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5

"어른놀이의 꿈과 긍정적 수치심"

by 깨닫는마음씨




# 수치심의 문제


2022년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심리적 문제는 바로 '수치심의 문제'다. 이. 수.치.심.의. 문.제.가. 모.든. 영.역.에.서. 분.열.을. 만.드.는. 이.유.다. 분열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바로 상.대.를. 대.신. 수.치.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생.겨.난.다. 이것은 자기 자신만은 결코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악착같이 상대들에게 수치심을 전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너 똑바로 못사네."


이것이 수치심을 시동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수치심의 문제가 윤리적 평가와 연합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윤리적 평가는 대단히 엄격하다. 그것은 거의 존재론적 평가다. 그러니 우리가 수치심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은 당연하다. 수.치.심.은. 마.치. 우.리.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감.각.처.럼. 경.험.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똑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른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어른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다. 윤리와 연합된 수치심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수치심이란 곧 '어른이 되지 못한 수치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타당한 이해를 형성한다. 자신의 미숙함을 알게 되었을 때 경험되는 것이 수치심인 까닭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배.울. 기.회.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치심은 이 배움의 계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배움에 대한 '최종적 실패의 낙인'처럼 인식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치심은 '구제불능'의 존재에게 새겨지는 주홍글씨로 자리매김한다. 주홍빛으로 붉어진 얼굴이 그 생생한 증거다.


이것은 수치심의 문제가 내포하는 진짜 문제의 양상을 암시한다.


아.무.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시대의 진짜 문제다. 왜 배우려 하지 않는가? 자.신.들.은. 이.미. 정.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답대로 정확하게 실천할 수 있는 탁월한 자신의 면모를 보여야 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에 따라 수치심은 결국 '열등감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아들러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열.등.감.은. 자.기.가.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이.에.게.만. 경.험.되.는. 현.상.이.다.


배우고자 하는 이는 열등감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의 가슴은 위축되기보다는 오히려 미지를 향한 설렘으로 부푼다. 자기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앎의 권위자들'만이 그 앎대로 실현되지 못했을 때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 '앎의 권위자들'은 왜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경험하게 되었는가? 유튜브에 그렇게 영상화되어 있고, 나무위키에 그렇게 써있으며, 자기가 따르는 사이비구루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곧 자.기.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수.준.을. 자.기.의. 수.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아는 것이 자기의 실제 삶이라고 착각함으로써, 결국 '앎'이 '삶'을 대신하게 되는 이 현상을 '실존의 소외'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이와 같이 우리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을 때 그 망각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양심은 거울과 같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우리의 사실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는 그 근간에는 양심의 작용이 있다. 양심은 정확하게 우리를 비추며, 우리가 알고 있는 무수한 고급정보들과 실제의 우리 자신이 동.일.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알.린.다.


즉, 양.심.에. 비.추.었.을. 때. 수.치.심.에. 괴.로.워.지.는. 이.는. 누.구.도. 실.은. 어.른.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것은 문제가 된다. 우리가 어른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앎과 실제의 삶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계발의 노력을 다한다. 고급정보의 수준만큼 자신도 고급스러운 존재처럼 보이고자, 유튜브에서 우아하게 드립커피 내리는 법을 찾아보고, 밀키트를 데워 귀족같은 밥상을 차리는 방식으로, 갖은 '쇼'를 연출한다.


그러다가 도저히 자기에게 밀려드는 고급정보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제 사기를 치게 된다.


죽.지. 않.으.려.면.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어른스럽게 똑바로 사는 척하는 사기꾼이 되어 있다보니, 정말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상실된다. 왜 그런가?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움직임을 가지면, 그동안 그것을 알고 있는 척했던 자신의 사기가 여실하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기꾼들은 몰라도 아는 척하며, 남들 앞에 고급정보를 떠벌리는 일종의 '스승 역할'을 고수한다. 이 '시대의 큰어른' 같은 스승의 임무를 다해, 점잖게 다른 정적들에게 수치심을 떠넘기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화두라고도 할 수 있는 '꼰대'의 모습이다. 꼰대는 특정한 세대에게서만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다. '늙은 꼰대'나 '젋은 꼰대'는 동일한 사기꾼이다. 자신이 미숙한 존재로 판정되어 죽어야 하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에 대한 사기를 거듭하는 비장한 자기기만자들인 셈이다.


결국, 분열, 사회갈등, 사기, 내로남불, '정치적 올바름'의 압박, 정보과잉, 윤리적 억압, 자기계발로 인한 자기소진, 존재론적 자기소외, 열등감, 꼰대 등의 그 모든 문제적 상황들이 전부 다 '수치심의 문제'로 인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의도가 이러한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회피의 의도로 가장 빈번하게 채택되는 한 방식이 있다.



# 어른놀이와 영웅코스프레, 그리고 위로종용의 사회


'수치심의 문제'를 가장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어른놀이'를 펼쳐낸다. 이것은 아주 쉽게, 어.른.인. 척. 놀.고. 있.는. 것.이.다. 이 '놀고 있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자주 발화하곤 한다.


"우리가 그 사람 알아줘야 해요.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온전했는지를, 우리가 바로 봐줘야 해요."


이러한 대사에서 무림을 평화롭게 통일한 무협지 주인공이나 세일러문 같은 현대판 천사공주의 뉘앙스를 눈치채는 일은 현명하다. 이것이 어른놀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른.놀.이.는. 영.웅.신.화.의. 코.스.프.레. 놀.이.다.


여기에서 영웅신화들은 아주 전형적인 장르문법을 따른다. 묘사하자면 그것은,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가 다양한 갈등에 시달리는 과정 속에서 결국에는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 안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한 뒤 그 아이에 대한 상냥한 마음을 갖게 됨으로써, 이를 통해 주변을 따듯하게 지키고 돌볼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가진 영웅으로 각성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항마력을 높이기 위해 직접적인 대화체로도 한번 묘사해보자.


"자기만 혼자 잘난 게 영웅이 아니라규. 자기가 약하기 때문에 두렵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렇기에 약한 인간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게 영웅이라규. 아이언맨도, 스파이더맨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그리고 매그니토도, 배트맨도, 스타워즈의 기사들도, 다 그렇게 자기의 약한 내면아이를 끌어안으며,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에 상냥해짐으로써, 결국 서로를 도와가는 인간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한 거라규."


무협지, 라노벨, 웹툰 등에서 너무나 지루하게 반복되어온 이 통속적 스토리를 윤리적 교훈으로 삼아, 곧 저연령용 대중문화의 서사를 진리로 삼아, 자기 자신이 이제 진리와 하나가 된 고귀한 예언자인 척 행세하며, 나아가 이 '저연령용 진리'를 '어른의 법도'처럼 가르치는 '인생스승'으로 행위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어른놀이인 것이다.


그래서 어른놀이는 언제나 저연령용 위인전에 대한 방학숙제 감상문과 같은 유치한 질감을 갖는다.


"저도 김유신 장군님이 말의 목을 벤 것처럼 저를 계속 나쁜 길로 빠트리는 닌텐도 스위치를 해치웠더니 엄마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저는 초딩처럼 살지 않고, 어른답게 GTA를 하며 제 자신의 인생을 성숙하게 책임지고 싶습니다.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GTA 속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는 상냥하게 알아주는 멋진 어른으로 살겠습니다. 당신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며, NPC 한 분 한 분의 내면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유.치.하.고. 유.치.하.고. 너.무.나. 유.치.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유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어른놀이가 바로 사실을 말하는 일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면 우리 내면아이가 수치스러워 하잖아욧!"


어떻게든 수치심을 봉쇄하기 위해, 이 쇄국정책의 의지는 단호하다. 정말로 자기 손에서 불이 나갈 것이라고 믿는 아이가 KOF의 야가미 이오리를 코스프레하고 서있을 때, 나아가 그 아이가 통행을 가로막으며 보라색 불꽃을 신비롭게 뿜어내는 자신의 야망의 몸짓에 도취되어 있을 때, 누군가가 그 앞에 다가가 여기 차도 중앙선에서 '놀고 있지' 말고, 저쪽 코스프레 행사장으로 가라고 말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격앙된 엄마의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엄마가 자기 아이가 야가미 이오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일을 봉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자.기.도. 더.는. 세.일.러. 머.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일러 머큐리인 자신이 불꽃소년 레카인 남편과 결혼해, 아이는 열정적이면서도 인간에게 상냥할 줄 아는 보라색 불꽃의 야가미 이오리가 되었는데, 물론 아이가 아직은 폭주하는 에반게리온 초호기처럼 거친 면이 있어도 자신의 천사적인 성품으로 그것을 품어내어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시켜야 하는데, 이 신성한 '어른놀이'가 방해받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똑.바.로. 살.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내면아이'와 같은 것이, 또 '약한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는 표어가, 어른놀이에 반드시 필요한 그 이유다.


약.자.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어.른.놀.이.는. 성.립.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어른놀이는 기생충의 일과 같다. 아이를 만들어놓고 그 아이에게 기생하여 자기는 어른인 척하는 일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어른놀이의 의도에 기인한다. 우선적으로는 자기가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며 '똑바로 사는' 어른의 입장에 서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 다음으로는 자기가 약한 아이처럼 인식됨으로써 어른놀이의 주체인 '어른'에게 착취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착취'는 '위로'라는 이름으로 집행된다. 이것은 아주 섬세하게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괜찮아. 약한 너의 이야기를 해봐. 얼마나 무서우면 그랬을까. 이제는 우리가 들어줄 거야. 네 약함을 용기내어 고백해봐. 언제든 우리가 네 편이 되어줄 거야."


이것이 '위로종용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수치심'의 소재가 '비장함'의 소재로 뒤바뀐다. 그리고 그 비장한 상태를 자상하게 돌보려는 이는 이제 '신성함'까지도 획득하게 된다. 바야흐로 '수치심의 신격화'인 셈이다.


"솔직히 말해봐. 부모와 같은 우리가 없으면 너 똑바로 못살잖아. 그래도 괜찮아. 네가 혼자 똑바로 못한다는 것만 고백하면 우리가 지켜줄 거야. 똑바로 못사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인 거 맞지? 괜찮아. 그렇게 똑바로 못사는 너를 지켜주려고 우리가 있는 거니까. 인간은 서로 도우며 사는 거야 원래. 못나도 괜찮아요. 그래도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니까."


이것은 흡사 부모가 아이를 '패배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의식과도 같다. 왜 패배시키려 하는가? 그래야 부모의 가치가 상격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똑.바.로. 못.사.는. 만.큼. 부.모.는. 상.대.적.으.로. 똑.바.로. 사.는.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처럼 '위로종용의 문화'는 누군가가 부모의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그 반대편에서 아이의 역할이 강제로 떠맡겨진 이에게 자기의 수치심을 효과적으로 전가하기 위한 장치다.


가.장. 수.치.심.을. 느.끼.는. 이.가. 이. 시.대.에. 모.든. 것.을. 다. 품.어.주.는. 부.모.처.럼. 활.동.한.다.


어른놀이는 이 아이를 상냥하게 돌보는 영웅, 스승, 부모의 형태로 극성스럽기만 하다. 자기가 수치심으로 죽지 않기 위해 대신 아이를 죽이려고 필사적이다. 이것이 결국 어른놀이의 결과다. 이로 인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른.놀.이.로.는. 우.리.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연하다. 아는 척하는 동안에는 정말로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 어른인 척 '놀고 있는' 동안에는 어른은 요원하다. 그러니 수치심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양심의 거울은 점점 더 보기 싫어진다. 그렇다면 상담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 긍정적 수치심으로의 전환: 창피함과 참피함 사이에서


상담에서 '수치심의 문제'를 다루는 정통적인 방식은 상담자가 '수치심을 받아주는 이'가 되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오.늘.날. 이. 방.식.은. 아.주. 굴.절.되.어. 있.다.


핵심적으로 말해서, 자기의 수치심을 회피하려는 상담자들에 의해 이러한 경청의 방식은 남용되고 있다. 즉, 수치심을 받아주는 상담자의 입장이 또 하나의 어른놀이의 활동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라며 자기를 좋은 경청자로 봐주기를 '구걸하는' 상담자들은 대개 어른놀이의 주체인 경우가 많다.


구걸의 행위는 구걸할 만큼 절박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유사상담자들은 자기의 수치심을 해소하는 일에 매우 절박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절박함을 자기의 절박함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절.박.함.이.다. 이들의 눈에는 세상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약하고 불쌍한 존재처럼 보인다. 자기가 '알아주지 않으면' 다들 비극 속에서 죽어갈 가엾은 어린양인 것처럼 생각된다.


"응, 응, 엄마 이제 왔어. 괜찮아. 엄마가 왔어. ㅠㅠ"


이 유사상담자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이러하다. 여기에서 이들이 어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이들은 '어른'과 '부모'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을 같은 것이라고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의 결과 이들이 하게 되는 일은 결국 자.기. 부.모.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남.들.에.게. 부.모. 행.세.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실제의 부모보다 자신들이 더 어른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자신들이 더욱 잘 '이상적 부모'를 구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이상적 부모'는 실제의 부모에게 이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다. 곧, 실제의 부모가 업그레이드된 형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업그레이드되어도, 그.것.은. 그.저. 자.기. 부.모.의. 모.습.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기가 양육받은 방식대로 타인을 양육하고자 하는 일을, 이 유사상담자들은 상담이라고 부르고 있는 셈이다. 자.기. 부.모.를. 신.으.로. 모.시.라.고. 타.인.에.게. 종.용.하.고. 있.는. 일.과.도. 같.다. 이 말의 가장 핵심적인 차원은 무엇일까? 이것은 중요하다.


이.들.은. 지.금. 자.기. 부.모. 대.신.에. 내.담.자.들.을. 수.치.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부모의 수치심이 자기에게 전이되었고, 그 수치심이 다시 내담자에게로 넘겨진다. 그럼으로써 수치심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상담소를 찾은 내담자는, 알지도 못하는 남의 부모의 수치심까지 뒤집어 쓰게 된다. "그래도 당신은 온전합니다."라며 유사상담자에게 상냥한 위로는 받고 있지만,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손해를 본 것 같으며, 사기를 당한 것 같다.


이것은 상담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내.담.자. 착.취.의. 궁.극.이.다.


상담이 '위로종용의 문화'로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는 이 착취의 문제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상담은 어떻게 수치심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수치심을 보다 투명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떠할 때 정말로 수치심을 느끼는가?


우.리.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수.치.심.이. 찾.아.온.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가 길거리를 걷고 있는데 우리의 앞에서 매력적인 이성이 반갑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든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예감케 하는 그 몸짓이다. 우리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기쁨의 기운이 차오른다. 우리도 손을 흔들어 이 운명적 만남에 반갑게 화답한다. 그리고 반대편의 이성도 우리의 진심을 알아보았다는 듯이 더 환하게 웃으며 우리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 이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만나 뜨겁게 포옹할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인가. 이제야 우리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알아봐주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성큼성큼 운명의 순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의 옆으로, 그 이성이 엇갈려 지나쳐간다. "자기야, 왜 이렇게 늦었어!"라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포옹의 낌새가 우리의 뒤편에서 느껴진다. 문제는 없다. 우리는 길의 반대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펩시제로를 사려고 했던 것뿐이다. 정말이다. 원래 그러려고 했다. 목이 말라서 발걸음이 빨랐던 것뿐이다. 어, 시원하다, 콜라를 들이킨 우리의 내면에 냉기가 스며든다. 달아오른 얼굴도 빨리 가라앉으면 좋겠다. 여름이라서 역시 덥구나. 그러고보니 친구랑 만나기로 했던가,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도주한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도주행각이 아주 잘 묘사된다. 우.리.가. 존.재.의.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정.도.만.큼. 우.리.의. 행.위.는. 분.주.해.진.다. 과잉된 호들갑을 떨게 된다.


전문용어로 우리는 '찐따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자신이 그러한 '찐따'였음을 자각한 것이다. 수치심은 바로 이럴 때 경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사실 놀라운 성질의 것이다. 한 선사(禪師)는 이렇게도 말한다.


"수치심은 영적 현상이다."


그것은 꿈으로부터, 바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난 증거다. 수.치.심.을. 경.험.할. 때. 분.명.하.게. 우.리.는. 살.아.있.는. 사.실.에. 접.촉.해.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치심을 느끼는 개인은 이미 자신을 '찐따'처럼 경험하게 된 그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찐따짓'에 대해 아낌없이 웃을 수 있다. 이미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꿈.은. 원.래. 이.렇.게. 웃.긴. 것.이.다.


옛 시절, 광대들의 정확한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 꿈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그 모든 '비장한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다 코미디라는 사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눈치챌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광대의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광대의 임무 또한 굴절되었다. 이제 광대들은 누구보다 비장하며, 그 비장한 윤리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스승 및 왕 노릇을 하려고 한다. 어른놀이가 한낱 유치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던 광대들 자신이 가장 어른놀이에 심취해있는 시절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상담이 이 광대의 신성한 임무를 이어받아,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긍정적 수치심'의 힘을 안내하는 일은 유익할 것이다.


꿈은 왜 웃긴가? 유치해서다. 그것이 유치하다는 사실을 알고 배가 터져라 웃고 있는 이는 어른이다. 어른은 성장으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자각으로 인한 입장의 전환으로 그 즉시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핵심이다. 어른은 '깨어남의 문제'며, 곧 '자각의 문제'다. 그리고 수.치.심.이. 곧. 자.각.의. 직.접.적.인. 현.상.이.다.


성숙함의 기준이 윤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시대의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똑바로 살아감에 따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꿈을 꾸는가?


그.래.야. 세.일.러. 머.큐.리.와. 야.가.미. 이.오.리.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똑바로 못살면 죽을 것 같은 그 두려움은, 결국 '세일러 머큐리'로서의, 또 '야가미 이오리'로서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애초 그런 존재인 척하는 사기를 치고 있었기에, 그. 사.기.를. 똑.바.로. 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시작부터 사기를 쳐서 생긴 두려움을 자신이 못나서 생긴 수치심으로 간주하며, 이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기의 행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수치스럽고 두려운 국면으로 우리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일러 머큐리라규! 귀엽고 섹시한 사랑의 전사라규! 나는 야가미 이오리라규! 손에서 불도 나간다규!"


사기를 쳐서라도 어떻게든 '똑바로 된 찐따'처럼 보이고자 하는 이 일은 대체 어떻게 생각되는가? 이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우리가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어른이다. 그러니 어른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과.거.는. 유.치.함.의. 흑.역.사.다. 웃고 싶을 때나 가끔 찾는 소재이지, 진정한 우리 자신을 만들어준 영광의 소재 같은 것이 아니다.


과거를 미화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이는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모르기에 그러한 일을 한다. 아직 꿈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된다. 자기에게 수치심을 상기시키는 일을 자기의 진정성을 모독하는 일로 여기며 부들부들 떤다.


"내가 얼마나 진정한 야가미 이오리로서 사악한 기득권의 쿠사나기 쿄를 해치우기 위해 평생을 걸어왔는데, 오로치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까마득하게 노력해왔는데, 감히 나를 무시해! 아소비와 오와리다! 받아랏! 금 1211식 팔치녀!"


마음의 원리 등을 무협지에 나오는 무술 초식의 알고리즘처럼 말하는 이들은 심리학 및 심리상담이라는 이름의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기에, 이들은 웃음을 봉쇄한다. 늘 불쌍한 이들을 상정하여, 그들 앞에서 숙연한 비장감을 연출한다. 겸손하고 예의바른 모습으로, 국민의례 때 태극기를 접는 기수처럼 형식주의의 미학을 집행한다. 그러한 '어른놀이'의 형식을 잘 모방해서 실천하는 만큼 자기가 어른이 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처.럼. 어.른.놀.이.는. 소.비.된.다.


어른인 척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실적인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된다. 누가 물으면, 열심히 어른이 되어가는 그 길 도중에 있다고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똑바로 살고 있는 척하는' 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이들은 어른이 되는 대신에, 세일러 머큐리로서의 자신을, 또 야가미 이오리로서의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왜 그럴까?


이.들.은. 사.실. 자.기.의. 실.제. 부.모.처.럼.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이들에게 어른이란 부모와의 동의어다. 부모가 유일한 어른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되어야만 한다고 요구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그. 당.위.와. 실.제.의. 긴.장. 속.에.서. 꿈.의. 세.계.로. 도.피.한.다. 세일러 머큐리와 야가미 이오리를 '진정한 어른의 상징'처럼 꿈꾸어낸 뒤 그것과 동일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것은, 이들의 부모 또한 이들을 키우면서 그러한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이름만 다를 뿐, 이들과 똑같이 이들의 부모 또한 그 시대의 영웅신화를 소비하며 영웅의 모습을 코스프레해왔다.


그래서 정확하게, 부모만은 되려 하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부모의 모습이다.


꿈.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김유신과 야가미 이오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부모의 모습만은 되지 않겠다며, 부.모.와. 대.립.하.는. 형.태.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이.들.이 이 찬란한 꿈의 역사를 지속해간다. 부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이 이루는 가문의 영광이다.


"인간은 약하니까 당연히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거라규!"


이제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약하니까 당연히 부모가 도와줘야 하는 거라규! 테츙!"


이 시대의 우리는 지금 '참피[실장석]의 꿈'을 꾸고 있다. 행복회로를 돌리며 세레브한 사육실장이 되는 일을 욕망한다. 사육실장이 되려면 윤리적으로 잘 훈육되어 '똑바로' 살아야만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열심히 산 비장한 자기에게 위로를 건네며 이제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다. 바로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한 '주인님'이 찾아와줄 것이다!


이러한 참.피.에.게. 수.치.심.이.란. 너.무. 고.급.스.럽.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참.피.는. 창.피.를.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선택에 놓이게 된다. 창피할 것인가, 아니면 참피할 것인가? 수치심을 영적 자각의 긍정적 소재로 활용해 꿈에서 깨어날 것인가, 수치심을 상대에게 떠넘길 비장함의 소재로 활용해 망상의 꿈을 지속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이며, 정.말.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배.우.고.자. 하.는. 바.로. 그. 선.택.이.다.



# 공간을 배우고, 웃음을 배운다


두 수행자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논쟁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라고 주장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조사선의 시조인 혜능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흔들리는 것은 당신들의 마음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인도의 한 현인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면 인간이고, 마음이 빠르면 미친 것이며, 마음이 느리면 성자이고, 마음이 멈추면 신입니다."


수치심에서 가장 빠르게 도주하고자 분주한 어른놀이의 일은 이렇게 보자면 분명하게 미친 일이다. 미친 이들이 가는 길이다.


역.으.로. 수.치.심.은. 아.주. 정.적.인. 것.이.다.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수치심을 경험하는 순간은 일종의 충격이 일어난 순간이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의 동작은 멎는다. 그리고 슬그머니 얼굴만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올라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혈기다. 그것도 '웃음의 혈기'다. 살.아.있.음.의. 그. 증.거.다.


마음이 멈추었을 때 웃음은 피어오른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도 말한다.


"신은 웃음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삶을 배운다는 것은 곧 우리가 내면의 신에 대해 배운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이 신성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다. 신의 거울 앞에 우리가 서게 되는 일과 같다.


한 보컬지망생이 그의 트레이너에게서 듣게 된 말이다.


"너는 노래를 잘 부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근육을 너무 많이 써. 잠깐 동안은 그게 통할지 몰라도 오래 가진 않아. 왜? 근육은 늙거든. 근데 그거 알아? 공간은 늙지 않아. 공간을 써."


이것은 현자의 말이다. 감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실명을 거론하자면, 한국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인 김바다 님의 말이다.


공.간.은. 신.의. 성.소.다.


마음이 멈춘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공간이다. 불교에서 공(空)하다고 묘사할 때, 이것은 공간에 대한 비유다.


수.치.심.은. 반.드.시. 우.리.를. 이. 공.간.의. 자.각.으.로. 이.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수치심을 경험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는 사실을, 또 없으면서 있는 척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조우한다. '모름'과 '없음'은 대표적인 공간의 속성이다. 우리가 실은 몰랐고, 또 우리 자신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이 사실을 맞이하면 우리는 이제 정말로 배울 수 있게 된다. 즐거운 척 '놀고 있는' 일을 멈추고, 진짜로 즐겁게 배울 수 있다는 기쁨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역할의 본래적 기능은,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긍정적 수치심'을 촉진하는 일이다. 이러한 긍정적 수치심은 우리로 하여금 내일이 기다려지도록 만든다. 바보 같았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다가올 자신의 모습이 반가워 또 웃음이 나온다.


스승은 우리를 수치심으로 자연스럽게 웃게 만드는 이 과정을 안내하는 이를 일컫는다. 이것은 "그 아이,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요. 얼마나 아파했을까요. 이제 그 아이가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너의 과거를 당당하게 기억해!"와 같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스승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수.치.심.과. 투.쟁.하.고. 있.는. 이.들.의. 일.이.다.


수치심과 투쟁한다는 것은 거울 속의 자기 모습과 싸운다는 것이다. 또는 자신의 싸이월드 일기장과 갈등한다는 것이다. 또는 자기의 셀카 앨범 속에서 번민한다는 것이다. 가장 투쟁하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것은... 이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야! 이것은, 자랑스러운 나의 역사라규! 사람들에게 더 보여줄 거라규. 그럼으로써 더는 부끄럽지 않은 내 자신의 당당함을 증명하겠다규!"


결벽증이 노출증으로 바뀌게 되는 정확한 이유다. 너무나 수치스럽기에 그 수치심을 이기고 싶어서 억지로 자기를 더 수치스러운 장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혹한 폭력이다.


그냥 고요하게 거울을 보면 된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감상이 말이 되어 나오게 하면 된다.


"찐따 자식......"


그러면 웃음이 바로 찾아온다.


우.리.는.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아는가?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이 현상을 가장 위대한 인간의 '자기초월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자기초월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확인할 때, 우리는 거울[양심]이라는 공간을 배운 것이며,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신성한 웃음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을. 배.운.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 중의 기회다. 모든 수치심은 반드시 이 배움의 기회로서의 '긍정적 수치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것이 그 어떤 교과서나 경전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다.


앞서 묘사한 것처럼, 공간은 늙지 않는다. 그러니 공간이 창조한 웃음으로 사는 인간도 늙지 않는다. 이것은 역설이다. 어른은 '늙은 인간'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늙지 않는 인간'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젊다는 방증이다. 아무리 생물학적 노화가 이루어져도,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난 존재처럼 생생한 젊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언제나 '존재의 청춘'일 수 있다. 꼰대는 어른인 척 어른놀이를 함으로써 어른이 되는 일을 봉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 존재의 청춘도 상실하게 된 이다. 그런 즉, 수치심과 투쟁하는 모든 이는 꼰대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수치심을 다정하게 받아주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투쟁하는 이는 더욱 꼰대다.


언제적 세일러 머큐리이고, 언제적 야가미 이오리인가? 그렇다고 최신의 유행을 따른 첨단의 영웅신화를 채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름만 바뀔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웅코스프레의 의상을 벗고서, 거울 앞에 서보는 일만이 중요하다. 창피한가? 좋다. 최소한 참피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게 참을 피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이미 참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참.된. 것.의. 임.무.는. 웃.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 웃을 일이 별로 없이 암울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한. 웃.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웃음이란 도무지 무슨 뜻인가?


"끝까지 너와 함께 가겠다."


우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만드는 이의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언약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자신을 향한 웃음이 피어날 때, 우리는 언약받은 것이다. 이 웃음이 끝까지 이 생에서 우리와 함께 갈 것이라고 약속해준 것이다. 이제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움직이고, 멈추며, 만나고 또 만나간다. 쑥스러운 것은, 자꾸 만나도 늘 새롭고 더 좋아서다. 너무 좋아 부끄러운 이것이 바로 수치심의 원형이다. 우리 자신의 삶이 이렇게도 좋을 수 있다니, 우리는 지금 똑바로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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