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60

"크리스마스 캔디를 맛보는 일: 시절의 꿈, 시절의 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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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산타들은 굴뚝이 아니라 상담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위해 살았는데 그 사람은 그걸 잘 모르더라구요."

"제가 진실로 제 아이를 위해 그 모든 걸 했다는 걸 아이는 왜 모를까요?"

"사람들이 몰라줘도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제 인생을 바칠 수 있었다는 것, 그걸로 전 충분합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산타들이다. 그들은 세포의 차원에서부터 모른다.


몸으로 비유해보자. 우리 몸에는 다양한 기관들이 있다. 그 기관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사이좋은 토끼와 거북이처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위해 더불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은 어떠한가?


하.나.의. 기.관.은. 다.른. 기.관.을. 위.해. 살.지. 않.는.다.


심장은 그저 심장 자신의 일을 할 뿐이지 십이지장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폐는 다만 폐 자신의 일을 할 뿐이지 간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자신일 뿐이다. 그렇게 가.장. 자.신.으.로. 살.려.고. 하.는. 일.이. 결.과.적.인. 차.원.에.서. 몸. 전.체.가. 사.는. 일.이. 될. 뿐.이.다.


세포들에게 물어보라.


"너, 네가 아닌 남을 위해 살고 있니?"


이 질문에 대해 세포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왜 그런가?


애초에 '남을 위해' 살지도 않을 뿐더러, 그 반대로 '나를 위해' 산다는 개념조차도 세포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를(을) 위해'라는 차원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을 '비이원'이라고 부른다. '남'과 '나'가 실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그.러.할. 뿐.인. 것.이.다.


'남을 위해' 또는 '서로를 위해' 또는 '전체를 위해'를 부르짖는 이들은 사실 '나를 위해'를 채우기 위해 그 '~를(을) 위해'의 주장을 드높인다. 자신이 누군가를 채워준 만큼 동일한 보상의 소재가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산타들은 왜 바득바득 우겨가며 굴뚝 안으로 잠입해 꾸역꾸역 선물을 놓고 가려 하는가? 선물을 받으려 하지 않으면 왜 그토록 그들은 상심한 표정을 짓는가? 누군가를 위한 도시락을 억지로 가방 속에 밀어넣은 다음, 도시락을 먹은 이가 호들갑을 떨며 도시락의 맛에 대해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왜 성난 눈빛을 하고는 다시는 절대로 도시락을 싸주지 않겠다며, 힘들게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싼 그 마음에 대해 고마운 것도 모른다며, 분노로 치를 떠는가?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것은 산타들이다. 산타들은 우.리.가. 결.코. 남.을. 위.해. 살. 수. 없.다.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이러한 말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자 하는 산타들은 여전히 모른다. 우.리.가. 결.코. 나.를. 위.해. 살. 수.도. 없.다.는. 그. 사.실.을. 모.른.다. 무엇보다도 산타가 모르는 것은 이것이다.


남. 또.는. 나.를 위.해. 산.다.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지.금.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엄청난 거짓말은 무엇일까?


인.간.은. 약.하.니.까.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바.로. 그. 거.짓.말.이.다.


이것은 다만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약하니까 그러한 자기를 모두가 도와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자기의 이득을 얻기 위해 다른 이들을 행위하게 하려는 윤리적 명령으로 위장된 '꿈'의 표현이다.


이러한 꿈은 누가 꾸는가? 자기의 무력성을 통해 부모가 성공적으로 자기를 위해 행위하게 하는 데 성공한 아이가 꾼다. 부모를 조종할 수 있었던 그 현실은 그. 아.이.의. 낙.원.이.었.다. 이러한 낙원을 유지하고자 하는 아이가 계속해서 꿈을 꾼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꿈의 소재로 변환해 자신이 그 꿈의 왕이 되려고 한다. 이를테면, 약한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산타를 자임함으로써, 실은 모든 이가 산타처럼 자신을 중심에 놓고 위해줄 그 꿈을 꾼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정말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것은 상담의 알파와 오메가다.


어.떠.한. 것.이. 꿈.꾸.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미 끝이 났기에, 꿈을 꿔서라도 어떻게든 지속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만.이. 꿈.을. 꾼.다.


꿈을 지속하려면 동력이 있어야 한다. 발전기가 돌아가야만 한다. 자극은 열역학운동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최고의 동력이다. 그러니 끝없이 자극재가 소비된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하루종일 멍하니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또는 유튜브를 보고 있는 이를 떠올려보라. 그는 증기기관차가 석탄을 소비하듯이, 그저 자극이라는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 중일 뿐이다. 오직 꿈의 선로를 달리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그는 이 일을 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중요한 하나의 현실이 끝.나.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는 열심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즉, 마치 끝이 아닌 것처럼, 끝나지 않기 위해, 꿈은 끝을 한없이 유예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것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만 같다. 이 또한 실증적이다. 그 아이의 카톡 프로필이 변화하면 그것이 마치 자기에게 보내는 '특별한 메시지'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서 세간은 쉽사리 알지 못할 아주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감격한다. 다시 그 아이와 맺어질 시간은 머지 않다. 스토커는 이렇게 탄생한다. 모.든. 스.토.커.는. 자.기.의. 꿈.에. 도.취.된.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소를 찾는 이들은 정말로 멋진 이들이다.


내.담.자.들.은. 진.짜. 용.사.들.이.다.


그들은 왜 상담소에 오는가? 끝.을. 확.인.하.기. 위.해.서. 온.다. 내담자들은 용기를 내어, 이.제.는. 끝.내.고. 싶.어.서. 온.다.


그.래.서. 모.든. 상.담.은. 사.실. 애.도. 상.담.이.다.


상.담.자.는. 하.나.의. 끝.을. 함.께.하.는. 이.다. 끝에서도 함께하는 이라고 다시 말하면 조금 더 멋있다. 요는 상담자는 내담자의 꿈이 실은 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함께 발견하고자 하는 이다.


애도란 자신이 직접 끝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애도의 핵심은 이 '주관적 체험' 속에 있다.


자.신.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그.것.은. 비.로.소. 끝.이. 난.다.


그래서 애도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애도는 아주 오롯한 '개인됨의 사건'이다.


애도의 성격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주 망각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한 제례(ritual) 때문이다. 제례는 하나의 끝이 마치 모두의 끝인 것처럼 형식화한다. 자기의 애도를 모두의 애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이 전적으로 애도의 일을 혼자 다 떠맡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에는 물론 정서적 이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례의 방식으로는 유감스럽게도 애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대상과의 현실이 끝난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된 자신의 모습 또한 함께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의. 상.실.은. 언.제.나. 자.신.의. 상.실.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가 끝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리고 세계란 언제나 '자신의 세계'일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세계'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함께 떠맡는 일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두가 형식적으로 장례열차에 탑승할 수는 있지만 그 선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집단적 비애감'의 도취 속에서 반복운동만을 한다.


이러한 반복운동을 또한 '꿈'이라고 부른다. 꿈은 영원히 닫힌 것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삶이 갇혔다. 삶은 왜 갇히는가? 그.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이.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자.신.이. 직.접. 애.도.함.으.로.써. 끝.을. 선.언.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자기의 끝을 맞이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곧 자기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들이, 결국 다른 이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고, 또 다른 이를 돌보며 대신 책임지려고 한다. 이것이 내담자들이 산타였던 때의 일이다. 그리고 내담자들은 영광된 이 산타의 꿈을 멈추고, 이제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상담소로 들어선 용기있는 이들이다.


누가 상담을 필요로 하는가? 하나의 끝을 맞이하는 이들이 그 필요를 느낀다. 상담은 끝에 대한 모든 응답이다. 정확히는, 끝에 대한 모든 응답을 배우는 일이다.


끝에 대한 응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한번 떠올려보자.


오래된 놀이동산이 이제 폐장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마지막 영업일로 하여 그 역사가 막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그 놀이동산에 서있다.


하나의 제례처럼 롤러코스터도 타보고, 대관람차에서 경치도 감상하며, 회전목마의 여유도 즐긴다. 왠지 조금은 멍한 듯한 기분으로 다양한 놀이기구들 위에 몸을 맡기며 축제의 시간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영업종료를 알리는 스피커의 안내와 함께 사람들이 퇴장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충만한 표정으로, 또 누군가는 자못 쓸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출구로 향한다. 잘 모르겠는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아본다. 놀이동산이 노을빛으로 점차 물들어가는 가운데, 놀이기구들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갈 때, 우리는 불현듯 상기하기 시작한다.


"뛰지 말고. 다쳐. 천천히 가."


직접 싼 도시락을 들고, 내달리던 아이의 뒤를 따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 공주야, 여기 봐봐."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으며 회전목마 위에 앉은 아이와 미소를 맞추던 아빠의 표정이 여기에 있다.


첫키스와 함께 문 안쪽에 새겼던 영원의 약속이 그로부터 1년 뒤에도, 그리고 오늘까지도 선연했던 것은 둘이라도 또 혼자라도 다 괜찮다는 대관람차의 약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 괜찮다며 무수한 사연들을 태우고 느긋하게 하늘을 순행하던 그 품은 정말로 영원하고픈 약속이었다.


녹슨 소리와, 낡은 몸체와, 벗겨진 페인트칠 사이로, 또 그것들을 전부 따스히 감싸안는 노을빛 사이로, 우리는 이것이 '시절의 꿈'이었음을 목격한다. 그것은 어딘가에 있던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한 꿈이었으며, 우리가 정말로 살아보았던 그 분명한 낙원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이 그 마지막의 순간이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의 '시절의 끝'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함께 이해한다. 멍하지 않다.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는 이제 선명하다. 우리는 입을 연다.


"정말로 사랑했어요."


우리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이며, 이제 한 말이다.


우리는 '시절의 꿈'에서 깨어나 그것을 정확하게 '시절의 끝'으로 맞이하여,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이 모든 것이 다 진짜의 일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펼쳐진 모든 사건은 우리 자신이 이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사건들이었다. 끝에서 우리는 정말로 이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랑.은. 그. 끝.에.서. 사.랑.이. 된.다.


애도는 우리가 잃은 사랑에 대한 위로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대체 얼마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그 확인의 시간이다. 그렇게 애.도.는. 사.랑.을. 우.리.에.게.로. 다.시. 붙.잡.아.놓.는.다. 우리는 사랑을 잃은 자가 아니라, 우주만큼 사랑했고, 여전히 더 크게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 우주다.


끝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이러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용기있는 일이다. 내담자들은 바로 이러한 용기를 내어, 그들 자신을 '다시 또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확인하기 위해 상담소를 찾은 이들이다. 사랑이 온 세계를 뒤덮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실현하려는 이들이다.


눈이 내려온다.


아마도 놀이동산의 주인일지 모를 산타분장을 한 선량한 이가 우리의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아직도 기억해주시고 많이 사랑해주셔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똑같이 깊은 감사를 나누며 놀이동산의 출구로 향하는 우리의 뒤편에서, 모든 놀이기구가 마지막 힘을 다해 환하게 불빛을 밝히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절의 음악이 흐르고, 시절의 마음도 흐른다. 마지막 인사를 영원의 기쁨으로 전한다.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그 빛과 음악이 이제 우리의 가슴 안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하얀 눈이 내려와 시절을 착하게 덮어간다.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겨지는 것이다.


산타가 인사와 함께 건네준 크리스마스 캔디를 입에 넣어본다.


그것은 무슨 맛이었나?


달고, 시고, 씁쓸하고, 아리고, 은은하다.


인생의 맛이다.


아껴두던 그 맛을 보면, 녹아서 이제 사라질 것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한국의 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라질 것들이 참 생생하기도 하다."


우리는 끝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끝으로 살아간다. 스스로 사랑으로 살아간다.


상담자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끝내는 이 끝을 함께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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