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상담의 현자놀이"
상담자 중의 상담자를 한 명만 꼽으라고 하면, 가짜 상담자들은 밀턴 에릭슨이라고 대답하고, 진짜 상담자들은 칼 로저스라고 대답합니다.
칼 로저스의 인본주의 상담은 그만큼 가장 고급의 상담접근으로 평가받습니다. 이것이 고급인 이유는, 메뉴얼이 없고 오직 상담자의 인격을 통해 이루어지는 접근인 까닭에 잘 발달된 상담자가 아니라면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그래서 역으로 상담자로서의 권위를 얻고 싶어하는 이들은 자기가 인본주의 상담을 하고 있다고 곧잘 말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코미디가 펼쳐집니다.
로저스가 그의 저작에서 직접 말한 바, 인본주의 상담의 철학적 기원은 실존주의입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정신분석, 분석심리학, 인지치료, 행동주의 등의 접근들과 양립하기가 불가능한 접근입니다. 최면, NLP 등과 같은 것들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본주의 상담 또한 상기한 접근들과 맥을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양육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접근과, 양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접근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디에나 공부는 지지리도 안하면서,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망상증 환자들은 있는 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바로 '통합'입니다.
이들은 애초에 통합될 수 없는 소재를 통합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기가 어떠한 것들을 통합할 깜냥이 안된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이려는 일에만 매진하다보니,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자신이 멍청하게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누군가는 자기가 분석심리학과 인본주의 상담을 동시에 활용해 상담을 한다고 말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묘사해서, 전자는 경험보다 경험 이전의 것인 선험이 압도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입장이고, 후자는 선험을 치운 뒤 경험이 전부라고 말하는 입장입니다.
"선험도 챙기고 경험도 챙겨야죠. 둘 다 해야 좋은 거잖아요. ㅎㅎㅎ"
그렇죠.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연애도 잘 하고, 돈도 잘 벌고, 취미생활도 잘 하고, 히어로가 되어 사람들도 잘 구하고, 우주여행도 잘 하고, 죽어서 천국에도 잘 가고, 다 잘 하면 좋은 거죠.
그런데 옆집 미선이와 사귀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것을 동시에 통합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더 단순하게, 앉는 일과 서는 일을 동시에 통합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처럼 되도 않는 말이 자기에게는 행위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 인본주의 상담을 팔아먹습니다.
인본주의 상담과 정신분석도 통합하고, 인본주의 상담과 행동주의도 통합하고, 심지어는 최면이나 NLP를 하는 이들도 자기들이 인본주의 상담을 한다고 말합니다.
인본주의 상담에 정해진 메뉴얼이 없기에, 자기 좋을대로 갖다붙이고들 있는 수작입니다.
인본주의 상담을 한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수준높고 멋있어 보이거든요.
특히 아주 '현자'처럼 보이는 데 제격입니다.
우선적으로 이 인본주의 상담을 하는 현자처럼 보이는 첫 번째 방식은, 젠틀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다 받아줄 것 같은 친절한 교사 같은 언행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연출의 주체가 나이가 조금 있는 경우에는, 서글한 눈가의 주름에 인생의 지혜가 담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일에 보다 주력하면 됩니다. 간달프, 요다, 마더 테레사, 뭐 대충 그런 흉내를 내면 됩니다.
뭘 몰라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아, 이 분 내 마음 벌써 다 아시는구나! ㅠㅠ"하며 알아서 자진납세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대사는 언제나 촌철살인의 효과를 갖습니다.
"어린 것이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겠누."
'혼자서'라는 말에 강세를 꼭 부여해야 합니다. 그럼 다 스르르 녹아 개밥이 된 팥빙수처럼 허물어집니다. 현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권위가 헌납될 겁니다.
연출의 주체가 아직 충분한 나이가 되지 않은 경우에는, 신사적인 국민 MC처럼 보이는 일이 유효합니다. 최소한 상의로는 싱글 2버튼의 자켓이나 부드러운 가디건을 입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슴 속에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불타고 있으나, 그 불길이 고요하게 갈무리되어 아주 차분하고 상냥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내뿜어지고 있는 표정을 연출하면 됩니다. 아무래도 나이빨을 받지 못하면 조금 더 연출의 난이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마음은 온전합니다."
"그 마음도 괜찮습니다."
"우리 한번 마음의 이야기를 같이 만나볼까요?"
"당신의 소중한 마음 이제 제가 듣겠습니다."
"당신 안에 울고 있는 마음아이를 안아줄게요."
영화관에서 나오는 현대해상 광고카피 같은 그 어떤 대사라도 편한대로 골라 사용하시면 됩니다. 너그럽고, 상냥하고, 품이 넓은 사람인 척한 다음에 인본주의 상담이라고 붙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아직 젊은데도 뭔가 의식이 깨어있고, 예의바르며, 바른 길을 가는 선한 선비처럼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남들이 대단하게 볼 만한 신비한 능력 하나를 추가하면 됩니다.
보통 이 능력으로 권장되는 것은 '아무 것도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자처럼 보이려는 이들은 자기가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패시브 스킬처럼 마음을 알게 되는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자주 홍보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실체는 사실 이러합니다.
소변을 억지로 참는 버릇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고집스럽게 참아냅니다. 아마 어렸을 때 타이밍을 못맞추고 기저귀에 지리면 엄마가 무섭게 혼내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알 바 아닙니다.
그러던 이가 한번은 몸도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서 인내력이 떨어진 결과, 자기도 모르게 소변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눈을 번쩍 뜹니다.
'아아, 내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이렇게 평온해지는구나. 그동안 왜 그렇게 버티고 고집을 부리며 살았던가. 모든 것이 참 여여하고 평화롭구나. 참 좋은 시간들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놀라운 경험을 했다며 사람들에게 자기가 발견한 놀라운 깨달음을 전하려 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놀라운 마음의 비밀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최신의 심리학 정보입니다. 너무나 고급의 정보라 이걸 공개하면 악용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빨리 이 좋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여러분을 신뢰하며 이제 말씀드릴까 합니다."
다들 집중합니다.
"여러분.... 화장실에 앉아 가만히 계시면.... 소변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당당한 여러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부디 애씀없이 소변누시길..."
또 다른 버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비를 맞고 계시면... 몸이.... 추워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당히 추워지세요."
"여러분... 가만히 한여름에 나와 계시면... 몸에서... 땀이 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이 여러분 자신의 권위로 땀을 흘리십시오."
"여러분... 가만히 일주일간 방에 계시면...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냄새는 소중한 여러분의 것입니다."
물론 화장실에 가서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변이 나온다는 것을 아는 인류의 99.99%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소외되어 있을지 모를 인류의 0.01%를 위해 놀라운 비밀을 전하는 현자들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소변을 봐야 하는데 메뉴얼이 없어 힘들었던 그 0.01%의 인류에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놀라운 경험을 통해 메뉴얼을 집필하여 전한 그 정성은 어찌나 갸륵한지요. 인본주의 상담의 현자는 참 친절한 교사이고 선한 선비입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 상담에는 왜 메뉴얼이 없었을까요?
숨을 쉬는 일에 메뉴얼이 필요하지 않은 것과 같을 겁니다.
"숨쉬지 말아야지, 숨쉬지 말아야지."라고 이상한 찐따짓을 하며 고집을 부리던 이에게나 숨쉬는 메뉴얼이 필요한 것처럼 착각됩니다. 심지어 그가 어떠한 메뉴얼에 따라 숨을 쉬게 되었다고, 그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도 아닙니다.
이상한 짓을 그만두면 대단한 것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것이 됩니다. 그냥 행인 A입니다. 이건 현자도 상담자도 아닌 그냥 말 그대로의 행인 A입니다.
로저스에게 있어 상담이란 것은 가만히 있으면 당연하게 마음을 알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로저스는 여여한 현자가 아니라 열정적인 혁명가에 가깝습니다. 그는 마음의 혁명가입니다.
그러니 인본주의 상담을 액세서리로 써서 현자를 연출하려는 이들의 기획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실패작입니다.
마음은 기상현상과 같습니다. 비를 맞으면 비를 알게 되고, 바람을 맞으면 바람을 알게 되듯이, 마음을 경험하면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경험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모르는 이는 사실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척할 뿐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열심히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뿐입니다.
모르는 것이 정말로 아니라, 단지 말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마음에는 현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아는데 무슨 현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언제나 현자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상담자의 역할이 아닙니다. 상담자는 로저스처럼 혁명가의 역할을 맡습니다. 어떻게 정직하게 마음을 사는지의 그 본으로 드러나는 역할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인본주의 상담에서 채택될 수 있는 상담자의 정당한 역할입니다.
아주 쉬운 말로 하면,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그렇게 상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들 앞에서 그런 척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척함으로써 그렇게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로저스의 상담이 어렵다고 말해지는 진짜 이유는, 메뉴얼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본주의 상담을 하려는 이들은 자신의 양심 앞에 정직하게 열려 있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로저스가 자신의 상담에 담긴 철학이 실존주의라고 선언한 것은 그의 말년의 일입니다. 실존심리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구축해왔습니다. 그렇게 이미 그 자신의 것만으로 최고의 상담자로 평가받던 로저스가 "나도 이제 실존상담자라고 불리고 싶다."라고 말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로저스가 아주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본주의 상담이 상담자의 인격을 통한 상담이라고 할 때, 이 '인격'은 유교식의 인의예지를 갖춘 이의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본주의 상담은 씹선비들의 현자놀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인격의 핵심은 '정직성'입니다.
정직한 이라면 일부러 긴장상태를 유지했다가 그 끝에 찾아오게 된 이완감을, 위대한 레벨업의 증거인 것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마음에는 근육이 없습니다. 긴장과 이완의 연쇄작용 끝에 그냥 0이 되는 것뿐입니다.
정직한 이라면 또한 비를 맞아 몸이 추워지는 일에 대해 "난 아무도 모르는 놀라운 추위의 비밀을 알았어!"라고 대단한 것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바보 말고 이미 남들은 다 알고 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비밀인 것처럼 얘기하니, 남들도 같이 바보가 되어 그것이 정말 신비한 비밀이기라도 한 양 권위를 얻게 되는 것뿐입니다.
정직한 이라면 당연하게도 인본주의 상담과 융, NLP 등을 섞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가 부정직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로저스가 하지 않은 것만을 골라하는 이들이 인본주의 상담자라고 자칭합니다.
현자놀이를 하고 싶다면 로저스는 좋은 소재가 아닙니다. 밀턴 에릭슨이 좋습니다. 어느 자리에 가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권위를 자발적으로 헌납하도록 부드러운 독재를 펼치며 늘 자신이 제일 높은 권위를 얻으려 했던, 그야말로 최고의 현자놀이를 위한 기능재입니다. RPG에서도 항상 법사 캐릭터만 고르는 우리 현자유망주들에게 추천합니다.
현자놀이가 아니라 혹시 인본주의 상담을 정말로 하고 싶다면 우리에게는 이 제안들이 아주 유효합니다.
사기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고집부리지 말고, 자기최면걸지 말고, 남의 얘기인 척하지 말고.
이 제안들을 긍정형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을 겁니다.
"정직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세요."
실존상담자인 저도 가장 사랑하는 상담자는 칼 로저스입니다. 책 읽다가 맨날 웁니다.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게 도와준 중요한 분 중의 하나도 당연히 로저스입니다. 로저스를 읽고, 일하던 직장을 망설임 없이 나온 뒤 상담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까요. 정말 지적이고 과격했던 상담자 중의 상담자에게 남다른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