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착각의 철학적 해체"
우리가 '철학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 뜻은 어려운 말로 폼을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전되지 않는 '정답'에 회의주의적으로 도전하겠다는 뜻이다. 철학의 기능은 '말을 깨는 말'이다. 어떠한 말이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때, 이것은 분명하게 철학적 해체의 소재가 된다.
이 해체의 작업은 우리에게 반갑지만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위치해있는 '가상현실'을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체의 의도가 향하는 곳은 가상현실을 축조해낸 임의적 언어이지만, 그 언어를 항구적 진리처럼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현실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해.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쓰고 있는 산타가면을 억지로 벗겨낸 뒤 "메롱, 메롱! 산타는 없지롱!"이라며 아이를 울리려는 악의의 일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라는 식의 아주 폭력적인 선입견을 뒤집으려는 일에 가깝다.
이러한 말로 서두를 시작하려는 이유는 완충장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 장에서 아주 불편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이 주제는 쉽사리 도전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지지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오늘날 누군가는 더 큰 폭력에 쉬이 노출된다. 그 '누군가'란 대체 누구일까?
바로 부모다. 대중심리학의 영향으로 부모는 나날이 죄인이 되어만 간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졌다. 돈을 벌어오고 아이의 생물학적 건강을 살피는 기본적인 양육의 일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아이의 마음도 유능하게 책임져야만 한다. 아이가 커서 30년 뒤에 상담사 앞에서 펑펑 울며 트라우마를 호소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1980년대에 유행한 애착이론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은 '심리학의 신비주의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애착이론의 근거가 되어 주는 정신분석이 여기저기에 치여 더는 과학으로 성립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것은 이제 대중과 야합하여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일종의 '대중신화'가 된 것이다. 근거는 의심스럽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대중신화가 힘을 얻게 되는 이유는, 신화를 소비하는 이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책임의 소재가 분명하게 제시되는 까닭이다.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대표적인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형상화된다.
"당신들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사랑이 결핍된 사람이 되었다구!"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자신이 '못받은' 사랑만큼 부모한테서 사랑을 더욱 받아내려고 하게 된다. 바야흐로 '사랑의 채권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집행하고자 하게 되는 셈이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조금 부끄러운 이들은 '사랑' 대신에 '인정'을 말하곤 한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늘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면서,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는 그 일을 지속함으로써 종국에는 아버지의 '더 큰 인정'을 받아내려고 하는 의도를 견지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인정이든 간에, 이들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애착행위가 더 강렬한 세기로 이루어지도록 고집스럽게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이.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 일.을. 한.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아주 중요한 이해다. 정말로 이해해보자.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가족이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전제다. 이것은 진리명제이며, 진리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이 진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족 전체가 '이상한 가족'이 된다. 비난되고, 욕을 먹으며, 사회에서 추방될 것이다. 가족끼리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흡사 거대한 죄악과도 같다. 이 죄를 저지르면 가족 전체가 지옥에 가게 된다. 그러니 가족 사이에는 꼭 사랑이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이들에게 있어 자.기.의. 부.모.가.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웃음'과 '사랑'은 동일한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임의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웃겨야 웃고, 사랑스러워야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큰 일이 된다. 자기가 부모를 사랑해야만 가족이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데, 자기의 부모를 억지로 사랑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자기의 부모에게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왜 그런가?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바로 그 몫만큼 부모가 더 많이 사랑하면,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 작동해야 할 그 사랑의 '할당치'가 채워지리라고 기대하는 까닭이다.
자기로 인해 가족 전체가 지옥에 가게 되는 일은 이들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자신은 가장 최악의 죄인이 된다. 이 일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이들은 필사적이다. 필사적으로 부모에게 왜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냐면서 더 많은 사랑을 사채업자처럼 강렬히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모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이 부과하는 '막중한 임무'를 자기의 것처럼 떠맡아 완수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처럼 부모에게 끊임없이 막중한 무게를 떠넘기는 자식의 모습이 이제는 부모에게도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점점 더 꼴보기 싫은 짓을 하면서도 이러한 자신조차도 인정하고 수용해달라고 하는 모습은 오히려 정이 떨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관계에서 공통적이다. 상담자들이 입을 모아 상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경계선성 성격장애는 끊임없이 상담자에게 이러한 일을 요구하기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상담자에게, 또 부모에게 신이 되라고 강요하는 일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지 않는 것이 신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에 대해 실제로 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명령'이다. 이 명령은 '윤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신으로 만든 뒤, 신에 대해 윤리로 명령하는 일을 일삼는다.
사.랑.하.지. 않.는. 이.만.이. 윤.리.로. 명.령.한.다.
윤리적 명령은 신에게 죄책감을 조장해 자기가 의도하는 바대로 조종하려는 의도다. 윤리는 언제나 이 통제 및 지배의 의도를 갖고 있다.
이 지점에서 '사랑'과 '윤리'가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일은 아주 유익하다. 핵심은 사랑과 윤리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이다. 윤리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면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아.무. 상.관.없.는. 그.저. 윤.리.적. 진.술.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언술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윤.리.적. 진.술.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즉, 이 말대로 따라 사는 일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오해해버리는 것이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만 해. 이것은 절대적 명령이야. 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너는 잘못된 존재고, 지옥에 갈 거야."
이러한 이가 우리에게는 사랑스럽게 경험되는가? 그 반대다. 증.오.스.러.운. 적.이. 된.다. 아주 많은 부모-자식의 관계가 이처럼 서로를 적으로 보는 관계가 되어 있다.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을 서로에게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할 수 없기에 대신 상대가 더 사랑해야만 하는 형태로 끝없이 의무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착의 신화는 이처럼 관계의 파국을 이끈다. 오늘날의 우리는 왜 관계에 지쳐 있는가? 관.계.가. 우.리.를. 나.날.이. 더.욱. 잘.못.한.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실은 윤리적 정죄를 가한다. "아빠는 날 인정해주지 않았다구욧!"이라는 말은 "너 같은 죄인은 사형이야!"라는 말과 동의어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늘 내가 나쁜 사람이냐?"
이것은 참다 못한 부모가 자식에게 하게 되는 단골대사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의 저항은 필연적인 패배에 직면하게 된다. 자식은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악질, 터무니없는 악질이다. 윤.리.가. 사.람.을. 이.렇.게. 악.질.로. 만.든.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마녀에게 가장 맹렬하게 돌을 던진 이들은 누구였는가? 가장 윤리적인 이들이었다.
윤리의 눈으로 계속 보면 결국 자식에게 부모는 어떻게 보이는가? '불쌍한 양반'으로 보인다. 그 '불쌍한 양반'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자신도 불쌍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세상 모든 이가 다 불쌍하게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을 다 불쌍하게 '알아볼 줄 아는' 자신은 이 지점에서 반등한다. 모든 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격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이 '윤리의 교만'이다.
윤.리.는. 자.수.성.가.한.다. 자신을 형편없이 낳은 죄인인 부모 아래서도, 윤리를 통해 자신은 자수성가한 높은 정신적 지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는 이제 부모를 한없이 불쌍하게 보며 잘 돌봐주려고 한다. 부모에 대한 양육을 역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귀하게 드높아진 자신의 윤리적 책무다. 그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아도, 자신이 따듯하게 윤리적으로 부모를 잘 양육해주면, 부모는 훌륭한 군주인 자신에게 세금처럼 사랑을 헌납하리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부모는 윤리를 통해 자기의 위에 서려는 자식을 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곧,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쉽게 말하면, 자식이 부모를 가르치는 인생스승처럼 굴려고 하는 일과 같다. 용납될 턱이 없다.
지옥은 아직 가까이에 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다해야만 모두가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식인 자기가 이제는 '잘 대해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무를 다하지 않는 부모가 답답하게 생각된다. 빨리 부모가 정신을 차려서 고고한 선비처럼 바로 서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데, 이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부모가 화를 솟구치게만 한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구욧!"
4DX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절박한 심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4DX 영화이며, 가상현실일 뿐이다.
윤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에 속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윤리가 사랑을 명령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하다. 윤리는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지시하는 메뉴얼이다. 사랑은 메뉴얼에 의해 가능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의 그 무수한 사랑노래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메뉴얼로 불가능하기에, 곧 통제할 수 없기에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윤.리.의. 위.에. 있.다. 도(道)가 망각되어서 윤리가 생긴다고 노자가 말하듯이, 사랑이 망각되었을 때 생기는 것이 윤리다. 이러한 하위의 것이 상위의 것에게 명령하는 일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윤.리.적. 명.령.이. 아.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사.랑.이.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불편할 수 있지만 한번 말해보자.
가.족.이.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사랑은 윤리적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윤리적 의무를 강요하는 명령으로 사랑을 취급하고자 할 때, 사랑은 빠르게 실종된다. 표면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더 비극적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떠한가?
가.족.은. 서.로.를. 통.해. 사.랑.을. 배.워.볼. 기.회.다.
그리고 이 기회는 애착을 해체함으로써 정말로 기회가 된다. 애착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부모인 당신들이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아서 자식인 나는 사랑이 결핍되었다."
이러한 말에 대해 통속적으로 부모는 이렇게도 말하곤 한다.
"우리가 미안하다. 우리도 우리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어떻게 사랑을 주는 지를 모르게 되었어."
이것은 착각이 유발한 또 다른 착각이다. 어떠한 착각인가?
부.모.가. 사.랑.의. 원.천.이.라.는. 착.각.이.다.
사랑받지 못한 이가 부모가 되어 사랑받지 못한 자식을 만들고, 그 자식이 또 부모가 되어 동일한 일을 반복한다는 이 구조를 소급해보자. 그렇다면 '최초의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부.모.가. 사.랑.을. 주.지. 못.했.기.에. 후.대.의. 누.구.도. 사.랑.을. 얻.지. 못.하.는. 이. 사.태.가. 벌.어.졌.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 것인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게 문제가 크다. 그 '최초의 부모'로 인해 인류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애정결핍이다. 이것이 정말로 사실인가?
고등종교는 사랑에 대한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부모가 사랑의 원천이 아니라, 종교적 실재가 사랑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고등종교들의 입장에서 부모가 사랑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우상화다. 이 우상이 진짜 사랑의 원천과 우리 자신이 연결되는 일을 가로막는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사생아인 예수는 어떻게 그 자신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는가? 자기 부모가 깨닫지 못했던 붓다는 어떻게 그 자신이 깨달을 수 있었는가? 사.랑.의. 원.천.이. 그.들.의. 부.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사랑의 원천으로 보려는 일은 오히려 부모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늘 부모를 순교시키려는 의도 속에 있다. 부모에게 십자가를 떠맡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해 부모를 억지로 신으로 세우려는 것이다. 부모가 순교해야 가족 전체가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이 발상은 끝없이 부모를 윤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것이 이미 지옥이다. '애착의 지옥'이다.
애착의 환상을 벗겨내면, 우리는 부모가 우리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듯이,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 또한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부.모.는. 의.무.가. 아.닌. 그. 일.을. 자.신.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자.유.로. 실.현.했.다.
정말로 사랑받지 못한 이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그 말을 할 수조차 없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렵지만, 의외로 쉽게 하나의 관점에서 이처럼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두 발로 상담소에 찾아가 고액을 지불하고 트라우마를 말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잘 살려낸 부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아니 잘못은 고사하고, 그.들.은. 분.명. 우.리.를. 통.해. 사.랑.을. 배.워.갔.던.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서나 자식에게 있어서나 사랑을 배우게 되는 기점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자리에서 출현한다. 이와 관련하여, 틸리히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수용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용은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용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무로부터의 해방이다. 자신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인정될 때, 또 부모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인정될 때, 우리 자신과 부모는 처음으로 두 다리를 뻗고 안심하며 잠들 수 있는 현실로 진입하게 된다.
사랑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당위가 사라지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의 자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관점에서 사랑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될. 이. 자.유.가. 인.정.되.는. 자.리.가. 그.래.서.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다.
누군가가 자신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게 되는 일은 어떠한가?
"저를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착한 아저씨 아주머니. 저도 하지 못하는 걸 당신들에게는 강요하며 죄책감을 강제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사랑해보려고 힘내시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히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채무관계의 청산이다. 애.착.관.계.는. 실.은. 채.무.관.계.다. 누군가를 채무자로 보고 있으면 그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부모를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적인 것으로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가 없다. 애착관계 속에서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원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품어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사.랑. 속.에.서. 품.어.지.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지옥에서 심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진실로 많은 연인들이 경험하듯이, 하늘을 나는 현실과 같다. 엄청난 고급현실이다.
이 고급현실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는 있다. 배우려면 아는 척을 그만 해야 한다. 안다고 착각하게 만든 진리명제에 도전해서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사랑을 정말로 배우고 싶은 이는 "사랑하라."라고 하는 이 윤리적 명령의 말을 깰 필요가 있다. 눈을 감고 한번 정직하게 떠올려보자.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꼭 사랑해야만 한다고 절대적인 의무처럼 강제해온 그 대상을 이제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떠올리면 어떠한 느낌이 드는가? 이것은 우리가 상대의 진실을 알아주어야 하고, 그 마음의 온전한 차원을 드러내주어야 하며, 상대를 진정한 사람으로 봐주어야 한다는 그 모든 행위를 그만둘 때의 느낌을 포함한다. 어떠한가?
자유로운가? 편한가? 마음이 놓이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에게 우리가 경험한 그 느낌을 선물한 것이다. 우리의 '억지사랑'을 받아주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 또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이것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 속.에. 품.어.지.게. 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사.랑.은. 이.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이.다.
상담자는 자신의 큰 사랑으로 누구보다 많은 것을 품는 이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이 '기회'를 누구보다 많이 갖는 이다. 사랑에 관해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싶은 까닭이다. 그래서 상담자가 하는 일은 언제나 사랑에 대한 착각을 해체하는 일이 된다.
내담자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의 형상으로 상담자 앞에 선다. 이것은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상담자에게 대신 사랑해달라고 하는 암묵적인 명령과도 같다. 그리고 상담자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아도 벼락에 맞아 죽지 않는 현실을 내담자에게 실증한다. 그것 또한 사랑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억지로 사랑하려는 움직임이 멎자, 억지로 사랑받으려는 움직임도 멎는다.
애착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대한 착각이 해체된 이 자리에서 내담자는 이상하게 자유롭고, 편하며, 또 마음이 놓인다. 마.치. 사.랑.받.는. 느.낌.이.다. 상담자에게 물어보면 "아니요. 전 사랑하지 않는데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런데 사랑 속에 있다. 상담자가 지금 앞에 있는 내담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째로' 인정함에 따라, 상대의 존재가 있는 그 자체로 '통째로' 인정되어서 생겨나는 일이다.
이것이 다시 한 번,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 속에 품어지게 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한 존재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인정은 어떠한 경우에 분명히 그 존재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 된다. 이는 '역설적 의도'라고 불린다. 철학적 해체는 대개 이 역설적 의도를 위한 것이다. 49%는 된다고 착각하는 것을 0으로 해체하면 그것은 100%가 된다. 49%를 100%로 만드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지만, 0으로 만드는 일은 훨씬 수월하다.
49%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것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착각에 도전하면 우리에게는 100%의 사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우리는 할 수 없는데 사랑은 할 수 있는 그 고급현실을 배워볼 기회다. 하늘을 나는 기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