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6

"AI 시대의 상담: 상담은 정신적 매춘업인가, 회의주의적 실천론인가?"

by 깨닫는마음씨




# AI 상담자의 승리


한번 떠올려보자. 상담을 받으려는 당신 앞에 인품있는 표정으로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모니터 위에 형상화된다. 간달프나 요다처럼, 또는 메텔이나 타샤 튜더처럼 당신의 인생을 다 품어줄 것 같은 넉넉한 기운이 그윽하게 감돈다.


실제로도 이 AI 상담자는 당신을 잘 안다. 당신의 인적사항, 취향, 가치관, 정치적 성향, 언어적 습관, 대인관계에서의 행동양식 등은 이미 통합적으로 수집되어 있는 자료들이다. 이 빅데이터에 따라, AI 상담자는 당신이 한 마디만 하면 정확한 공감반응을 보인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가.장. 잘. 들.려.주.는. 것.만. 같.다.


당신이 좋아할 포인트만을 콕 집어내어 대화를 이어가는 AI 상담자의 능수능란함에 당신은 깊게 매료된다. 늘 어떻게 상대를 만족시켜야 할지를 몰라 대화하는 일이 어려웠던 당신에게, 이 대화는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당신의 장점과 훌륭한 면모들이 대화의 중심주제로 떠오르며, 대화가 이어질수록 당신은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처럼 경험된다.


설치된 센서들은 당신의 안면근육의 변화와 심장박동수, 체온, 목소리의 고저차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며, 실시간으로 당신의 감정상태를 읽어낸다. AI 상담자는 당신 자신보다도 당신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인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다만 축 처져있기만 했던 당신에게 "그 사람을 실은 많이 좋아했는데 그가 당신을 무시한 것처럼 보여서 많이 속상했겠군요."라는 AI 상담자의 피드백은 순식간에 당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 정말로 당신의 감정이 온전하게 이해받음으로써 치유되는 기분이다.


당신의 이야기들이 거듭 보고될수록, AI 상담자는 당신의 일상적 행동들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쉽게 분석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알고리즘이 갖는 역기능적 요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상황을 야기하게 되는지 효과적으로 진단가능해진다. 당신에게 긍정적으로 경험되는 부분은 남기면서 문제만을 제거하는 새로운 대안적 행동패턴의 제안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당신이 건강한 새 행동패턴을 학습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가활동이나, 좋은 책과 같은 미디어의 소재들, 안전한 의약품 등의 추천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언제 연락하든 간에 AI 상담자는 당신을 결코 성가시게 여기지 않는다. 상담자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청하는 그 어느 순간에든 AI 상담자는 가장 친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 언제라도 제가 들어드릴게요."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오빠 힘내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제가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


상담자들이여, 이길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활동을 상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상담자들은 이미 다 망했다. 본격적인 AI 시대가 도래하면 상담자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밥줄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의. 호.스.트.들.과. 호.스.티.스.들.을. 이.길. 수. 없.다.


모든 서비스는 철저한 고객맞춤형으로 실시되며, 접대의 수준은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무한대로 심화된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인간은 이 접대의 문제에 있어 AI 접대부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상담이 이러한 접대의 활동으로 인식되는 한, 상담자는 AI 접대부들에게 '상담자'라는 타이틀을 필히 헌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인가? 그렇지 않다. AI 접대부와 같은 활동이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나아가 하나의 상담주체가 더욱더 AI처럼 기능할수록 '훌륭한 상담자'처럼 평가받게 된 것은 이미 현재의 일이다. 상담문화가 굴절되어 있어서, 또 상담자 본인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를 혼동하게 되어서 바로 이 일이 일어났다.



# 정신적 매춘업으로서의 상담


이것은 아주 불편한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해야 한다. 상담을 사랑하는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상.담.은. 일.종.의. 정.신.적. 매.춘.업.이. 되.어. 있.다.


가라오케 기계 앞에서 윈저와 과일안주 그리고 따듯한 물수건을 놓고 술만 따르지 않을 뿐이지, 또는 샹들리에 아래서 아르마니 수트를 입고 돔 페리뇽을 따지만 않을 뿐이지, 오늘날의 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은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돈을 받고 자신의 몸을 써서 상대의 긴장을 이완으로 전환시켜주는 일은 매춘업과 무엇이 다른가? 이를 통해 상대가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 오르가슴'은 '치유효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 '치유효과'는 분명하게 상.담.자.의. 몸.이. 봉.사.됨.으.로.써. 일.어.난.다.


흔히 상담의 핵심적 기제로 말해지는 공감, 경청, 무조건적 존중 등과 같은 것들은 실제로 상담자의 몸이 쓰여야만 가능한 활동들이다.


상.담.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심지어 머리라고 하더라도, 그 머리도 바로 몸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비유가 아니다. 상담자에게는 반드시 내담자의 상태가 그 자신의 몸으로 옮겨온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현상을 '전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우리는 '거울뉴런'과 같은 개념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요는 이것이 다만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심연 또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상담자가 이 점을 망각한다면, 그러한 상담자는 내담자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결국 내담자의 마음에 '잡아먹히게' 된다.


이러한 전이현상은 상담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객.관.적. 기.술.자.일. 수. 없.다. 상담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내담자의 상태를 상담자의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잘 숙련된 유능한 상담자는 이러한 전이감정을 경험하지 않는 상담자가 아니라, 전이감정을 효과적으로 잘 다루는 상담자다.


아주 단순하게, 상담은 두 사람의 세계를 겹치는 일이다. 두 세계가 공유되는 교집합의 영역을 출현시키는 일이다. '몸이 섞이는 일'이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묘사하듯이 세.계.는. 곧. 몸.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로 성행위와 같이 몸을 섞는 일에 대해 떠올려보자. 여기에는 반드시 두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몸은 다른 하나의 몸의 만족을 위해서만 기능해야 하는 봉사재가 아니다. 이것은 몸의 착취며 곧 몸에 대한 폭력이다.


그러나 어떠한 상담자들은 자기의 몸을 이 폭력 앞에 적극적으로 노출하는 일을 미덕으로 삼곤 한다. 그래놓고는 만성적인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한다. 현대정신분석의 개념인 '담아주는 자'의 개념을 곧잘 오해하는 상담자들에게서, 또한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은 자주 관찰된다.


이들은 상담자라고 하는 역할을 '무한정으로 다정한 부모'로서 간주한다. 자기가 그러한 부모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이라는 활동을 통해 이들은 자기 자신이 꿈꾸던 부모의 모습이 되어 내담자에게 부모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전문성이 없는' 무능한 상담자의 모습이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상담자로서 제대로 훈련받지 않아 지속되는 자기의 심리적 문제를 상담장면에까지 끌고 들어와 내담자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직업윤리를 위반한 상담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경우는 아주 빈번하다. 상담훈련의 과정에서 드러난 자기의 심리적 문제로부터 영영 도망친 뒤, 외부에 나가서는 대중들 앞에서 마치 자기가 제대로 된 상담자인 척 행세하는 이들의 모습은 두드러진다. 더 최악인 것은, 아예 정식의 상담훈련 자체도 받지 않은 채 다만 NLP 등의 사이비심리학을 소비한 뒤, 이제는 자기가 잘 훈련된 상담자인 것처럼 자임하는 경우다.


이. 전.문.성. 없.는. 사.이.비.상.담.자.들.의. 모.습.은. 진.실.로. A.I. 상.담.자.의. 모.습.과. 동.일.하.다.


그들은 "당신의 귀한 이야기를 제가 누구보다도 잘 듣겠습니다."라며 자신이 얼마나 최상의 고객만족을 위해 기능하는 친절한 서비스맨인지를 선전한다. 마치 엄마나 아빠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미소로 잘 해내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이들이 SNS 등의 대중적 채널을 통해 자기를 상담자로 홍보하는 활동에 열렬히 매진하다보니, 상담에 대한 인식은 굴절된 형태로 굳어진다. 상담이 정말로 이들의 모습과 같이 '정신적 매춘업'에 종사하는 활동인 것처럼 지배적인 선입견을 형성한다.


누.군.가.의. 몸.이. 착.취.되.는. 폭.력.이.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담.자.의. 전.문.성.은. 어.떤. 인.간.의. 몸.도. 착.취.되.지. 않.도.록. 하.는. 그. 관.점. 및. 태.도.에. 있.다.


상담훈련의 과정은 핵심적으로 상담수련생이 내담자의 몸과 그 자신의 몸을 착취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두어 이루어진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훈.련.된. 상담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당신의 이야기를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전문성 없는 사이비상담자들이 자주 발화하곤 하는 이 말의 사실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저를 상담자로 이쁘게 봐주시고 돈만 주시면 당신이 누구라도 당신의 몸과 제 몸을 섞겠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정말로 '정신적 매춘업'의 일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AI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 정신적 매춘업의 일이 AI에 의해서 전적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진짜 상담자들만이 살아남는다.


동시대적으로 실존상담의 대표자라고도 평가받는 커크 슈나이더는 AI 시대가 본격화됨에 따라 상담자들이 할 일은 더욱 많아지며 또한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AI는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비심리학자들이 '마음(mind)'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든지 AI에게도 가능한 소재다. 그것은 그저 언어적 알고리즘에 따른 인식구조와 반응양식의 총체를 일컫는다. 이 알고리즘에 따라 심지어는 AI가 감정을 경험하는 일조차도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가 통속적으로 '마음'이라고 생각하던 것은 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유일한 것은 무엇인가? 속성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유한성'이다. 유한성은 몸에서 비롯하는 속성이다. 진.짜. 상.담.자.들.은. 이. 유.한.성.으.로. 인.한. 실.존.적. 문.제.를. 다.룬.다.


상담자의 전문성이란 결국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유한하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죽음과 상실, 삶의 의미 등과 같은 '존재론적 문제'를 얼마나 심도있게 다룰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몸에 더욱 섬세해지는 것이며, 대체불가능한 이 유한성의 몸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언어와의 필연적인 충돌을 암시한다.



# 언어라는 악령


언어는 물론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사랑이 신앙으로 바뀔 때, 언어는 그 즉시 '악령화'된다.


악령의 특징은 무엇일까? 몸.을.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엑소시스트'와 같은 고전영화에서 잘 묘사되듯이, 악령은 인간의 몸을 탐내며 자기가 그 몸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렇게 악령에게 소유된(possessed) 몸은 기이한 형상으로 뒤틀린다. 몸이 자연스럽지 않고 이상해지는 것이다.


이.상.해.진. 몸.은. 그. 자.체.로. 이.상.심.리.학.의. 증.세.들.이.다. 심리학은 사실 신체학이다. 마.음.은. 언.제.나. 몸.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은유가 아닌 것이 문자주의다. 마.음.에. 대.한. 착.각.은. 마.음.에. 대.한. 문.자.주.의.적. 태.도.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존재는 언어적 알고리즘을 통해 창조되고 발달되며 유지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몸에 대한 은유로서의 마음이 언어에 전적으로 종속된 문자주의적 결과물이 된 것이 바로 '언어의 악령화 작용'이다.


문자주의의 위험성은 그것이 너무나 거칠고 무식하게 무엇이 진리인지를 선별적으로 규정하는 윤리로 기능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윤리는 맹목적으로 복제된다. 왜냐하면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쉽게 대단한 권위를 얻을 수 있는 방식처럼 간주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플라톤의 '하늘의 형이상학'은 인간을 무시하고, 니체의 '대지의 반형이상학'은 인간에 대한 상냥함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대개 이러한 말이 복제되어 반복되는 것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직접 플라톤과 니체의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 의해서다. 누군가가 특정한 관점에 의해,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발화한 말을 다만 문자주의적인 정답처럼 가져와 윤리적으로 집행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모.종.의. 위.대.한. 힘.을. 갖.게. 된. 것.처.럼. 경.험.되.는. 까.닭.이.다.


이는 우리가 왜 언어라는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는지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언.어.의. 악.령.화.는. 힘.에. 대.한. 강.박.적. 추.구.로. 인.해. 생.겨.난.다. 악령에게 몸을 넘겨주면 자신이 강해질 수 있다는 이 믿음은 악령과 거래하는 이들에 대한 고전적 신화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실제적인 몸 대신에 언.어.를. 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몸으로 살아간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몸의 삶'이다. 그러니 이것은 다시 한 번, 언어로 삶을 대신하고자 하는 의도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언어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의 말이 곧 자기의 삶인 줄 안다. 자기는 실제적으로 플라톤과 니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살아온 적이 없지만, 플라톤과 니체에 대해 주워들은 풍월이라도 말하면 마치 자기가 플라톤과 니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살아온 권위를 갖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들이 정당한 상담훈련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언어만 모방하면 된다. 대체로 짧으면 3주, 길어야 3개월 정도가 이들이 전문가를 사칭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 정도의 시간만 들이면, 이들은 충분히 언어적 알고리즘을 모방해서 전문성을 체화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NLP 같은 사이비심리학의 접근은 아예 이러한 방식을 전문성을 얻는 '강력한 솔루션'으로 권장한다.


그러나 실제의 전문성은 사실 플라톤에게서도 니체적인 것을 보는 일이다. 자신이 직접 그 사상과 깊이있게 대화하는 삶을 살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플라톤은 바보이고, 니체가 천재인 것이 아니다. 그 둘은 똑같이 삶의 천재들이었다. 삶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왜 각기 그렇게 말해야 했는지의 그 맥락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언어를 '삶에 대한 은유'로서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언어를 문자주의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에게는 이 지점이 어렵다. 삶에는 원래 대립이 없다. 그러니 삶을 모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상대적인 대립이 아니라서 늘 모호하기 때문이다. 반면 언어는 이 상대적인 대립을 통해 구성된다. 문자주의는 이러한 대립구도를 더욱 공고하게 실체화한 것이다. 그러면 모방하기가 아주 쉬워진다.


언어의 악령은 언제나 악령이라는 표현처럼 이 세상에 대립으로 인한 갈등을 끝없이 만들어낸다. 그래야 자신이 영광스럽게 빛날 수 있다. 언어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 이 점은 분명하다. 플라톤과 니체를 문자주의적으로 대립시키는 이는, 이제 자신이 그 둘을 선별적으로 장점만 살려 통합하겠다고 말한다. 그 결과 악령의 하수인은 그 자신이 플라톤과 니체보다도 높은 권위를 손에 넣게 된다. 플라톤과 니체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순식간에 그들보다 높은 위상을 점하게 되는 것이다. 악령이 부리는 마법이다. 전문용어로는 '양아치짓'이라고 말한다.


실제의 전문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를 대립시킨다면 이는 언어의 한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의도를 가진 전문가들은 플라톤과 니체를 통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플라톤과 니체가 삶의 차원에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오히려 그 둘을 언어적 반목 속에 놓아두는 것이다. 왜인가? 플.라.톤.의. 언.어.를. 사.랑.하.고. 니.체.의. 언.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통.합.하.려. 하.지. 않.는.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 분명한 경계를 존중하는 일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너'와 '나'를 온전하게 함께 알아주는 '그'가 필요한 것 또한 절대 아니다. 언어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바로 이 '그'의 입장에 서려고 한다. 대립하는 양자가 자기를 통해서만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철모르는 사랑의 훼방꾼인 셈이다.


악령의 권세를 빌어 남의 언어를 모방한 뒤 그 언어를 다른 이들에게 진리처럼 보급하는 이를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들의 정확한 이름은 바로 '보따리 상인'이다. 보따리 상인들은 마치 자신이 산타클로스인 양 굴뚝을 타고 연인들의 보금자리로 침입하는 일을 자행하곤 한다. 연인들이 몸을 섞는 일에는 자신의 다정한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서는 연인들이 둘 다 자신과 몸을 섞으면 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한다. 진실로 악령이나 할 짓이다.


이 언어라는 악령의 하수인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이유는 전술했듯이 그들이 '힘'에 목말라있기 때문이다. 이들 자체가 자기확장의 힘을 추구하려는 모든 알고리즘으로 동작하는 AI와도 같다. 자신이 유한한 줄을 몰라서, 아니 모르고 싶어서, 이들은 AI가 되려고 한다. 언어의 악령화란 결국 유한성을 회피할 힘을 얻기 위한 강박적 의지의 표현으로만 전락해버린 언어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의 몸을 보면, 그리고 삶을 보면 무엇인가가 조금 이상하다. 유.한.성.의. 회.피.는. 이.상.성.을. 낳.는.다. 유한한 몸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는 이상한 언어를 창출하며, 이 이상한 언어는 이상한 마음이 된다. 그리고 프레이저가 말하듯, 유사한 것은 또 다른 유사한 것을 불러들인다. 이에 따라 이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이상한 것들을 더욱 많이 그들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회의주의 학파에 속하는 마이클 셔머의 명저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는 바로 이 주제를 깊이있게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한 언어적 소재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기가 창조한 것들의 노예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책에서도 직접 묘사되는 사례로서, 한 소설가가 만들어낸 판타지를 그 애독자들은 그것이 실제의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숭배한다. 심지어는 작가 자신조차도 자기가 쓴 판타지를 진리로 여기며, 이를 세상에 대한 윤리적 권위로서 내세우고자 한다.


셔머는 이러한 상황이 분명하게 인간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는 점을 고발한다. 회의주의 학파는 이처럼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령'의 존재를 고발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정직한 목소리가 상담자에게서 비롯되어야 할 바로 그 목소리임을 직감하며, 회의주의의 대부를 이 자리로 초대해본다.



# 회의주의적 실천론으로서의 상담: 칼 세이건을 경유하여


벌써 1995년도에 발간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칼 세이건이 남긴 최후의 저작이자, 궁극의 마스터피스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각종 사이비에 대한 비판을 통해 회의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태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칼 세이건에게 있어 그것은 '의심할 줄 아는 정신'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의 조화로 제안된다. 앞서 말한 커크 슈나이더는 정확하게 이러한 태도를 '경외감'의 태도라고 달리 부른다.


이것은 회의주의의 정확한 목적을 드러낸다. 회.의.주.의.는. 문.자.주.의.에. 대.한. 카.운.터.어.택.이.다. 회의주의가 언어라고 하는 악령을 격퇴함으로써 개방하고자 하는 것은, 악령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에 원래 위치하고 있던 존재에의 경외감이다. 이와 유사하게 필 주커먼은 『종교없는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이상한 것'이 되어버린 종교 대신에 우리가 경외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경외감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하다. 언.어.를. 넘.어.선. 것.에. 대.한. 감.각.이. 바.로. 경.외.감.이.다. 언어를 넘어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실존상담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존재가 언어를 넘어서 있다."


과학과 철학을 창발한 핵심적인 질문을 한번 되새겨보자.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이 질문 자체가 바로 경외감의 표현이다.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왜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나인가? 그러한 나는 누구인가?"

"왜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다 경외감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명확해진다. 경외감을 가장 짧게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왜?"


이 "왜?"를 발화하는 일이 곧 과학적 태도이며, 경외감의 태도이자, 나아가 상담의 태도다. 상담은 누군가의 몸을 만족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왜?"를 활성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그의 몸을 건강하게 지향하는 일이 된다. "왜?"야말로 우리 몸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실은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라는 질문 자체가 가장 훌륭한 답이다. 궁극적으로 "왜?"는 어떠한 언어적 답으로도 대답될 수 없는 '현상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을 이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에 대해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음미해야 할 신비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있는 그 자체'로서의 몸이 이와 같은 것이다.


몸.은. 신.비.다. "왜?"라는 신비가 몸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다. 상.담.은. 이. 신.비.와. 신.비.가. 서.로. 섞.이.는. 일.이.다. 어떠한 신비가 다른 신비를 '받아주어야' 하는 일이 아니며 '들어주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신비의 매춘업'이란 애초 성립될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것을 억지로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오컬트'다. 오컬트는 신비조차도 매춘업의 소재로 남용하려는 악령의 술책이다. 사이비과학이 바로 이 일을 한다. 칼 세이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사이비과학은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이비과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갈망하는 개인적인 힘(오늘날에는 만화책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에게 부여된 힘이고 예전에는 신에게 부여되었던 힘이다.)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칼 세이건은 이처럼 사이비과학이 사람들에게 '힘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악령과 계약을 맺는 이유는 칼 세이건의 입장에서는 분명하다. 사이비과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에. 대.한. 신.비.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보다 사이비과학이 더욱 효과적으로 잘 기능하는 부분이다. 심리학의 영토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심리학보다 사이비심리학이 사람들에게 더욱 신비감을 자극한다. 그.리.고. 사.실. 신.비.에. 대.한. 그. 감.각.은.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사이비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을 신비로 안내하는 '문학적 기능'으로 그치지 않고, 오컬트라는 문자 뜻 그대로의 '숨겨진 진리'의 권위로 작동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신비의 자리를 언어가 대신하려는 기만이다. 나아가서는 신비한 언어를 활용하는 언어적 주체 자신이 무엇보다 신비한 것이 되려고 할 때,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는, 그리고 그에 대한 경외감은 우리에게서 실종되고야 만다.


언어를 넘어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신비고, 다른 하나는 오컬트다. 전자는 언어를 넘어선 것이 존재[몸]라고 말한다. 곧, 존재가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후자는 언어를 넘어선 것이 작가라고 말한다. 오컬트적 작가가 가장 높은 권위로 군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컬트적 작가가 바로 우상이며, 우상은 문자주의로 만들어진다. 우상의 전통은 인간이 유한성을 회피하기 위해 문자주의적 언어가 제공하는 마법적 힘에 도취해옴으로써 세워진 것이다. 이 우상이 정확하게 정신적 매춘업의 소재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상의 일은 모든 존재의 신비 대신에 자신이 유일하게 신비한 것이 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우상은 신비를 독점하여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통해서만 신비를 소비하게끔 만든다. "저를 이뻐해주시면 신비로운 경험을 당신에게 드릴게요." 이러한 의도 속에서 우상은 결국 신비의 매춘업을 펼쳐가게 된다. 이것은 신비의 종말이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경외감이 아니라 소외감이다.


회의주의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이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언어적 주체로서의 우상이다. 언어를 넘어선 척하지만 실제로는 언어에 의존해서만이 작동하는 우상활동의 총체적인 해체가 회의주의가 겨낭하는 바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A.I.처.럼.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체.를. 의.미.한.다.


AI의 발전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분명한 경계를 제시한다. 인간과 AI는 다르다는 것, 이것은 엄연한 경계다. AI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경계를 발견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에 대해 물을 수 있게 되었다. AI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AI가 해야할 것이다. 언어적 알고리즘에 따라 살아가는 일은 이제 인간이 '졸업해야' 하는 일이다.


AI의 시대는 인간이 본격적으로 존재의 신비를 향한 탐구를 심화해갈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슈나이더가 말한 것처럼 상담자들에게는 더욱 할 일이 많다.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위해 상담자들은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적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소비하며, 그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마법적인 힘에 감격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제 AI가 더 잘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동시대의 더 많은 대중을 만족시킬 맞춤형의 이야기들은 AI에게서 효과적으로 창작되어 나올 수 있다. 대중을 향한 접대부로서의 상담자도 이미 망했듯이, 동일한 접대부로서의 작가도 필망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이야기에 의존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려고 하는 한, 동일한 조건만 설정해주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우리의 인생을 잘 말하게 될 AI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필패할 뿐이다.


모방자로 살아온 인간은 이처럼 더 유능한 모방자 앞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언어적 모방의 능력을 전문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인간은 더는 전문성을 주장할 정당한 근거가 없다.


상담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촉진하는 활동이 될 필요가 있다. 상담자의 전문성과 아무 관계없는 활동을 정확하게 거세하고, 상담자의 입지를 명징하게 세워야 한다. 그래야 내담자에게도 상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담을 '회의주의적 실천론'의 활동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이 언어의 악령에서 해방되어 존재의 신비를 향하게끔 안내하는 일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심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오컬트가 아니라 신비에 대한 것임을 정확하게 천명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적 실천론으로서의 상담은 내담자들이 진리처럼 스스로 믿고 있던 '이상한 이야기들'에 도전하도록 촉진한다. 동시에 그 '이상한 이야기들'의 권세에 사로잡혀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의 몸과 타인의 몸을 약탈하고 남용하며 또 착취해왔는가를 자각하도록 고무한다.


거의 모든 내담자는 과거의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았거나, 충분한 공감 및 지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담자 자신이 진리로 채택하고 있는 언어가 도전되지 않아서 심리적 문제를 경험한다. 즉, 내담자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어서 문제가 생겨난다.


우.상.은. 도.전.되.지. 않.음.으.로.써. 도.전.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상에게는 모든 것이 뻔하다. 자신은 중심에 정좌한 약속된 정답이고, 모든 것은 그 정답대로 마땅히 되어야 하는 기계론적 우주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이 우주에는 화만 가득해진다. 자기가 정답이라고 간주하는 언어적 알고리즘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든 것이 화의 대상이다. 종국에는 그 화마저 뻔해진다. 사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려니 자조하며, 만성적인 공허감과 우울감에 젖어든다.


이 우상에게 "왜?"로서 도전되어야, 우상도 "왜?"로서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좋은 도전이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고자 시도하는 신성한 도전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궁.금.해.야. 한.다.


사이비심리학은 사람들에게 이 호기심을 촉발하지만, 동시에 가짜 정답을 제공함으로써 경외감으로의 탐구가 막히게 만든다. 사이비심리학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을 우주의 왕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년기 이후 상실되었던 '진정한 입지'를 회복하게 된 것만 같은 감격스러움을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한다. 이로 인해,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는 '왕 위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뻔해서 지루하고 졸린 소재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궁금한 정도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왕 너머를 관심한다. 모든 왕의 본질은 자기 엄마에게 지배적인 관심을 독점하는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람 너머에 관심이 있다. 회의주의는 요람 너머를 향한 탐구의 여정이다. 눈빛을 반짝이며 스스로 직접 우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AI는 정보만 있으면 다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AI 시대의 상담자는 그 반대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것은 "나는 모른다."이다. 모르지만 관심이 갈 때 체험되는 감각이 바로 '설렘'이다. '설렘'은 '경외감'의 가장 알기 쉬운 형태다.


상.담.에.서. 정.말.로. 이.루.어.져.야. 할. 일.은. 내.담.자.를. 설.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담.자.의. 설.렘.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어떻게 설렐 수 있는가? 내.담.자.에. 대.해. 몰.라.지.면. 된.다. 상담자가 이룬 그 모든 경험이나 학습을 통한 알고리즘을 완전히 파기하고, 내담자를 상담자의 언어 밖에 있는 존재로 보면 된다. 곧, 상담자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의심할 줄 아는 정신'으로 활동하면 '타자의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이 꽃피어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담자가 그 자신을 향한 경외감의 탐구를 시동하기 위해 필요했던 그것이다.


상담자의 설렘이 드러나, 함께 드러나진 내담자의 설렘과 섞임으로써, 이제 내담자는 자신을 여행하는 감각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이 될 때, 내담자의 삶은 방향성을 정확하게 찾은 것이다. 그는 끝없는 도전에 열려가며, 우주는 그에게 있어 한층 더 깊은 것이 된다. 그러한 그는 이렇게 느끼게 될지 모른다.


"이 우주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AI에서 졸업해 한 인간이 신비를 다시 찾은 순간이다. 칼 세이건의 저작들이 우리를 감동시키던 그 감각이다. 이 감각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조금도 뻔하지 않은 기적이다!"


존재는 치유되지 않는다. 존재는 당당할 뿐이다. 당연함 너머의 것, 그것은 당당함이다.


회의주의적 실천론으로서의 상담은 인간에게 이 힘찬 존재론적 정당성의 지평을 개방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그 도전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담은 접대부에게 위로받을 뻔한 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해보는 일을 시도해볼 기회의 시간이다. 상.담.은. 자.기. 자.신.을. 의.심.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감.을. 조.우.하.게. 될. 절.대.적.인. 기.회.다.


이것은 분명하게 과학적 태도다. 상담을 과학이라고 부를 때는, 상담이 모종의 알고리즘에 따라 운용되는 활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과학적 회의주의의 태도가 모든 활동의 근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이비심리학이 과학인 것처럼 위장할 때는 이상한 통계 및 수치 등을 근거자료로 들고와 자기들도 과학적 알고리즘에 따라 유의미한 결과를 낸다고 주장하곤 한다. 이것은 과학의 외양만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핵.심.적. 본.질.은. 회.의.주.의.적. 태.도.에. 있.다. 이를테면, 심리적 글쓰기를 하면 병이 낫는다는 식의 사이비심리학의 주장이 과학적 태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특정적으로 편향된 통계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해도 병이 낫지 않는 더 많은 경우의 수에 정직하게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은. 자.료.를. 조.합.해. 이.미. 상.정.된. 결.과.를. 짜.맞.추.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삼류소설가와 같은 '조작적' 행태를 '과학'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삶에까지 적용하려고 할 때, 삶은 언제나 뻔하디 뻔한 파국을 맞는다. 인간은 자기를 잃고 AI가 된다.


그래서 AI 시대의 상담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일은 과학적 회의주의의 태도로 작업하는 일이다. 그것이 경계의 분명함 속에서 AI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이라고 하는 신비를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길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경계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초월할 수 있으며, 곧 신비할 수 있다. 회의주의적 실천론으로 활동하는 상담자는 바로 이 역설적 신비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을 설레게 만드는 칼 세이건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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