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4

"관계라는 던전에서 탈출하기"

by 깨닫는마음씨




쿠이 료코의 명작 『던전밥』에서는 욕.망.이. 던.전.을. 만.들.어.낸.다.고 묘사한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던전은 그 구조가 더욱 복잡해지며 그만큼 던전을 방문한 모험가들의 생존확률도 낮아지게 된다. 표현 그대로, 던.전.은. 모.험.가.들.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 포식의 행위는 던전을 제패하고자 하는 모험가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그들이 더욱 깊은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분명히 모험가들의 기대가 있다. 미지의 몬스터를 퇴치함으로써 얻게 되는 명예와, 미궁의 가장 안쪽에 놓여있을 것만 같은 보물상자에 대한 기대다. 이러한 보상을 꿈꾸며 모험가들은 던전의 심층부를 향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은 길을 잃거나 지쳐서 결국 던전의 양분이 된다. 던전은 이처럼 모험가들의 욕망을 먹고 성장한다.


모험가들의 착각은 자신들의 노력이 결국에는 보상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상이 약속된 보스의 방이나 보물창고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던전의 구조 때문이다. 욕망의 속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모.험.가.의. 욕.망.이. 큰. 만.큼. 던.전.도. 커.진.다. 그러니 가도 가도 실은 끝이 없다. 역으로, 보상으로 향하는 그 길이 지난하고 험난한 만큼 기대는 더욱 커져간다. 욕망이 더욱 부풀어오른다. 그에 따라 주변의 풍경들도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을. 법.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형상으로 바뀌어간다. 던전의 교활함이다.


이것은 다단계 사업체의 구조이기도 하다. 실제로 돈을 버는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열광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다단계의 흥행비결이다. 우리가 사이비라고 부르는 것들의 핵심은 '쇼'다. 쇼의 구조 속에 사람들을 밀어넣어 일종의 성공적인 가상현실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4대 우상으로서 각각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말한다. 이 우상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쇼의 무대가 바로 던전이다. 그래서 던전은 늘 스펙터클하다. 겉이 아주 화려하다. 때문에 계속 벗겨내다보면 더 멋진 것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만 같은 환상을 촉진한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대표적인 이 환상의 소재다. 무의식과 던전을 연결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무의식의 심층을 파내려가는 일은 던전을 모험하는 일과 전적으로 동일한 일이다. 곧, 동일하게 전적으로 무용한 일이다. 무.의.식.에.는. 보.물. 같.은. 것.이. 없.다. 무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단지 더 깊은 무의식으로 향하는 계단일 뿐이다. 혹자는 최하층까지 내려가면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최하층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 없다. 이것은 다만 '무한의 하강운동'일 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이 무한의 하강운동이 멎는 자리는 있지 않을까? 정말로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은. 있.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양파를 생각하면 정확하다. 까고 까고 또 깐 그 끝에 있는 것은 무(無)다. 욕망의 끝은 원래 이처럼 무(無)다. 무의식은 무로서, 무한히, 무화된다.


무.의.식.은. 구.조.다. 그리고 '구조'라는 것이 원래 이러한 것이다. 구조에는 그 구조를 이루는 '핵심적인 씨앗'과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은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일 뿐이다. 심지어는 더 본질적인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보다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보다는, 모든 구조 자체에는 아무런 권위가 없다고 한 니체의 생각을 더 존중한다.


우리의 삶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 구조의 중심을 향해 고고학적 탐사를 이루다보면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주장은 '본질주의 심리학'의 발상이다. 우리는 이 깜찍한 발상에 대한 해체의 의도를 불교와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인지과학에서 발견한다.


우리가 "무의식은 구조다."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 말이 "삶[실존]은 구조다."라는 말과의 동의어는 아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인간은 던전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당위를 가진 존재라는 강압과도 같다. 그래서 늘 실존상담은 정신분석과 정반대의 방향성을 갖는다. 정.신.분.석.이. 안.의. 중.심.을. 향.해. 파.고.들. 때. 실.존.상.담.은. 탈.중.심.을. 이.루.어. 밖.으.로. 나.간.다.


실존상담은 던전을 모험하는 일이 아니라 던전에서 탈출하는 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진.짜. 모.험.을. 시.작.하.고. 싶.어.서.다. 실체도 없는 욕망 속에서 헤매다가 그 욕망의 먹이가 되어 잡아먹히는 일은 오히려 우리가 삶을 모험할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 욕망에 충혈된 눈으로 두더지처럼 던전이나 파고 있으라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욕망을 거세하고 억압하려는 금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자기의 욕망과 투쟁하는 금욕주의의 편린은 '본질주의 심리학'의 지지자들에게서 더 압도적으로 드러난다. 매우 자주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의 주체들, 또 그들만큼이나 '무의식적 본질'의 개념에 집착하는 오컬티스트들이 유교훈장님처럼 보이는 이유다.


실존상담은 오히려 우리가 욕망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욕망을 왜 던전으로 만드는가?"


이 유익한 질문과 함께, 실존상담자들은 이 자리에서 욕망의 굴절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욕망을 이루려면 던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일방적이고, 획일적이며, 독재적인 발상이, 그럼으로써 마치 진리인 것처럼 작동하는 이 생각이, 결과적으로 욕.망.을. 타.락.시.켰.다.


모든 타락은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의 추락이다. 욕망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 욕망의 타락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타락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원.래. 절.대.적.이.었.던. 욕.망.이. 상.대.적.인. 구.조.로. 밀.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던전'이라고 하는 '무의식'의 '구조'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이름을 발견한다.


던.전.은. 바.로. 관.계.다.


던전을 상대적으로 '관계화된 욕망'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곧 '타락한 욕망'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욕망이 가는 길의 끝은 늘 비극적이다. 스스로의 팽창으로 스스로를 잡아먹는 자기파멸의 길이다.


모험가들은 왜 던전에 들어가는가?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명령은 이러하다.


"너의 욕망은 관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그러니 관계를 욕망하라."


이로써 모든 것이 굴절된다. 우리는 마치 엄마가 없으면 만족을 얻을 수 없는 미숙아처럼, 끝없이 관계의 대상을 찾아 던전 안을 헤매다 죽게 된다.


엄마에게 고착된 마마보이들이 이 '던전의 판타지'와 '관계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던전'과 '관계'는 그 안으로 파고 들어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되는 '엄마의 품' 그 자체다. 나아가 이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리라고 신앙되는 '엄마의 자궁'이기도 하다. 던전의 과업을 잘 완수하는 영웅이 되고, 관계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가 과거와는 다른 자기 자신으로 변한 것처럼 경험하는 일은 실증적이다.


변화, 이것은 부정되어선 안된다. 관계라고 하는 던전은 분명 개인을 변화하게 해주는 매개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의 요소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변화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관계가 변화의 핵심적 필수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극적으로 또 자기 자신에게 있어 긍정적인 형태로 변화할 때를 살펴보면, 이러한 변화는 관계를 거치지 않고 일어난다. 자신에게 특정지어진 상대와의 '애착관계' 속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길을 걷다보니 날이 추워져 옷을 입는다. 이.것.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왜인가? 여기에는 '상대적인 욕망'의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겉옷을 입는 것은 날씨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렇게 만족스럽게 미소짓는 날씨의 얼굴을 보고 행복해지려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핵.심.적.인. 변.화.는. 단.순.하.게. 필.요.에. 따.라. 일.어.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필요'와 '욕망'의 문제를 구분한다. 쉽게 말하자면 '필요의 좌절'이 욕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현명한데, 필요와 욕망이 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 동일한 것의 이름은 '의도'다.


그래서 의도는 언제나 좌절된 만큼이나 과잉된 형상을 띤다. 이 '과잉의도'의 다른 이름이 바로 '집착'이다. 그리고 집착은 늘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당연하다. 과잉되었다는 것은 그 목표치가 터무니없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원대한 야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아주 쉽게, 자기의 인생에서 권위를 크게 의도하는 이가 자기를 권위롭게 보아줄 무수한 대상들을 요청하게 되는 일과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모험가는 '권위없는 자신'에서 '권위있는 자신'으로 변화되고자 관계라는 던전으로 입장한다. 던전은 모험가에게 엄마와 같은 것이다. 모든 관계는 '유사 모자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과거에는 좌절되었던 의도를 이루기 위해, 이 관계 속에서 이제 모험가들이 실행하게 되는 전략이 있다.


"상대를 먼저 만족시킨 다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관계의 모범공식이다. 던전에서의 성공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보편적 방법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전무한 로또필승법과 같은 것이다.


왜인가? 왜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가?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관계 속 상대의 욕망도 '무한의 하강운동'이다. 들이붓는 물만 한없이 떨어져내린다. 채워질 수 있는 '끝'이란 없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뻥 뚫린 무(無)의 구멍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러한 독을 채운 뒤에 그 보상을 기대하고자 하는 행위는 그저 우리 인생의 독(毒)이 될 뿐이다. 무수한 모험가들이 자기만은 특별하게 성공할 것이라 믿으며, 이처럼 관계라는 던전에 예외없이 '중독'되어 부질없이 사라져간다.


그래서 실존상담자들은 다시 묻는다.


"욕망을 왜 던전으로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다.


"밑빠진 독에 왜 물을 붓는가?"


떠올려보자. 정직해보자. 우리가 물을 붓고 있던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나지 않는다면 사실을 살펴보자. 독에 '더 많은' 물을 붓고 있었다. 물이 과잉되었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우리는 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을 마시고 싶은 의도가 좌절된 과거의 장면으로 인해, 우리는 과잉된 의도를 내어 더 많은 물을 독에 부음으로써, 그 독이 결국에는 큰 감동을 받아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무조건적 생명수를 보상으로 돌려주게 될 '쇼'를 연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쇼, 끝은 없는 거야."라는 노래가사처럼, 정말로 쇼는 끝이 없다. 다시 한 번 '무한의 하강운동'이다. 우리를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추락하는 것에는 당연히 날개가 있다. 상대적인 욕망을 덕지덕지 날개로 붙인 '이카루스의 신화'다. 그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가 저 유명한 미노스의 미궁을 만들었다는 점은 의미깊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기 위해 미궁 속으로 들어간다. 그도 어쩌면 이 장대한 던전에서 헤매다 잡아먹히게 될 팔자였을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무수한 모험가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변화가 생겨났다. 미궁을 주문한 미노스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로 인해 그는 괴물을 퇴치한 뒤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이 실타래의 비유는 분석심리학에서 마치 무의식의 심층을 탐험하는 지혜의 방법인 것처럼 상징된다. 남성의 경우라면 그의 내면적 여성성이 던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해주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 『데미안』에서의 에바 부인도 싱클레어에게 동일한 입장에 선다. 우리는 이 묘사들을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해볼 수 있다.


"엄마가 있어야 던전에서도 안전해."


그러니 엄마의 욕망을 먼저 만족시켜야 성공이 담보된다고 믿게 되는 일은 마마보이 모험가들에게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엄마의 경우라면, 엄마는 정말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아리아드네가 그의 아버지인 미노스 왕을 배신하고 테세우스의 편에 붙은 것은, 아버지의 세계가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바보온달에게 붙은 평강공주처럼 테세우스의 연인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테세우스가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여전한 불만족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와 이별하게 되는 사건으로 신화 속에서 잘 묘사된다.


이들의 이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과적인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설은 술과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테세우스에게 이별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아리아드네는 신의 아내가 되었다. 인간의 왕의 딸에서 인간의 영웅의 연인으로, 그리고 이제는 신의 아내로까지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녀가 쓴 왕관은 별자리가 되었고, 그녀의 사후에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를 여신으로까지 세우게 된다. 그렇게 아리아드네는 '풍요의 여신'으로서 널리 숭배받게 되었다.


이것은 마마보이 모험가들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의 그 이유다. 그들이 밑빠진 독을 채워줄 수 있는 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실패는 필연이다.


이 모든 것을 '아리아드네의 욕망'의 문제로 다시 이해해보자. 모험가인 테세우스의 욕망은 더욱 거대한 이 욕망에 종속된다. 그러니 실은 테세우스는 던전을 나와서도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을. 던.전.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 실.은. 몸.이. 묶.여. 있.던. 것.과. 같.다. 곧,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자체가 던전이었던 셈이다. 이 신화를 예찬하는 융이 평생 그의 아내에게 예속되어 산 모습과도 동일하다.


여기에서 아리아드네에게는 모종의 잘못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리아드네의 욕망'은 욕망의 활동적 차원에서 아주 정당한 것이다. 여성성은 고작해야 길잡이 내지 엄마노릇이나 하며 남성성에 봉사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욕망은 잘 보여준다. 그녀도 테세우스가 그러했듯이 상대적 대상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꿈꾸었던 것뿐이다.


마마보이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누군가를 엄마로서 관계 안에 계속해서 종속시키려는 행위에 대해, 엄마가 되어 있던 그 누군가가 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마마보이를 동일한 방식으로 종속시키려는 행위는 당연한 일이다. 마마보이보다 더 자신을 잘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신적 대상'을 향해 욕망의 주체가 이동해가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엄마가 있어야 던전에서도 안전해."라고 믿던 마마보이 모험가가 '엄마라고 하는 던전'에 잡아먹히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던전의 속성이고, 욕망의 속성이며, 곧 관계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우리가 이처럼 밑빠진 독에 물을 붓다가 결국에는 그 독에 잡아먹히기까지 해야 한다면, 이러한 일을 대체 왜 해야 하는가?


자기도 손에 꼽힐 영웅이 되기를 꿈꾸며 곱등이들이 가득하게 기어다니는 던전에 들어가거나, 자기도 주류의 신이 되기를 꿈꾸며 주정뱅이 신의 아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도는 어디를 향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붓.고. 있.던. 그. 물.을. 그.냥. 우.리.가. 마.셔.버.린.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세례를 받는 것이다. 성화(聖化)가 일어난다.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그 즉시 회복된다.


단 한 바가지의 물로 오랜 갈증이 해소되고, '의도'가 완벽하게 실현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껏 갈망해왔던 그 욕망이 정말로 우리의 것이었는지에 대해 새삼 아연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이렇게 쉬워도 되고, 이렇게 단순해도 되는지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목.이. 마.르.지. 않.다.는. 사.실.은. 절.대.적.이.다.


사막에서 헤매던 이는 엄마가 떠다주는 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선인장을 잘라 스스로 물을 얻을 수 있었다면, 자.신.이. 자.신.을. 살.렸.다.는. 그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소중하다. 그는 환상이 아니라 사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던전이 만들어낸 환상에 사로잡혀 엄마의 신기루가 보이는 지평선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엄마가 에비앙 생수를 들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엄마. 이제 곧 이 실타래를 따라서 갈게. 후대의 연구자들은 사막에서 발견된 바싹 마른 미이라가 짓고 있는 미소의 표정을 궁금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영웅'이 되었으니 그는 만족했을까?


분명한 것은, 선인장을 잘라 스스로 물을 마시고 사막에서 귀환하는 일에 성공했다면 '실제의 엄마'는 분명 가장 기뻤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로. 우.리.가. 좋.아.하.는. 이.들.의. 기.쁨.이. 되.는. 삶, 우리는 이런 삶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살고 싶은 그 '의도'만이 우리에게 유일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는 우리가 좋아하는 그 이들도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부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현명한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몸의 의도가 있고, 너에게는 너의 몸의 의도가 있어. 너의 몸은 온전하게 너의 것이야."


이것은 더 짧게 실천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네 자신을 스스로 만족시킬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자신을 먼저 만족시키는 이에게는 엄마가 아무 걱정이 없다. 관계는 건강하게 해지된다. 그녀는 더는 우리에게 실타래를 제공해야 할 '당위의 소재'가 아니라, 이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다. '당위'가 있는 곳에는 원래 '사랑'이 없다. 우리가 엄마를 '그녀 자신의 고유한 의도를 가진 개인'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사.실.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도전적이며, 많은 경우 아주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상담이 '관계의 해체'를 그토록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다. '진짜 모험'이란 무엇인가? 삶을 모험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사.랑.하.려.는. 모.험.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삶에서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다.


우리는 관계에서는 모험할 수 없으며, 동시에 우리는 관계의 대상은 사랑할 수 없다. 왜인가? 그것은 언제나 우리 자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가.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모험인 것이다. 내[자아]가 아닌 것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신성한 모험이다. 고등종교의 경전들은 다 이 모험담이다. 던전[자아]이 아니라, 던전[자아] 밖을 모험했던 진짜 모험가들의 기록이다.


욕망의 원상을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하다. 모든 욕망 중에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바로 '초월의 욕망'이다. 이것은 절대성을 필요로 하며 또 절대성을 욕망하는 '절대성의 의도'다. 그리고 이. 의.도.는. 자.기.를. 초.월.하.는. 일.로.서. 실.현.된.다.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그 자아 밖에 서는 일, 이것을 짧게 줄여 말하면 '실존'이다. 이것은 '상대하지 않는' 절대성으로 사는 일이다.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자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절대성의 의도'가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관계의 실을 되짚어 관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하게 필요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관계라는 던전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몸.에. 건.넬. 물. 한. 바.가.지.다.


엄마가 없으면 물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울상이던 그러한 자아를 초월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서 모든 이에게도 기쁠 그 절.대.적. 기.적.을. 집.행.한.다.


그리고 사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던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흘린 그 물 한 바가지가 마중물이 되어, 저 밑빠진 독의 끝없는 심연으로 내려가 심연을 끝없는 생명의 바다로 뒤바꿔놓는다. 태초의 지구에 생명이 막 태어나, 바다가 용솟음친다. 생명의 물결이 육지로, 하늘로 올라서, 날개를 달고 수직으로 상승한다. 살아있는 것들이 무량하게 터져나온다. 심연 따위는 채우고도 남을 영원한 생명의 물줄기가 언약처럼 이루어져 있다.


던전은 이미 물에 잠긴지 오래다. 밑빠진 독을 채우는 법은, 독에 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독을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던전이 이미 없다. 사랑이 범람하여 우리가 탈출했다. 우리는 지금 관계 속이 아니라 사랑 속에 있다. 목마른 이들을 위한 사막의 물탱크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일 자체가 모든 이의 기쁨이 된다. 우리는 진심으로, 이 진짜 모험을 시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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