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팔이"
"이거 얼마에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소비자를 아래로 내리까는 자신의 권위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꾀하는 이 짓거리를 예전에는 '용팔이'가 했지만, 요즘에는 '융팔이'가 합니다.
시대는 융팔이들이 번성하기에 좋습니다. 요즘 인싸들의 자기소개 도구라는 MBTI를 들먹이며, 이 MBTI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융의 분석심리학을 깊이있게 알아야 더 효과적인 자기이해를 이루며 남들에게도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식의 말은 융팔이들이 자주 활용하는 영업멘트입니다.
물론 융팔이들은 슬그머니 MBTI를 비판하면서, 너무 거기에 빠지지는 말고 선별적으로 MBTI를 적용해야 하며, 그보다는 그 원조인 융을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심리학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융팔이인 자기들이 파는 융이 대단히 수준높은 것이고, MBTI는 낮은 수준에 위치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입니다.
융팔이들은 영화나 소설 등을 분석하여, 융의 분석심리학이 얼마나 우리 삶의 구조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지의 실증적 사례로 내세우곤 합니다.
정말로 그러한 융팔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져 보입니다. 분석심리학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설명가능한 것 같습니다.
융이 정확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융의 이론을 토대로 그 영화와 소설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MBTI를 만든 캐서린 쿡 브릭스와 그녀의 딸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심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였듯이, 융도 실은 소설가입니다.
그래서 소설가들이 융을 아주 좋아합니다. 융의 이론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 뒤, 그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으면, 융의 이론이 이처럼 우리의 삶을 잘 보여준다고 말하곤 합니다. 짜고치는 고스톱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융이 단순한 소설가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문학비평가입니다. 융은 신화연구에 매진함으로써, 신화들의 문법구조를 분석해서 그 작법을 도출한 이입니다. 신화의 장르공식을 보편화시킨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업적입니다. 융은 문학계의 걸출한 인재입니다. 작품들의 분석도 가능하면서, 자기 작품을 쓸 능력도 있었던 보기 드문 문학계의 재능입니다.
그가 쓴 소설은 실제 삶과는 다르지만요.
그가 쓴 소설이 심리학은 아니지만요.
소설가가 자기가 쓴 소설에 근거해서 심리학자 내지 심리상담자로서의 권위를 얻으려는 모습, 이것이 융팔이의 전형입니다.
이런 융팔이들에게 팔리는 융도 어지간히 불쌍한 인물입니다.
문학계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할 이가 고작해야 중2병적 망상을 위해 소비되고 있다는 것은, 평생 프로이트를 넘어설 최고의 권위를 얻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융에게는 만족스러운 현실은 아닐 겁니다.
옛날에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던 이들이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융의 책을 빌려보며, 융을 최고의 심리학자처럼 보게 된 경험은 일상적입니다. 심리학이라는 것을 마치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논리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주원인이 사실 융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현실을 극적으로 뒤바꿀 마법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사회부적응자의 기운이 있는 이들이 융을 자주 소비합니다. 자동적으로 융에게 끌립니다. 융도 그러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대단한 프로이트를 이기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 으으."하며 분열되어 고민하던 융이 발견한 솔루션이 바로 마법입니다. 진담입니다. 금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중세의 연금술이라는 마법에 심취함으로써 융은 자신이 프로이트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런 융을 병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잘 쓰는데 소설이나 쓰지, 왜 심리학을 해서 병신이 되려고 해?"
아마도 이것은 프로이트가 융을 보던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말했듯이, 융은 판타지 소설가로서는 독보적인 천재의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융팔이들은 소설도 못쓰면서, 쓰지도 못한 소설을 최고의 심리학이라고 팔려 해서 문제입니다.
즉,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팔려고 합니다.
그래서 용팔이나 융팔이나 사기꾼의 대명사처럼 된 것입니다.
용팔이는 소비자보다 자기가 더 해당분야의 고급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지식자본가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파는 용팔이는 자기가 게임전문가라고 생각하고, 그래픽카드를 파는 용팔이는 자기가 하드웨어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만들지도 않고, 그래픽카드를 개발하지도 않았으면서,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자임하는 것이 용팔이입니다.
유튜브 영상을 몇 개 보고 나무위키를 찾아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자기의 지식자본으로 여기며, 소비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그 비루한 자본력에 근거하여 소비자보다 더 높은 권위를 얻으려고 말도 안되는 짓을 하는 것이 곧 용팔이입니다.
예전에 해당분야의 정보취약자였던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게임기를 사러 왔을 때, 그 아버지를 호구잡아 뜯어먹던 악질적 습성이 이 열린 정보의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성공경험이 잘못된 권위의 정체성을 형성해버린 것입니다.
융팔이들이 정확하게 이러합니다.
예전 하이텔이나 천리안 등의 오컬트 동호회 등에서 소수의 선각자들끼리만 공유하던 것 같은 소위 신비한 정보를 '무지한 이들'에게 은총처럼 내려주던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융팔이는 영원히 융팔이로 남습니다.
병신같은 판타지 소설을 비싼 돈과 또 극진한 감사까지 받으며 팔던 그 경험이 짜릿해서 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판매의 소재가 융인 이유는, 이제 거의 유일하게 융만이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마지막 판타지 소설군에 속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화학이라는 전문분야가 생겨난지도 이미 오래전의 일입니다. 더는 융을 심리학에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융의 위대한 업적이 더욱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정당한 영토는 심리학 밖에 더욱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판타지를 소재로 게임이나 웹툰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융의 분석심리학은 그야말로 자원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에 융팔이들이 발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늘날의 인기있는 판타지 컨텐츠 생산자들이 자기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융이 팔려야 하는 그 분야로의 방향성은 차단한 채, 심리학 상가에서 융팔이 매장만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좀 모자라고 병신같은 호구들이 낚이기만을 기다리며.
융팔이들이 융을 욕먹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융팔이들은 분석심리가들도 아주 엿먹입니다.
분석심리학으로 상담을 하기 위해 분석심리가들은 정말 많은 공부를 합니다. 국제분석학회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긴 시간의 수련과정을 거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최고 장점은 일관된 성실성이기 때문입니다. 안 팔려도 꾸준히 쓰는 소설가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분석심리가들의 인상도 수줍은 문학소년소녀들의 면모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잉되지 않게 차분한 지적 향기가 나는 이들입니다. 시골 역무원 같은 낭만적 색채도 좀 있습니다.
융팔이들과 분석심리가들을 구분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정말입니다.
분석심리가들은 분석심리학과 다른 것을 통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분석심리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를 좋아하는 이가, 조이스의 소설과 다른 소설을 통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애초에 다른 것을 굳이 건드릴 시간이 분석심리가들에게는 없습니다. 평생 융만 파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이처럼 융에 대해 깊게 파지도 않은, 그래서 실은 융을 잘 모르는 이들이 융팔이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차라리 나무위키가 융팔이들보다 융에 대해 더 깊이있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융 얼마에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아... 저 MBTI로 융 접해서 더 알아보려고요."
"에구, 우리 고객님, 융은 MBTI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거구여. 페르조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셀프, 대극의 합일, 이런 거 아직 모르시져??? 고객님이 MBTI 생각하고 오신 거면 가격 더 생각하셔야 돼여. 요즘 융 시세가 다 그래요. 제대로 자기 마음 알려고 하는 전문적인 분들이 많이 찾으셔서 물량이 별루 없어여. 저희도 하나 남은 과정 파는 거예여."
"와... 진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시네요. 저 여기 안 왔으면 완전 다른 데서 호구당했겠어요. ㅠㅠ 제가 바로 살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인생을 구원해주셨어요."
"별 말씀을여. 사랑합니다 우리 고객님. *^o^*"
한 번 속아야 융팔이라고 욕도 가능하지, 거듭해서 융팔이를 소비한다면 그러한 이는 융팔이 지망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심증일 겁니다.
세상에 융팔이가 많아, 정말로 융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주 답답하고 속이 터집니다.
분석심리가들과 연결되고자 한다면, 한국분석심리학회(http://www.carljung.or.kr/)를 방문해서 어떠한 분들이 있는지를 찾아보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전문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융팔이들을 찾기보다 진심으로 나무위키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차라리 나무위키가 훨씬 깊습니다.
물론 융팔이들은 직접 대면해서 사사받아야 융을 더 쉽게 진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겁니다. 융팔이와의 대화를 통해 흐르는 무슨 신비한 기운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흐르는 것은 그저 융팔이의 기운일 뿐입니다. 융팔이를 소비하면 할수록 소비자도 융팔이가 됩니다.
결국에는 자기보다 못나보이는 이들에게 똑같이 뻥이나 쳐대겠죠.
융팔이들한테 뭘 사봤자 그 소재로 인싸가 못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존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실제적인 힘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융팔이가 그러한 상태니까요. 그 모든 것이 다 있었으면, 그는 지금 융팔이가 아닐테니까요.
최고의 지성을 가진 당신이 설령 융이 필요하다고 말한들, 그러한 당신에게 융팔이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당신이 병신같은 삶을 살아선 안됩니다.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