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쓸모있는 놈이 되어야지"
"가족들을 위해서도 쓸모없고, 친구들을 위해서도 쓸모없고, 배우자를 위해서도 쓸모없고, 내 아이를 위해서도 쓸모없고, 왜 이 모양이지, 나란 놈."
다들 이게 고민 아니십니까?
쓸모있는 놈이 되어 상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 다들 이게 소망 아니십니까?
이게 관계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논리가 모든 고통의 이유입니다.
혹자는 뭘 좀 아는 양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에궁. 사는 거 자체가 고통인 게지요. ㅎㅎ 그냥 또 하루하루 버텨가는 거, 그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후의 성실함이죠. 인간의 자긍심이고. 우리가 서로를 위해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 일만큼 우주에서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ㅎㅎ"
지랄옆차기를 당해서 샌드백처럼 터져버린 김밥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말이나 됩니까? 존재는 고통의 이유가 아니며, 우리는 그딴 식으로 살라고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관계의 논리가 만들어낸 엄청난 착각이 작용합니다.
관계는 존재를 유용성의 가치에 종속시킵니다. 즉, 유용하면 그 존재가 정당해지는 것이고, 유용하지 않으면 존재해선 안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재의 도구화'라고 말합니다. 도구화된 존재는 소외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것은 '존재의 소외'입니다.
'존재의 소외'는 절대로 추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실제적인 상태입니다.
자극재 없이는 사는 일이 재미없고, 무기력하며, 자기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끊임없이 남들에게 알려야만 괜찮아지는 것처럼 경험하는 상태, 이것이 존재가 소외된 상태입니다.
"너 나한테 불필요한 존재이니까 살아선 안돼. 살고 싶으면 나에게 니 유용성을 증명해봐. 그래야 내 아들이지. 그래야 내 남편이지. 그래야 내 친구지. 그래야 내 부모지. 그래야 민주시민이지. 그래야 인간이지."
저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저주입니다.
이 저주를 때려부수기 위해 목숨도 건 이들이 종교적 선각자들입니다.
미디어에서는 늘 관계가 모든 것의 만능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예찬합니다. 공부를 좀 했다는 이들도 관계를 신격화합니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관계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깨닫지도 못한 이들이 자기 머릿속에서 듀플로처럼 짜맞춘 유치한 판타지소설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일은 언제나 코미디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실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오히려 고통에 대한 신성한 치유재인 것처럼 숭배하고 있으니, 고통이 멈출 날이 없습니다.
관계가 하는 진짜 나쁜 짓은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관계에 봉사시키는 협박의 소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너 내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존나 무책임하네. 나도 너의 노예가 되어줄 건데, 왜 너는 노예가 안된다는 건데? 이거 부당한 거 아냐?"
이처럼 관계는 관계에 속한 모두를 노예로 만듭니다. 그리고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그 노예제를 유지시키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누구도 행복한 이는 없습니다. 다 죽지 못해 그냥 삽니다. 다만 그래도 자기는 인간적인 도의를 다했다는 해병대 할아버님들 같은 자위적 만족감과 입가에 진득한 막걸리 냄새만 남습니다.
책임은 원래 자기의 인생을 향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남의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걸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책임의 범위를 자기의 인생으로 국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정직하고 겸허한 자기고백입니다.
그러나 관계는 모두에게 신이 되라는 표면적으로 아름다운 책임의 의무를 부여하면서,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비참한 노예가 되게 합니다.
자신이 직접 노예로 살기를 선택했다고 말해본들 뭐가 달라집니까? 똑같은 노예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선택했다고 말을 하지만, 종국에는 남을 원망하게 되는 게 노예의 생리입니다.
한 사회에 증오와 혐오의 정도가 높을수록, 그만큼 노예가 많다는 심증을 우리는 가져볼 수 있습니다. 관계의 저주가 심화되어 있는 사태입니다.
부모나 사회에 자기가 유용하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경험하는 이들은 무엇을 합니까? 게임을 합니다. 게임 속에서는 자기의 역할을 누군가가 필요로 해주며, 그로 인해 좋은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럼으로써 게임 속에서만큼은 자신이 정당하게 존재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게임 속으로 피난갔습니다.
일상도 최대한 게임처럼 살려고 합니다. MBTI 등을 통해 자기의 특성을 잡고, 캐릭터메이킹을 합니다. 남들에게 유용한 역할로 기능하기 위해 맞춤형의 캐릭터를 구성합니다.
요즘 멀티플레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재미가 없는데도, 캐릭터를 고르고, 레벨을 올리며, 플레이스킬을 숙련시킵니다. 게임을 못하면 추방당할까봐 두렵습니다. 결국 피난간 곳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전쟁터를 만납니다.
코인 등으로 한탕을 노리고, 대박아이템을 찾아 헤매며,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도 자기와 놀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돈은 오늘날 유용성의 결정적인 소재입니다. 가장 관계의 논리로 작동하는 것이 또한 돈입니다. 개인 자신의 역량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보증해주는가가 돈을 모으는 일에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다들 인스타에서 꽃등신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기를 팔아먹으려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관계의 협박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만한 유용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너는 우리로부터 추방될 거야. 그러면 너는 찾는 이 없이 외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홀로 병들어 죽게 되겠지. 고독사한 니 방을 청소업자들이 시발시발 욕하며 치우다가, 니가 끝내 못지우고 간 하드디스크의 야동폴더를 보며 니가 얼마나 찌질이 변태인지를 세상에 알리게 되겠지. ㅋㅋㅋㅋㅋ"
와, 그러니 관계를 잘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드디스크만은 제발......
관계의 협박이 이런 식입니다. 상대에게 가장 취약해보이는 요소를 공략해, 관계에 붙잡아두려고 합니다. 이것은 관계에 속한 모든 이가 서로에게 집행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관계가 사람들을 이렇게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마치 생물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의 기운이 조금씩 모여져 생겨난 추상계의 생물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생겨났지만, 사람들 위에서 준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종교적 경지 및 상태로서 얘기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관계라고 하는 생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꿰뚫어볼 때, 관계는 무생물의 위격으로 돌아갑니다. 인간 위에서 깝죽댈 수 있는 소재가 애초 아닙니다.
그러나 이 관계라는 생물에 에너지를 더 많이 줘서, 관계가 더 강력한 힘을 갖도록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매우 자주 강력한 권위를 추구합니다.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권위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관계라는 생물의 하수인들입니다. 악마의 신부 같은 것입니다. 또는 호랑이를 배불리기 위해 사람들을 유혹하는 창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체는 외로운 아이들입니다.
자기가 외롭기 때문에 같이 놀아줄 사람을 찾아서, 이 아이들은 더 많은 이를 관계 속에 가두려 하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같이 뜨개질도 하고, 팽이도 돌리고, 공기놀이도 하면 덜 외로울 것 같아서입니다.
엄마가 출근하려고 할 때 현관 앞에서 놀아달라며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과 같을 겁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런 걸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아이들이, 나이가 든 뒤에 관계의 논리로 이 일을 합니다.
머리가 다 벗겨진 대머리 부장님이 늘 근엄한 표정과 말투로,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관계의 윤리를 강조하던 것은, 부장님 안에 푸른 초장 같이 가득 휘날리는 싱싱한 머리숱의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윤기나는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우리에게로 뛰어옵니다.
"아잉, 나랑 놀아줭~ ^0^"
이러면 놀아줄 수도 있는데, 자기랑 놀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이며, 민족의 배신자이자, 인간의 결격사유라고 말하니, 같이 놀기가 싫어집니다.
관계가 늘 '떼쓰기'의 논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자기의 '필요'이면서, 상대에게 그것을 '의무'로 요구합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자신이지만, 그 물을 떠다바쳐야 하는 것은 상대가 되는 셈입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이 시대의 정신나간 목소리가 이 관계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나아가 강화하기까지 합니다. "관계의 상대에게 요구하고 싶은 거 다 해."가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자영업자들은 대표적인 희생양입니다.
이 촌극은 아주 근본적인 착각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관계의 상대도 자기만큼 외로울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식으로 자기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어, 관계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는 소망이 상대에게도 있다고 당연하게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대체로 맞는 것 같습니다.
다들 외로워하기에, 관계가 지긋지긋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관계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관계의 논리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존재는 도구화가 되어 더욱 소외되고, 우리는 더욱 외로워집니다. 그래서 더욱 관계를 찾게 되는 방식으로 악순환은 펼쳐집니다.
그럼 우리는 왜 다들 외로워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이 원래 외로운 것이 운명이라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아빠가 계속 놀아줄 것이라고 기대해서 우리는 외로워졌습니다. 엄마아빠처럼 놀 대상을 계속 기대하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 외로워집니다.
이것은 마마보이, 마마걸의 외로움입니다.
혼자 놀 줄 모르는 이들의 외로움입니다.
게임도 혼자 할 줄을 모릅니다. 지나친 애착과잉입니다. 뭘 하든 늘 누군가가 지켜봐줘야 하고, 자기를 주시해줄 카메라를 항시 꿈꾸며, 칭찬해줄 이가 없으면 의욕이 급추락합니다.
자신을 즐기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이처럼 외로움을 패시브 스킬처럼 경험합니다.
자신을 즐기려면 역으로 자신이 아닌 것에 몰입해야 합니다.
이것은 황금률입니다.
레고에 빠져 있는 아이는 자신을 잊습니다. 그것이 몰입의 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은 채, 아이는 자신의 시간을 오롯하게 창조의 힘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 결과물도 황금처럼 빛이 납니다.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몰입이 빚어낸 스스로의 예술인 것이며, 바로 이것을 우리는 진짜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 순간, 이 창조적 아이는 '쓸모없는 놈'이었습니다. 그는 어디에도 유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부응하여 필요를 채워주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고로 사랑스러웠습니다. 앙, 하며 볼을 깨물어주고 싶습니다.
"쓸모있는 놈이 되어야지."라고 하는 관계의 논리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워지는지 아십니까?
사랑스러움은 자연스러운 존재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사랑스러울 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품에 안겨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의 품 안에 있는데 외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일수록, 자기 자신임을 즐길수록, 우리는 전혀 외롭지 않아집니다.
이것은 진짜로 가능한 마법입니다.
우리가 온전하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관계의 논리를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들은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했던 방식으로 이중메시지를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관계를 떠나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자기는 온전함이라는 언어적 이득을 누리고 싶으면서, 동시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종속시켜 자기의 외로움을 덜 소재로 쓰고 싶을 때, 이러한 양아치 짓을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그 앞에서 건강한 선비흉내를 내고 있거나, 약장수처럼 아양을 떨고 있다면, 온전함이라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그 말로 인해 사람들이 무진장 헷갈려지게 됩니다. 이런 것을 혹세무민이라고 합니다. 사기꾼들이 하는 일입니다.
놀이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사기는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아 놀이대상으로 삼는 일입니다.
자기가 별로 유용한 존재가 아닌 것 같을 때, 우리는 사기를 칩니다. 거짓으로 만들어낸 유용성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이 자기랑 놀아주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 필사적인 것입니다.
자기 집에 게임 100만 개 있다며, 한 번도 집에는 데려가지 않으면서, 친구들을 유혹하기만 하는 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친구들이 끼워준 발야구를 하며 아이는 자기의 놀라운 천재성으로 친구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할는지는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쌍함만이 더해지는 소재가 될 뿐입니다.
아이가 외로워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그 모습이 불쌍합니다.
이것은 마치 공사현장에서 자기가 병신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에 불만을 가진 젋은 인부가, 자재들 사이에서 기어나와 자기에게 다가온 새끼고양이를 발로 걷어차 멀찌감치 나뒹굴게 한 뒤에, 그럼에도 또 다시 자기에게 울부짖으며 다가오는 그 새끼고양이에 대한 또 한 번의 발길질을 준비하며 짓는 미소를 보는 감각입니다.
고양이를 괴롭히던 그 인부는 자기를 괴롭히던 중입니다. '병신 같은 것'을 괴롭히며 짓던 그 가학의 미소는 자기 자신의 더 아파질 가슴을 향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절 우리에게 참혹할 정도로 가학적인 이 '관계'라고 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의 상태가 이러합니다.
관계하는 당신이 무척이나 불쌍합니다.
이제 자신을 불쌍하게 하지 마세요.
정말로, 정말로, 스스로를 즐기며 창조적으로 혼자 노는 법을 모르시겠다면, 지적이고 과격한 카페 어웨이크닝으로 놀러오세요. 쓸모없는 것들이 쓸모없는 것들이나 만들어내며 일하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같이 놀 수 있습니다. 집에 가서는 이제 혼자도 놀게 되실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답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당신의 답이 맞습니다.
쓸모없는 것으로서 혼자 논다는 것은, 당신이 이제 답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스러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