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전체주의: 마음에 저주받은 내담자"
프로이트가 심리학의 역사를 한 200년 정도 전진시켰다면, 융은 2000년 정도 퇴행시켰다. 프로이트를 발전시킨 것이 융이라는 관점에 대해 동의하는 프로이트주의자들은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과 자주 대립각을 형성하곤 하는 실존상담자들도 프로이트에 대해 전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왜 융이 후퇴시킨 시점이 2000년 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2000년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던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다. 이것은 어떠한 상징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의 죽음이다. 신도 죽는다. 이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런데 신이 죽음으로써 생겨난 현실은 더 놀랍다. 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다는 '대속'이라는 개념은 이 현실을 암시하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로.워.진. 현.실.이.다. 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집안 대대로 세습되어온 채무관계를 완벽히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는 '신의 죽음'이자 '인간의 부활'의 사건이다.
두 번째는, 왕의 죽음이다. 예수를 왕으로 착각한 이들 앞에서 예수는 왕으로도 죽었다. 그런데 왕이란 무엇인가? 집.단.정.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구.현.자.다. 때문에 왕의 죽음이란 곧 집단정신의 죽음을 뜻한다. 집단정신이 죽은 뒤 그렇다면 무엇이 부활했는가? 그것은 바로 '개인'이다. '왕의 죽음'은 동시에 '개인의 부활'의 사건이다.
예.수.는. 인.간.이. 개.인.으.로. 살.아.나.는. 이. 자.유.의. 현.실.에. 대.한. 완.벽.한. 상.징.이.다.
예수는 곧 '자유로운 개인'의 본래적인 면목의 표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융은 예수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는 예수 대신에 '예수의 엄마'의 중요성을 말한다. 조상 대대로 세습되어온 '집단무의식'의 가치를 노래하고, 공동체의 이상을 부르짖는다. 융에게 있어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무의식이 옹립하는 '집단무의식의 왕'이다. 개인을 다시금 신과, 왕과, 집단과, 조상과, 이념에게로 가두려고 하는 퇴행에의 의도다.
융을 헤겔과 비교해서 탐색하는 일은 아주 유용하다. 그 둘이 제시하는 구조 및 원리는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둘 다 이원론적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적 통합의 방법론에서 전개된 사유들이니 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탐색의 결과 우리는 융과 헤겔의 근본적인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감수성에 있다. 헤겔은 섬세하며, 융은 투박하다. 투박하다는 것은 어떠한 지점에서 비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투박한 감수성은 반드시 '마법'을 추구하게 된다. "에이 몰라. 뾰로롱! 호이!" 이처럼 결정적인 차원에서 마법적인 원리에 기대는 것이 투박한 감수성이 도달하는 현실이다.
종교철학자로서의 헤겔의 가치를 제안하고자 하는 국내의 헤겔연구자인 정진우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헤겔을 '근대성의 한계 속에 있으면서도 근대성을 극복하려고 한 인물'로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을 현대적 대화주의의 문법으로 읽어내려 하는 일은 시도될 법한 일이다.
대.화.주.의.가. 가.능.하.려.면. 누.구.도. 왕.이. 아.니.면. 된.다. 즉, 모두가 다 서로에게 '타자'이면 된다. 그리고 융에게는 이것이 어렵다. 동서고금의 모든 것이 얼마나 '똑같은지' 자신이 그 '동일성'을 알아봐주는 가장 권위있는 왕으로서 서고자 하는 이에게는 타자에 대한 지향이 불가능하다. 왕에게 타자란 결코 자기의 '동일성의 권위'에 복속되지 않을 위협의 소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왕은 '낯선 타자'가 아니라 '착한 아이'를 사랑한다.
'착한 아이'란 무엇인가? 집.단.이. 향.하.는. 방.향.성.에. 충.성.하.는. 아.이.다. 윤리적인 아이라고 말해도 좋다. 가장 정확하게는, 특정한 집단의 이상을 자기가 따라야 할 절대적 진리라고 간주하는 이의 모습이다. 왕은 집단의 이상에 따라 이 착한 아이들에 대한 육아의 일을 하며, 그 속에서 착한 아이들은 이제 자기 또한 왕이 되고자 하는 꿈을 품는다.
이러한 '왕의 꿈'이 바로 모두를 구원해줄 '메시아의 꿈'이며, 곧 '집단무의식의 꿈'이다. 학급의 대장, 가족의 영웅, 민족의 해방자, 공동체의 슈퍼히어로 등을 추구하는 모든 꿈이 다 이 집단무의식의 꿈들이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이제 이런 것을 그만 하자고 했지만, 융은 또 하자고 말했다. 왜인가? 융이 고통의 예찬자였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 심리학적 원리의 핵심은 '재미'와 '성장'이다. 이 시대의 무수한 이가 찬미하는 바로 그 키워드들이다. '재미'와 '성장'이 가장 최대치가 될 때는 언제인가? '자극'이 많을 때다. 그리고 자.극.이. 바.로. 고.통. 그. 자.체.다. 자극의 예찬자는 고통의 예찬자다. '재미'와 '성장'을 지속적인 자극으로 추구하는 일은 영원한 고통의 길에 다름아니다.
2500년 전에 붓다는 고통과 쾌락이 동일한 자극이며, 이 자극에 중독되는 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00년 뒤에 예수는 다시 한 번 이 자극중독을 멈추자고 강조하며, 중독의 현실 대신에 사랑의 현실로 우리가 눈길을 돌릴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이 모든 핵심은, 인간의 삶에서 생겨날 수 있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종교는 언제나 이 고통감소의 전통이었다. 심리상담은 종교로부터 정확하게 이 역할을 이어받았다. 물론 융도 자신 또한 고통을 감소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방편은, 우리가 '무의식의 왕'이 되면 고통이 감소되는 동시에 오히려 쾌락은 증대될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묘사가능하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인물이 되는 것이 나의 성장이고 나의 재미다."
'착한 아이의 꿈'이다. 착한 아이가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방식이다. 이러한 꿈이 향하는 '모든 이'라고 하는 것은 곧잘 '모든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형상화된다. 착한 아이들은 모든 마음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훌륭한 자신으로 성장하기 위해, 또 그렇게 모든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일이 재미있다고 말하며, 유능한 '마음의 접대부'로 바로 서고자 한다. 이 '마음의 접대부'가 집단이상이 요청하는 바로 그 인물상인 것이다.
이러한 가상의 문답을 한번 떠올려보자.
"그래, 자네가 보기엔 내가 왕이 될 상인가?"
"그러믄요, 나리. 생긴 것부터가 진성 호구이신데요."
호구가 되는 일이 얼마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더해, 모든 마음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고 곧잘 주장하곤 하는 통속적인 사이비심리학의 '윤리적 목소리'를 따르다가 고통받던 이들에게서 "심리학을 배울수록 오히려 호구가 되어갔어요."라는 진술을 듣는 일은 빈번하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70억의 인류를 모두 만족시켜주기 위해 살아가는 이가 있다. 이러한 삶은 정말로 '재미'와 '성장'으로 가득한 삶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다만 고통스럽기만 할 것 같은 삶으로 보이는가? 얻어 맞으면서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자신이 성장하는 일이 재미있어요. *^O^*"라고 하는 이는 정말로 무엇인가 좀 대단한 존재로 보이는가, 그냥 호구로 보이는가?
맞는 일이 재미있고, 또 맞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복싱체육관에 등록하는 편이 낫다. 이러한 것은 심리학이 아니며, 심리상담은 더욱더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저.주.다.
자신에게서, 또 자신과 관계맺는 타인에게서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키.기.만. 하.는. 저주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모든 내담자는 저주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내담자가 호소하는 고통은 그 저주로 인한 고통이다. 내담자에게 저주를 건 주체는 바로 '집단이상'이다. 이상(理想)이 이상(異常)을 만들어낸다. 집단의 이상(理想)으로 인해 개인은 이상(異常)해진다. 모두가 다 이상해져서 결국 집단도 이상해진다. 집단이상(集團理想)이 집단이상(集團異常)이 된다. 병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프로이트가 '개인무의식'을 주장한 것은 집단이상이라는 이름의 이 '집단무의식'의 저주로부터 개인이 해방될 수 있기를 바라서다. 이것은 니체의 기획이었으며, 니체에게서 암묵적인 영향을 받은 프로이트가 '개인'을 강조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존상담과 정신분석은 '개인'을 강조하는 이 지점에서 중대한 공유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개인을 실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실.존.상.담.은. 종.교.적.이.며. 정.신.분.석.은. 정.치.적.이.다.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개인성은 종교성으로 실현되는 것이며,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개인성은 정치성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역동'이라는 것이 애초 무의식이 이루는 정치적 역학관계의 운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의 정치적 역동 속에서 균형감각을 갖추어 현명하게 잘 살아남는 이를 개인으로 본다. 반면 실존상담에서는 정치적 구조를 초월하여 자기의 유한한 시간을 의미롭게 사는 일에 전력하는 이를 개인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간에, 개인에게서 고통을 감소시키고, 개인이 내적인 충만감(소위 행복이라고 한다)을 얻을 수 있도록 조력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것은 또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당신은 '누구'로 살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이러하다.
"그 '누구'가 아닌 '나'로 산다."
마치 게임의 캐릭터처럼 더 많은 '누구'가 될수록 경험치가 오르고 자신이 성장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특히나 오늘날 우리에게 저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누구'라고 하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이는 명백하다. '누구'는 언제나 '집단을 위한 누구'다. 집단이상을 만족시켜줄 역할이자 기능이다.
이러한 '누구'의 저주가 확산되는 방식은 '이야기'를 통해서다. '집단적 이야기'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만족시켜줄 이상적인 아이돌과 같은 그 '누구'의 형상을 극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해낸다. 그리고 이야기의 소비자는 이야기가 권장하는 '누구'의 모습과 동일해지기 위해 자발적인 노력을 가한다. 집단이 요청하는 이 '누구'를 추구하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비난되거나 은근하게 실망된다. 개인이 그 자신일 수 없게 만드는 '집단압력'이 가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압력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방식은 집단으로부터 내려진 이 '저주'를 개인이 '자신의 꿈'으로 삼아 그에 도취되는 것이다. 집단적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도취될수록 집단압력은 일종의 쾌락으로 전환된다. 흥분된 눈빛으로 화형대에 묶인 마녀를 향해 돌을 던질 때의 그 쾌락과 동일하다.
우리의 불우했던 학창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반의 한 일진이 다른 일진과 추격전을 벌이며 책상 위를 뛰어다닌다. 다른 아이의 책상 위에 있던 책과 학용품을 마구 던져대며 게임처럼 공방전을 이룬다. 학급의 모든 아이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 행복한 일진들은 큰소리로 광소하며 사방으로 지랄법석을 떤다.
나는 이렇게 멋진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으며, 반을 주름잡는 우리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고, 세상은 이러한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자신의 꿈'이 실현되었다. 일진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꿈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은 어디에서 왔는가? 학.급. 전.체.로.부.터. 왔.다.
무더운 여름날 에어콘도 없이 선풍기 두 대로만 45명의 열기를 식혀야 했던 우리의 불우했던 학창시절에,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파괴할 반영웅으로서의 영웅을 집단은 꿈꾸었다. 그러나 교양있는 각각의 개인들은 이와 같은 '무식한 역할'을, 그로 인해 선생님으로부터 종국에는 혼나게 될 '비극적 기능'을 떠맡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러한 맥락에서는 제일 호구 같은 양아치들에게 이 집단이상의 한 임무는 부여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상한 애들'이 되었고, 우리는 정상인으로서 안심했다. 일진들은 자기가 힘을 가진 영웅이라는 꿈에 도취되었고, 다른 아이들은 자기가 고고하고 선한 선비라는 꿈에 도취되었다. 상황이 지속되면, 영웅과 선비는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더 큰 쾌락을 구가하게도 될 것이다.
누군가는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를 따라 이 일을 이루었고, 누군가는 '오성과 한음'이나 '은하영웅전설'을 따라 이 일을 이루었다. 이들 모두는 다 집단무의식이 권하는 각각의 이야기에 따라, 반영웅이 활동하는 사건의 등장인물로서의 그 '누구'가 되어 집단이상(集團理想)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집단이상(集團異常)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저주다. 어떠한 문제상황에 대해 알고리즘처럼 자동적으로 제시되는 해결책으로서의 역할들과 개인이 동일시되어 '집단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 모든 행위가 저주의 결과다. 교실에 남겨진 것은 체벌과, 난장이 된 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잉여의 노동이다. 무더운 여름날, 분.명.하.게. 고.통.은. 증.대.되.었.다.
집.단.무.의.식. 따.위.에. 지.혜.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유튜브를 지혜의 원천으로 보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대하는 일과도 같다.
집단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 저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던 어떠한 이는 조용히 교무실로 가서 몸이 아프다며 담임선생님에게 조퇴증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에어콘이 작동하는 거실 소파에 누워 폴라포를 입에 물고 만화책을 보며 그 '누구'도 아닌 행복한 그 '자신'의 시간을 보냈을 수 있다.
이러한 이가 우리의 친구였다면, 우리의 불우했던 학창시절은 한결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이제 우리에게는 실존상담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한다. 우리는 실존상담자들을 통해 '왕'이 되는 법이 아니라 '개인'이 되는 법을, 그리고 집단을 책임지는 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법을 배우는 일에 도움받을 수 있다.
아이언맨의 이야기를 거듭 소비하면 자기가 아이언맨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될 수 있다.'의 차원이 아니다. '되어야만 한다.'의 차원이다. 이야기를 소비함으로써 이야기가 강권하는 '누구'의 모습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 보편적인 내담자의 상태다. 이것은 강박적이다.
이 강박적 의지가 실현되는 일을 조력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이를테면 제대로 된 부모로서의 그 '누구'가 되려면, 어떠한 행위들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코칭하는 이들이다. 좋은 이야기들이 '누구'가 되는 일을 실현할 방법을 알려준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내담자가 '누구'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박을 정당화하며 또 강화한다. 저주의 힘은 더욱 세진다.
그. 자.신.도. 저.주.에. 걸.려. 있.는. 이.들.이. 이.러.한. 일.을. 한.다. 한 개체가 집단주의적 꿈을 자기의 꿈으로 삼아 도취되어 있을 때, 저주는 더욱 널리 복제되고 확산된다. 공포소설 『링』을 떠올려보자. 이 저주는 그래서 '동일성의 저주'다. 이 '동일성의 저주'로 작동하는 집단의 모습을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말한다.
내담자는 이러한 전체주의에 의해 심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며, 상담자는 결국 '심리적 전체주의'를 해체하려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전체주의'는 마.음.에. 기.생.해.있.는. 전.체.주.의.를. 일.컫.는. 표.현.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실체도 없는 것에 터를 잡고 숨어있다보니 이러한 전체주의의 양상은 쉽게 발견되기가 힘들다. 그러니 안전하게 자신을 은신한 채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저주의 구조다.
심지어 표면적으로 그것은 전체주의가 아니다. 거듭 말한 것처럼 '재미'와 '성장' 내지 '영웅' 및 '꿈의 실현' 등으로, 나아가서는 '역사와 민족을 위하여' 또는 '모두의 온전한 마음을 위하여' 등으로, 마치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재인 것처럼 언술되는 것이 이 심리적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그러니 내담자는 이 심리적 전체주의의 저주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은 더 좋은 형태가 된 것 같지만, 실제의 고통은 증가하게 된 분열적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착한 아이'로 사는 이들이 곧잘 호소하곤 하는 증세다. 자신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모두를 위해 착하게 살았는데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절박한 증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심리적 전체주의로 인한 고통은, 이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고통받는 일에 동의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어떠한 집단이상에 동의한다는 것은, 집단이상에 자기를 끼워맞추어야 하는 고통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이상에 부응하여 잘 끼워맞추었는데 왜 고통스러운가에 대한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끼워맞추는 그 일 자체가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집단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상이 됨으로써 개인이 고통받게 되는 이 일을 '영웅의 자격'처럼 선전한다. 히어로물을 보면 하나같이 다 이 선동을 이룬다. 집단의 이념을 위해 개인이 더 크게 고통받을수록 그러한 개인은 영웅으로서 숭상된다. 이것이 영웅이 되는 '재미'의 자극(쾌락/고통)을 경험하며 영웅으로 '성장'해간다는 것이다. 성장의 최종점에는 물론 '왕'이 있다. 다양한 '누구'들을 영웅적으로 통합해감으로써 이루는 것이 곧 왕이다.
심리적 전체주의는 결국 우리에게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새겨지는 저주다. 이것은 '심리적 왕'의 의미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것이 되기 위해 심리학을 소비한다. 마음의 교실 안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책상 위를 가로질러 포효한다. 자기를 왕으로 왜 바로 알아주지 않냐는 그 포효가 새어나와 화난 표정이 되고, 우울한 얼굴이 되며, 무기력한 태도가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 밖.으.로. 나.오.는. 것.만.이. 중.요.하.다.
우리가 마음의 교실 밖으로 나와야 심리적 전체주의는 극복된다. '나'는 '마음 밖'을 살아가는 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마음 밖'을 사는 일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마음'으로 사는 일을 뜻한다. 헷갈릴 수 있으니 쉬운 예로 한번 묘사해보자.
휴대폰으로 접속하는 하나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 커뮤니티와 연결하며 보낸다. 커뮤니티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좋은 역할을 하려고도 하며, 나아가서는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 그 중심에 서는 권위를 얻으려고도 한다. 이처럼 커뮤니티가 마치 자신의 몸과 같을 때 우리는 커뮤니티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은 '커뮤니티의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휴대폰을 끄거나 덮은 채 그저 방의 창가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 밖'으로 지금 나와 있는 것이다. 새소리를 듣거나 꽃향기를 맡으며 좋다고 느낀다면, '마음'은 지금 여기 우리 자신에게 있다. 현재 '자신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엄밀하게는 '자신의 마음'이라고 말할 일이 굳이 없다. 무엇인가 있었던 것 같다가도 금방 사라지는 '경험 그 자체'의 과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체없는 경험'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마음'이라고 하는 표현이 다양한 층위에서 활용될 수 있기에 언어적으로 모호한 것처럼 생각될 뿐이다. '집단의 마음'에서 나와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표현은 한결 이해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개인에게는 그 마음이 마치 자신의 마음인 것처럼 '주체적으로' 경험되기에, 이는 현실적으로 유용한 이해는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적으로 마음이라고 경험하는 것의 바깥인 '마음 밖'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마.음. 밖.을. 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다.
심리적 전체주의라는 저주가 마음에 기생한다고 할 때, 마음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저주 밖으로도 나오게 된다. 저주는 저주받은 영역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주는 속박하는 것이다. 속박된 그 안에 작용하는 저주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백설공주'라는 저주에 걸렸다고 해보자. 독사과를 먹고 죽어야 한다. 반대로 '계모여왕'이라는 저주라고 해보자. 목이 잘려야 한다. 어느 쪽이든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누구'여야만 하는지를 '반드시' 규정하는 이야기 속에서 고통의 반복 및 심화는 필연이다.
물론 이것은 무수한 이야기들의 분서갱유를 요청하는 주장은 아니다. 개인에게 있어 집단주의적 이야기가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로서 옹립된 뒤 '자신의 마음'의 지위까지도 획득하게 되는지의 그 교묘한 과정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이처럼 저주는 흡사 기생생물과도 같이 개인을 잠식함으로써, 저주 자신이 이제는 그 개인인 것처럼 활동하게 된다.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렇게 고통의 상황을 만드는 방식으로 행위하게 된다는 보고 또한 내담자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저주가 작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나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결국 종교와 심리상담의 핵심적인 질문이다. 저주의 속성을 살펴보면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가능해진다.
저주는 우리를 자유롭게 살지도 못하게 만들지만, 우리가 자유롭게 죽지도 못하게 만든다. 저주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극의 논리에 따라 꾸.준.하.게. 괴.롭.히.기. 위.해. 오.래. 살.려.두.려.는. 것.이. 저.주.다. 이것은 곧 저주를 벗어나는 실천적인 방향성은 죽음의 감수성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죽음이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가 괜히 어렵게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잠' 또는 '쉼'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우리가 막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 때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좌우로 뒤척이며 자세를 고른다.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자세가 더 편하게 잠이 들기 좋은 자세인지를 자연스럽게 선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표현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자세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이.처.럼. 죽.기.에.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죽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죽어야 한다고 할 때 지금 이 상태로 죽는 것이 좋겠다고 우리에게 느껴지는 어떠한 상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다. 이 상태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다.
무더운 여름날 일진들이 날뛰는 교실에서 죽고 싶은가? 아니면 거실의 소파에 누워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쐬다가 죽고 싶은가? 우리는 아주 분명한 자각 속에서 우리가 죽고 싶은 자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죽음'의 선택은 그대로 '자유로운 삶'의 선택이 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우리는 지금 그 일을 하다가 죽어도 괜찮겠는가? 지금 그 자리가 우리가 죽고 싶은 자리인가?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맞다.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저주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죽음을 끌고 들어올 때 그 어떤 저주라 할지라도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붓다와 예수는 일찌감치 발견한 바 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다. 죽음이 우리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다.
"어디에서 죽고 싶은지를 모르겠어요."와 같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은 "어떤 자세로 자야 될지를 모르겠어요."라는 말과 같다. 자면 안된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말이 나온다. 자는 동안 남들만 '재미'를 보고 '성장'할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불면증으로 몰아간다. 이것은 집단불면증이다. 집단이상이 만드는 도취의 현실은 늘 이 집단불면증을 창출한다.
그러나 몸은 쉬고 싶다. '누구'가 되기보다는 '자신'이고 싶다. 자신으로 있다가 편하게 죽을 자리가 필요하다. 몸이라고 하는 '마음 밖'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편함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제일 좋은가? 바.로. 마.음.이. 편.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마음 밖'에서 마음의 편함을 느낀다. 몸이 편한 것이 곧 마음이 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쉬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할 때, 그것은 실은 몸이 편한 상태가 아니다. 쉬는 재미와 쉼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저주받은 상태를 우리는 의심해볼 수 있다. 몸은 어떤 때 정말로 편해질 수 있는가? 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정되어 그 외의 중요한 것들이 다 기각되는 순간 몸은 비로소 편해진다. "아 좋다."라는 감각이 쉬고 있는 자신의 몸을 향할 때 몸은 마침내 편해진다. 이러할 때 몸은 '누구'의 몸도 아닌 바로 '자신'의 몸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 자신의 몸은 집단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우리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저주는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게 만든다. 이처럼 저.주.는. 몸.에. 대.해. 걸.리.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저.주.를. 풀.어.내.는. 것. 또.한. 몸.이.다.
심리적 전체주의는 집단을 만족시킬 이상적인 하나의 마음을 종용함으로써 개별적인 개인의 몸을 부정하고자 한다. 이것이 결국 저주의 전모다. 이 저주는 집단이상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편하게 '죽기'를 선택하려는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의.해. 해.주.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부활해 정말로 살 수 있게 된다.
종.교.성.은. 신.체.성.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동일한 의미로, 마.음.은. 몸.이.다. 심리적 전체주의의 저주가 '마음'에 기생했기에, 또 집단이상이 개인의 몸을 부정함으로써 집단의 하나된 마음을 이루고자 했기에, 마음과 몸은 적대적인 이원론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이원론을 착각으로 보며 해체하고자 한 이들이 있었고, 마음[정신]의 입장에서 이원론을 통합하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전자는 자유롭고 싶은 이들이었고, 후자는 저주술사들이었다.
저주술사들이 집행하는 저주의 원색적인 형태는 바로 '몸에 대한 비난'이다. 근본적으로 몸을 비난하고 있는 이들이, 집단 내의 더 많은 수를 만족시킬 이상적인 형상에 따라 몸을 변형시키려 한다. 가장 알기 쉬운 형태로는 대.중.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맞.추.고.자. 하.는. 모.습.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행위를 '몸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써내려간다. 비난을 사랑이라고 탈바꿈시키는 기만적 언술 속에서 저주는 은밀하게 그 지배력을 더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물리적인 육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존재는 늘 이러한 방식으로 저주 속에 위치하게 된다. 자신을 재미있게 성장시킨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실 자신의 존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관계'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존.재.를. 비.난.한.다. 이것은 정말로 실증적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편히 살고자 하는 일이 가장 비난되는 것은 관계에 의해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편히 존재하면 안되고, 관계의 만족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다. 그렇게 저주받았다. 우리가 그냥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겠다고 하면 무수한 비난의 손가락들이 우리를 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이 두렵다. 그. 손.가.락.들.이. 우.리.를. 죽.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보자. 저주는 우리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으면 집단이상을 만족시킬 한 명의 노예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하면 저주는 속수무책이다. 나아가 우리의 입장도 '비난받는 자'로부터 역전될 수 있다. 보라. 우리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냥 이 모습으로 편히 죽을게. 만약 내가 이렇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아쉬움이니, 아니면 너의 아쉬움이니?"
이것은 저주받아 시름하던 내담자가 그 자신의 존재의 힘을 되찾는 방식이다.
그 자리에서 그냥 앉아 쉬겠다는[죽겠다는] 이에게는 그 어떤 '누구'도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다. 그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매달리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한 이는 가장 온전한 자신일 뿐이다. 이것은 신성한 일이며, 곧 좌선(坐禪)의 의미다. 로자 파크스 여사의 예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그냥 앉.아. 있.음.으로써, 저주받아 있던 그녀의 세계를 통째로 뒤바꿔놓았다. 그녀의 존재력이 한 일이다. 일종의 종교적 힘이다. 다시 말하건대, 종.교.성.은. 신.체.성.이.다.
우리의 존재력 또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 '심리적 전체주의' 앞에서 우리는 '신체적 실존주의'를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부활'의 거룩한 사건이다. 우리는 집단의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만족해서 산다. 쉼을 통해 이 역전은 언제나 가능하다.
혹시 죽고 싶은데 떡볶이는 먹고 싶은가? 이원론을 거절하는 실존상담의 입장에서는 '죽고 싶은 일'과 '떡볶이를 먹고 싶은 일'은 같은 일이다. 이것은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로. 쉬.어.보.고. 싶.다.는. 것.이며, 곧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 자.신.이. 되.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 한 번만 해보자. '단 한 번'을 하려면 그것이 '단 하나'여야 한다. 세상에 그것만 있으면 된다. 불과 20초만이라도 괜찮다. 가장 완벽하게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시간, 동시에 가장 완벽하게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시간이 이루어지면 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몸을 최우선시하는 바로 그 시간이 '진짜 쉼'이 된다. 몸은 우리에게 정말로 '단 한 번'의 유일한 소재며, 그렇기에 몸에 대한 전적인 지향은 그 자체로 '몸의 죽음'에 대한 전적인 지향이 되는 까닭이다. '몸의 죽음'이란 곧 '몸의 쉼'이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의도가 수렴될 때, 우리가 진짜로 쉴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또한 즐거운 일이 된다.
자신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지금 자신이 비난 속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저주받은 운명을 직감한다. 이런 인생 따위 살아서 뭐하겠는가. 그냥 죽어버리자. 딱 20초만 죽자.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많은 것이 즉각적으로 가벼워진다.
모두 안녕, 일단 죽을게. 하던 것을 완전히 포기한 채 눈을 감고 가장 편한 자세로 엎어진다. "아 좋다."가 찾아온다. 그리고 20초 후에 '부활한' 이의 모습은 20초 전과 같지 않다. 죽.어.서. 저.주.가. 풀.렸.다. 그는 마음의 저주 밖으로 나온 새생명이다. 완전히 포기해 완전히 얻었다. '진짜'로 만족한 몸이다. 이미 자신이 만족했으니, 그 전까지 무리하게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던 일들이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대충 하게 되고, 그래서 잘하게 된다.
심리적 전체주의의 저주를 해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 단 20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으로 가능한 능숙자도 있을 것이다. 초심자에게도 20초면 충분하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우리는 죽을[쉴] 수 있으며, 기회는 넘쳐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200년의 전진이나 2000년의 퇴행이 아니라, 단 20초의 죽음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를 반드시 살아나게 한다. 떡볶이도 꼭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은 67번의 죽음을 통해 쓰였다. 삶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