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7

"고인물의 우울: 우울증에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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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의 생태


고.인. 것.은. 우.울.해.진.다.


우울이라는 것은 흐름이 막혀 적체된 현상이다. 우울을 늪으로 비유하는 일은 언제나 정확하고 또 적절하다. '고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울을 함축한다.


모든 분야에서 '고인물'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바로 '아는 척'이다. 그리고 아.는. 척.은. 아.닌. 척.이.다. 고인물은 아는 척함으로써 무엇을 아닌 척하려 하는가? 자신이 지금 우울한 상태가 '아닌 척'한다. 아는 척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괜찮은 것만 같다. 사람들이 자기를 필요로 해주며, 이에 따라 자기효능감이 경험된다.


그래서 모든 고인물은 결국 스승이 되려고 한다. 자기의 인생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에 남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문제해결의 과정이 되며, 이것은 도파민의 쾌락을 효율좋게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오늘날에는 도처에 이 스.승.이.라.는. 늪.이 산재한다. 모든 것이 게임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게임의 특징은 무엇인가? 메.뉴.얼.이. 없.으.면.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점.이.다.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게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먼저 철저하게 숙지해야 한다. 오늘날의 유저는 자유롭게 게임을 즐기기보다는, 흡사 모범적인 정답을 모방해서 그것을 과제처럼 실천하는 자동기계와도 같다.


스승은 바로 이러한 기제를 촉진한다. 해당 분야에 대한 '놀라운 정보'를 갖고 있는 자신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 분야에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을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점점 스승에게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늪에 빠지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늪은 빠져든 모든 것을 늪의 형상으로 바꾸어놓는다. 스승에 빠진 이는 또 다른 스승으로서 복제된다. 고인 것이 또 다른 고인 것을 출현시킨다. 우울은 그 영토를 널리 확장해간다. 우울의 제국주의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울한 상태를 더욱 가속화하는 이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다. 또 다시 '빠져들' 소재를 찾아 늪의 생태를 강화시켜만 간다. 이것은 분명 '불안의 문제'와 연관된다.



# 질서부여 놀이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심리학을 배우는 한 공동체에 선생의 역할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어떠한 학생은 이 두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 A쌤은 강의를 잘하시고요. B쌤은 상담을 잘하세요."


그러나 사실은 A선생이 강의와 상담을 둘 다 압도적으로 잘한다. 그럼에도 학생은 A선생은 강의를 잘하고 상담을 못하며, B선생은 강의를 못하는 대신 상담은 최고라고 믿고 싶어한다.


이.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규정의 폭력'이다. 자기의 생각으로 사실을 부정하는 일은 언제나 이 폭력을 낳는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우리가 '질서부여 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균형있게 장단점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억지로' 형상화하려는 놀이다. 즉, 자기가 세상에 임의적인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창조주처럼 행세하고 싶어하는 놀이다.


이 질서부여의 놀이를 시도하는 이는 자.기.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이.러.한. 일.을. 한.다. 창조주가 되려 하는 이는 자기를 가장 하찮게 경험하고 있는 이다.


그는 잘난 것을 임의로 하대하고, 못난 것을 임의로 상격함으로써, 자신에게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기를 꿈꾼다. 이 '마법의 원리'에 따르면 못난 자신은 하늘로 올라갈 일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질서부여 놀이의 대표적인 형태는 역사변증법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저마다의 온전한 역할을 갖고 있고, 놀라운 장점들을 담지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에 대한 열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내 '대극의 합일' '연금술적 변화' '마음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환상적인 개념들을 주장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이러한 개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쪼개놓은 뒤, 쪼개진 양쪽에 자신이 임의적인 강약의 특성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둘이 합쳐져야 온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게임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일과도 같다.


이 작업으로 인해 이제 약한 것에 대한, 불쌍한 것에 대한, 병적인 것에 대한 예찬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강의는 조금 못하지만 상담은 천재'라는 식의 날.조.된. 가.치.평.가.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하.나.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한.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가 '질서부여 놀이'의 규칙에 따라 잘난 것에서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투지를 불태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이 정직한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서 경험되는 '질투'는 질투의 대상이 총체적으로 잘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의 단점을 억지로 부여하려고 해도 우리의 질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말로 이것은 실증적이다.


그만큼 우리의 총체적인 열등감이 질서부여 놀이를 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총체적으로 열등해졌는가?


불.안.한.데. 불.안.하.지. 않.은.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불안이 아닌 척하는 방법은 불안을 아는 척하는 것이다. 불안을 아는 척하는 이들은 누군가가 불안하냐고 물어볼 때 이렇게 대답한다.


"응. 불안하지... 인정해. 불안해. 불안한 그 마음도 지켜보고 있어. 이 불안이 또 어떠한 온전함을 알려줄지를 한번 만나보려고."


또는 이렇게도 말한다.


"돈이 없어서 불안하지. 돈만 있으면 불안하지 않을텐데. 그래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어."


지금 이러한 말들도 질서부여 놀이의 한 방식이다. 이는 우리가 질서부여 놀이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어.떻.게.든. 불.안.하.니.까. 그. 불.안.을. 안.정.되.게. 만.들. 억.지.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게임의 감각으로 변질되는 이유다. 불안에 대한 통제의 의도가 더 많은 복잡한 게임들을 만들어내고, 그 게임들을 성공적으로 공략함에 따라 불안의 문제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주술이다. 가상현실을 지배하면 실제의 현실도 지배될 것이라고 믿는 주술적 의도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질서부여 놀이로서의 '주술게임' 중 가장 원초적이며 강력한 게임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많은 이가 더욱 적극적으로 '빠지고' 싶어하는 게임이다. 프로이트가 완승가능한 선취점을 올리며 이 게임은 시작된다.



# 섹스와 권위 그리고 우울의 역학


"섹스를 하지 못해 우울하다."


이 말은 어떻게 들리는가?


"섹스의 문제는 권위의 문제다."


이 말은 또 어떻게 들리는가?


이러한 말들이 표면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방식보다 더 깊이있게 이해될 수 있도록 우리는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고인물'이 분명 권위의 문제를 암시한다는 점을 우리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묘사될 수 있는 '스승'이라는 개념은 '질서부여의 권위를 가진 자'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이 개인의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렇다면 명확하다.


불.안.한. 이.가. 권.위.에. 집.착.한.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텅빈 것처럼 생각되는 이가, 자기가 게임을 하며 보내온 시간에 대한 권위를 어떻게든 인정받고자 한다. 그.것.마.저. 없.으.면. 그.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로 인한 폭발적인 긴장을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러니 권위를 얻어야 한다. 여기에서 권.위.는. 긴.장.에. 대.한. 이.완.재.다.


여유로운 척하지만 실은 긴장으로 가득찬 이들이 이완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의지는 맹렬하다. 이.것.은. 정.확.하.게. 섹.스.에. 대.한. 의.지.와. 동.일.하.다. 생물학적인 본능과는 다르다. 이것은 그야말로 인위적인 의지다. '성욕'이 아니라 '성의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성의지'가 곧 '권위에 대한 의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불안한 이에게 강렬한 성의지가 생겨난다. 불안으로 인한 긴장을 빨리 해소해서 이완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성행위를 이룰 수 있는 실제적 대상이 없을 경우, 이 이완에 대한 추구는 좌절된다. 그리고 좌.절.된. 것.은. 추.상.화.된.다. 이로 인해 섹스는 이제 추상적인 정신영역에서 유사섹스의 형상을 갖게 된다.


이. 유.사.섹.스.가. 바.로. 변.증.법.이.다.


유사섹스의 소비자들은 특정한 관계 내지 집단 속으로 들어가, 종국에는 '통합으로 인한 이완'이 기대되는 갈등상황을 펼쳐내곤 한다. 강렬하게 '주고 받는' 섹스와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연금술의 용광로' 속에서 이 유사섹스의 소비자들이 말하는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다.


"나는 여기에서 중요하게 대접받고 있지 못해요. 여기에는 독재가 가득해요. 민주주의가 훼손되었어요. 이곳에는 모두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게 만족시켜줄 진정한 왕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아주 단순하다. 자기가 바로 그 왕이라는 것이다. 모두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게' 만족시켜줄 진정한 섹스머신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의지는 추상적인 영역으로 진입해 결국 권위에 대한 의지로 표출된다. 자기가 해당의 관계 및 집단 속에서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는 권위를 확보하려는 행위를 펼쳐낸다. 왜 그런가?


자.기.가. 왕.이. 되.어.야. 더. 많.은. 이.와. 섹.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이들에게 권위라는 것은 언제든 원하는 대로 섹스할 수 있는 현실을 개방할 프리티켓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있어 권위는 불안을 임의로 해소할 수 있을 것처럼 기대되는 마법적인 기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섹스에 대한 과도한 의지, 곧 섹스중독은 권위중독의 문제와도 같다. '강력한 권위를 얻는 법' 등을 주장하는 자기계발강사들은 실은 '강력한 섹스를 얻는 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이 현재 효과적으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경험하고 있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다. 이것은 역으로도 성립된다. 자기가 활동하는 분야에서 충분한 권위를 얻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섹스에 중독된다. 무수한 사이비가 성도착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정확하게 이와 같은 이유다.


결국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되어 생겨나는 불안에 대한 두 해결책이 섹스 또는 권위인 셈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선되는 것은 섹스다. 가상현실은 실제의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이 아무리 큰 권위를 얻어도 섹스를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늘 욕구불만에 시달리게 된다. 이. 세.상.에. 자.신.이. 안.정.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영.토.가. 없.는. 것.처.럼. 경.험.된.다. 불안이 해소되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울해진다. 늪이 된다. 표현 그대로, 고.여.서. 썩.는.다. 사리라도 생기면 다행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섹스를 하지 못해 우울한 것이라기보다는, 섹스를 통해 긴장을 이완시키지 못해 우울한 것이다. 이처럼 이들에게 있어 섹스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도구적 행위다. 불안을 안정되게 할 질서를 창출하려는 게임과 같은 기제다.


쿨하고 모던한 표정으로 "섹스는 게임이다."라고 하는 이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눈치채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유머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불안하기에 권위를 얻으려고 심리학이라는 소재를 남용하면서, "심리학이 좋아서 한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미소에 담긴 경직을 알아보는 일 또한 소소한 삶의 재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시.대.의. 우.울.함.에.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483952명의 이성과 섹스하지 못해 우울함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정말로 위로가 필요한가? 더 쉽게는, 자신이 이완될 만큼의 충분한 마약을 공급받지 못해 우울해진 이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인가? 자신이 이 우주의 신으로서의 권위를 얻지 못해 우울감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로 상냥한 위로인가?


"어쩜, 483952명과 섹스하지 못해 얼마나 아팠을까. ㅠㅠ"

"2천 톤의 필로폰과 코카인을 집에 보유하지 못해서, 그 아이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인석아, 네가 옳아. 네가 우주의 신이라구! ㅜㅜ 너의 이야기를 해! 이제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 상태들이 정신병인가, 아니면 이 상태들을 위로하려는 일이 정신병인가?


그리고 여기에 '길'은 있는가?



# 유한성의 활로: 우울증에 필요한 것은 길이다


우리는 이제 말할 필요가 있다.


우.울.증.에.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활.로.다. 곧 '길'이다.


물길이 막혀서 그곳은 늪이 된다. 동일하게, 진로를 지속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는 이들이 스승이 된다. 모여서 서로를 위로할 섹스파티나 열어댄다. 본질적으로는 자위의 축제다. 영화 미드소마만큼이나 기괴하다. 그러나 기괴한 그 자리에도 언제나 길은 있다. 식물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기괴한 형상으로 자라난 한 식물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식물이 태양빛이 드는 길을 희구한 증거다.


우울증에 필요한 것이 정말로 길이라는 이 말을 진짜 상담자들은 바로 알아 듣는다. 수백 회기를 거듭하며 이 세상에서 전할 수 있는 그 모든 위로를 다했어도 늘 동일한 상태이던 내담자에게서, 문득 길이 희미하게나마 비친 결정적인 순간이 생겨났을 때 그의 눈빛이 영롱하게 반짝이며 모든 활력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장면들을 상담자들은 아주 많이 목격해왔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울할 때 경험되는 무기력의 상태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힘을 뻗어야 할지를 몰라 그 힘이 스스로를 누르고 있는 상태다. 나아가야 할 진로만 분명해지면 힘은 언제든 효과적으로 가용된다.


우울이 이처럼 무력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우울에 대응하는 데 있어 더 큰 힘을 얻으려 하는 의도는 오히려 잉여적인 의도가 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진다. 더 큰 힘을 얻으려 했던 것은 우리가 게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더 많은 현질을 해서 더 좋은 캐릭터의 상태를 만들어내면 더는 우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게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울해진 것이다.


근본적으로 섹스와 권위라고 하는 이 게임에 대한 의지가 우리를 우울의 상태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게끔 한다.


의지(意志)는 의지(依支)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의지(意志)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의지(依支)하게 된다. 자신을 잃고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우울을 '자신을 잃은 현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또한 유용한 정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회복한다면 우울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길.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실존상담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은 시간 속에 있다."


우리가 시간을 살 때, 우리는 자신을 찾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산다는 말은 곧 한계를 산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찾.는.다.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


이것이 유한성의 의미다.


우리는 슈퍼히어로처럼 우리 안에 잠재된 마법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양 '진정한 내 자신'을 말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유한한 내 자신'으로 살 필요가 있다.


심리학의 전통 속에서 실존심리학은 늘 사이비심리학에 대한 '성가신 훼방꾼'의 입장처럼 활동해왔다. 사이비심리학이 이야기의 놀라운 힘과 무의식의 강력한 마법 등을 주장할 때, 실존심리학은 이렇게 말해왔다.


"응, 아님. 님 죽음. ㅇㅇ 님이 그렇게 거짓말해도 불안 안없어짐. 더 불안해짐. ㅇㅇ"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불안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성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불.안.은. 생.명.조.건.이.다. 또는 불.안.은. 존.재.조.건.이.다.


우리가 존재조건을 부정하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할 것처럼 경험된다. 그러면 이처럼 존재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존.재.하.고. 싶.어.진.다. 그럼으로써 표현 그대로 더. 불.안.해.지.는. 것.이.다.


불안이 '아닌 척'하며, 이 자리에서 불안에 대한 답을 '아는 척'할 때 이 일은 심화된다. 답이 있는 것 같은 '이 자리'에서는 영영 떠나지 못하게 됨으로써, 불안해진 만큼 더 존재하고자 하는 생의 움직임만이 갈 곳을 잃은 채 누적되기만 한다. '이 자리'에 방출되지 못한 압력이 가해진다. 블랙홀과 같은 늪이 되어 고여간다. 이것이 우울이다.


그러니 우울한 이가 '살아날 길' 즉 활로는 바로 불안에 있다. 그 자신의 유한성에 있다.


유한성에 대한 심대한 착각은, 유한성을 무력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유한성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다는 것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유.한.성.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신 쿠로사와 최강전설』에서는 통의 비유로 이 유한성에 대한 감각이 잘 묘사된다. 한 승려가 수행의 일환으로 땅에 파묻은 통 안에 들어가 일주일간 생활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통. 안.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음.을. 역.설.한.다. 손과 발을 한계 속에서 기괴하게 움직이는 형태로 그것은 가능했다. 승려는 이것을 '통 안에서 춤추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나아가서는 승려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이미 통 안에 들어가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는 시공간의 제약, 제도의 제약, 물리적 제약 등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든. 제.약.을. 활.용.하.여. 춤.출.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유한성은 자유가 드러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자.유.란. 유.한.성. 속.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감수성은 동시에 경계를 존중하는 감수성이다. 정말로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는 이는, 슈퍼히어로처럼 "당당하게 통을 박살내고 무한한 당신의 이야기를 실현하세요!"라며 통을 부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망상에 불과하다. 사.실.적.인. 자.유.는. 사.실.에. 대.한. 존.중.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종교적 선각자들은 누구나 다 리얼리스트들이었다. 체 게바라는 "리얼리스트만이 꿈꿀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떠한 이가 리얼리스트인가?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활동하는 이다. 그는 자신을 과소하지도 또 과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이 아주 작은 형태라도 반드시 그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음을 안다. 자유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통해 반드시 실현된다는 그 사실을 신뢰한다.


"불안은 자유라는 이름의 현기증이다."라고 말한 키르케고르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불안과 자유를 직접적으로 연결짓는 표현이다. 우리가 불안하다는 것은 곧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기증처럼 경험되는 이유는 우리가 길을 잃어서다.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그 방향성을 잃어서다.


우.리.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자유는 모든 것을 내키는 대로 소비할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불감증의 이유다. 우울은 일종의 불감증이다. 불감해서 욕구불만이 되는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다.만. 자.신.으.로. 살. 자.유.다. 우리가 태어나서 좋다고 실감할 때는 어떤 것을 무한정으로 소비하는 자유를 경험할 때가 아니라, 제약 속에서도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경험할 때다. 왜 이것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가?


이.것.은. 검.증.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한계 속에서도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제 잃을 수 없는 자유다. 시험에서 문제를 풀어낸 이는 그 문제를 풀어낼 힘이 자신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자유가 정말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이 '검증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운 자신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다.


유한성으로 말미암은 삶의 사건들은 우리의 자유를 영원한 우리의 것으로서 검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재들이다. 이러한 '삶의 탐구'를 이루는 활동을 우리는 상담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상담은 위로를 제공하는 활동이나, 게임의 메뉴얼처럼 무슨 마음공식을 학습하는 활동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의 길을 발견하고자 하는 활동인 것이다.


다시금 긴장과 이완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불안이 우리를 긴장시키니,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우리는 우리를 이완시켜줄 섹스와 권위가 필요하다는 '정답'을 이제 기각해보자. 우.울.의. 증.세.에.는. 반.드.시. 그. 증.세.를. 야.기.하.는. 정.답.이.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정.답.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우.울.해.진. 것.이.다.


정답이 있다면, 문제는 그 정답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된다. 그러니 우울은 언제나 자책의 형태를 띤 자신에 대한 분노를 내포한다. 이것도 간명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상.태.가. 우.울.이.다. 고명하고 위대하신 인생메뉴얼을 효과적으로 모방하지 못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셈이다. 이것은 아주 많이 이상하다.


여기에서 유한성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어떠한 일이 생겨날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정.답.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아주 분명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정답을 알고 있다. 5000억 원만 있으면 된다. 정답은 분명하다. 다만 5000억 원을 벌 능력이 우리에게 없을 뿐이다.


유한성은 우리에게 있어 이 정답의 실천방안을 상쾌하게 기각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면 무슨 일이 생겨나는가? 오, 이것은 아름답다.


우.리.에.게.서. 긴.장.이. 사.라.진.다.


긴장이 사라지니 이완에 도착되어야 할 일이 없다. 긴장의 해소책이 "참 평화롭고 온전하구나."라고 하는 이완인 것이 아니라, 긴장이 없어서 이완도 없어지는 것이 해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늘 긴장된다. 다시 말해보자.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우.리.는. 긴.장.한.다. 그리고는 그 긴장의 무게로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모.든. 우.울.은. 신.의. 우.울.이.다. 신만이 우울증을 경험한다!


우울증에서 극적으로 해방되는 내담자들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신이 아니기에 그가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 또한 함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원래 그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해야 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 모든 이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착각하던 이가 실제로 해야 했던 일은 그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섹스와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 필요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또 지금 어떤 것을 하고 싶어하는지 등과 같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발견해가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음, 나는 더 많은 이성과 섹스를 해야지." "음, 나는 최고의 권위를 얻어야지."라며, 그 '정답'에 대한 실천방안만을 궁리하고 있을 때 우울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제.발. 좀. 몰.랐.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담자에게 간청하고픈 모든 상담자의 소망이다. 상담소는 자신이 아는 '정답과 같은 자신'을 상담자에게 똑같이 알려주려고 오는 곳이 아니다. 이것은 흡사 내담자가 상담자에 대한 과외선생이 되어 있는 현실과도 같다. 또 하나의 스승놀이다. 비싼 돈을 내고서라도 상담자에게 '정답'을 가르칠 스승이 되고자 상담소를 찾는 것이다.


이 사실만 분명하면 된다. 우리가 우울하다는 것은, 우리가 들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지금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울이라는 문제는 '잘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잘 몰라야 하는' 문제다.


모르면 불안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면. 자.유.롭.다. 모를 때 불안으로 곧잘 생각되던 것은 실은 불안이 아니라 죄책감이다. 자신이 정답에 따라 똑바로 실천하지 못해 '혼날 것 같은' 그 죄책감이다. 이것도 유한성을 이해하기만 하면 즉시 파기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왜 똑바로 달리지 않냐고 혼을 낸다. 우리는 그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팔다리가 없어요. 배로 기고 있어서 좀 느려요."


국면은 완벽하게 전환된다. 우리는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동시에 자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모.든. 인.간.승.리.의. 연.속.이.었.다.


한계 속에서도 해냈던 불가능성의 가능성,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다.


슈퍼히어로? 그딴 하찮은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 견줄 수 없다. 자유는 초능력이 아니라, 무능력 속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을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나.아.갈. 수. 있.었.던. 우리 자신을 잃어 우울이 시작되었다. 멀쩡한 이들의 팔다리를 끊어놓고는 배로 기어가는 '진정한 길'을 팔아먹는 스승이 되었다. 자.신.을.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일.어.난. 일.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통합적 정답이라고 고집하며 우울해진 이에게는 정말로 위로가 필요한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활로가 필요한가?


'진정한 자기만의 길'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자기기만의 길'이다. 하루하루의 성실함만이 있다. 자.유.는. 반.드.시. 성.실.함.으.로.만. 그. 모.습.을. 길.로.서. 실.현.한.다.


성실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에게 성실하다는 것이다. 아.직. 모.르.는. 자.신.을. 향.해.서. 계.속. 나.아.간.다.는. 것.이.다. 계속 나아가도 아직도 모르는 자신이 있다. 기쁘게 더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이제 유한성의 가장 심원한 역설을 개방한다.


"나에게는 한계가 없다."


무한성은 유한성을 통해서만 체험된다. 늪에 물길이 생겨, 강물이 되어, 바다로 나아간다. 증발한 수증기가 비가 되어 목마른 나그네의 가슴을 적시고, 그의 눈물로 흘러 새싹을 키운다. 이슬이 맺혀 또 여행길로 나아갈 것이다. 무한하며, 이것은 완벽하다.


우울한 그도 약하고, 불쌍하며, 온전한가? 아니, 우리는 길을 찾았다. 이 존재의 완벽함이 온전함이라고 부르는 길이다. 자기가 완벽하다며 고여있던 정답만 빼내면, 우리는 존재가 완벽한 이 온전함의 길에 바로 합류하게 된다. 우울증에 필요했던 것은 정말로 유한성의 길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를 자유가 열어내는 삶의 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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