게 아이를 좌절시켰다. 아이는 자신의 완벽한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대상을 상실했다. 그로 인해 완벽한 세상은 깨어졌다.


  아이는 이제 YES가 밉다. 예수가 밉다. 다른 것은 다 이루어주었으면서, 자신이 가장 소망했던 것에만은 YES를 해주지 않은 예수가 밉다. 자신을 배신하고 NO가 되어버린 YES(예수)가 밉다.


  아이는 이렇게 NO를 발견한다.


  완벽한 세상을 깨는 NO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것이 깨어진 NO 속에서도 다시 부활한 예수(YES)를 발견한다.


  아이는 완벽한 방 안의 세상을 만들어주던 경계인, 깨끗하게 흠없이 발라진 순백의 창호지를 직접 손가락으로 뚫은 뒤, 완벽한 세상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아이는, 아니 아이가 아닌 하나의 시선은 정말로 발견한다.


  결코 찢어지지 말아야 할 순백의 창호지에 구멍을 낸 자신이 있고, 결코 더럽히지 말아야 할 순백의 운동장을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너무나 행복하게 발자국을 남기며 더럽히고 있던 자신이 있으며, 결코 다치지 말아야 할 순백의 마음을 그 친구를 잃은 아픔으로 가득 새기고 있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그 모든 것을, 완벽한 세상 속의 모든 것을, 그 모든 완벽함을 스스로 깨고 있던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고 있던 자신이 그 모든 완벽한 세상을 스스로 깨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완벽한 세상을 스스로 깰 정도로 얼마나 자신이 이 삶을 사랑하고 있었던가의 사실을.


  그렇게 아이는 배웠다. YES 속에 NO가, NO 속에 YES가 함께 있는 역설적 삶을 향한 사랑을 배웠다.


  그렇게 아이는 보았다. 결코 더럽히지 말아야 할 아름다운 순백의 운동장 위에 까만 발자국을 진하게 새기며 달려가는, 순백의 운동장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랑의 발자취를.


  그렇게 아이는 보고 있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NO의 그 풍경을, YES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NO에 대해 YES로 보고 있다. 예수로 보고 있다. 아이가 보고 있는 그 시선은 예수의 것이다. 아이는 예수다. 영원의 담지자다.


  단지 YES뿐인 완벽한 세상보다, 반드시 아이는 더 커다란 현실을 소망해야 했다. 완벽을 스스로 깨야 했다.


  사랑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영원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신의 크기만큼이나 그에 어울릴 동등한 크기의 현실을 개방한다. 완벽한 세상보다 더 커다란 영원의 현실이 언제나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크기의 바로 그 현실이다.


  영원은 단지 지금 여기의 YES로는 닿지 못한다. 영원은 지금 여기의 NO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게 NO 속에서 다시 살아난 YES만이 영원의 열쇠다. 사랑은 언제나 그 모든 NO 속에서 YES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만이 유일한 영원의 열쇠다.


  우리는 우리가 그 모든 NO 속에서 사랑했다는 사실을 배워가면서, 우리의 가슴 속에 그 사랑을 담는다. 담겨진 사랑이 우리의 가슴 속 영원을 개방한다. 그 영원 속에서 언제나 사랑은 생생하다. YES다.


  모든 아이는 그렇게 예수가 되어간다.


  모든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존재에의 용기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가운데,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사라져버린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위의 하나님(god above god)에 뿌리내리고 있다." - 폴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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