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떡같은 자존감"
깨달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존재한다는 게 콜라캔처럼 이렇게 확실하고 당연한 거였는데, 왜 그동안 무수한 이야기들을 소비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너무나 이상하네요."
그건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우리 삶에 아주 근본적이고 사실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는 표류하지 않게 됩니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도취하며 공중에 붕붕 뜨지도 않고, 구명줄을 잃은 잠수부처럼 우울하게 해저로 가라앉지도 않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안정된 근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거할 수 있는 중심을 찾은 것입니다. 늘 무게중심이 잡히니 흔들리는 일은 재미있기까지 하게 됩니다. 오뚝이를 생각해보세요. 넘어져도 금방 일어납니다. 실패와 좌절로부터 금방 기운을 차립니다.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묘사되곤 하는 상태입니다.
늘 성공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상태가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이 상태가 정말로 좋은 상태입니다. 이게 바로 모험이 가능한 상태라서입니다.
모험은 세계를 넓히는 일입니다.
세계가 넓어지면 자신이 넓어집니다.
자신이 넓어지면 당신이 자유로워집니다.
존재의 발견이 자유의 증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수상한 초자연적 얘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비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과 같은 수행론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자존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존감(self-esteem)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체험 연구의 전문가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임스는 종교체험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다루면서 그 핵심을 존재에 대한 지각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심리에는 언어를 넘어선 존재를 감각할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이 발현되어 경험되는 것이 종교체험이라고 그는 보았습니다.
심리학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제임스는 일종의 존재론적 심리학을 구성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임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자존감이라는 용어가 존재의 함의를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자존감, 즉 '자기존중감'은 동시에 '자기존재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스스로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외적인 대상물에게 의존하거나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존재는 언제나 이러한 방식으로만 존재합니다. 스스로 100%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 36% 존재하다가 그래프가 상승해서 87% 존재하게 되는 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개떡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경우가 있으시면, 아 이게 세상에서 제일 개떡같은 말이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디 라노벨에 나올 법한 대사처럼,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감이 약한 이가 좋은 이야기를 많이 소비하는 만큼 더 멋진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부족한 부분은 그걸 보완해줄 이야기를 통해 극복하게 될 수 있다는 식의 말입니다.
더 많은 마약을 소비하는 만큼 더 뿅 갈 수 있고, 사람마다 그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맞춤형 마약이 있다는 말과 근본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은 가장 큰 핵심입니다.
어떤 소재를 써서 채울 수 있는 존재감이라면 그런 존재는 이미 허상입니다. 존재 대신에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걸 존재인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내어 소비한다고 존재가 세워지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그럽니다. 자기 안에는 다양한 자신이 있고, 그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각각의 목소리로 살려줌으로써 더 풍요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인간이 무슨 게임캐릭터입니까?
푸드코트에 가서 좋아보이는 것은 다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욕심쟁이 아이들이, 김치찌개를 먹는 점잖은 나, 짜장면을 먹는 위트있는 나, 돈까스를 먹는 지적인 나, 이런 식으로 캐릭터 설정놀이를 하며 자기를 분열시킵니다.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는 포켓몬 놀이 같은 것입니다.
"내 안에는 김치몬, 짜장몬, 까스몬이 있어요. 얘네들이 다양한 개성으로 나란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어줘요. ^^"
그리고 이런 포켓몬들을 잘 사육하는 트레이너로서의 정체성을 핵심의 정체성으로 설정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와 같은 입장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엄마의 정체성이 내면에 있는 무수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민주적으로 잘 살려줌으로써 그것들이 비로소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이는 지금 엄마가 잘 양육해줘야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잘못된 말입니다.
자존감은 남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자존감에 대한 아주 큰 착각입니다.
어떠한 일을 잘 해내서 엄마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았을 때 생겨나는 것, 그것은 자존감이 아닙니다. 자존감이 존재와 관련된 용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특정한 조건을 달성해서 존재가 증대될 수 있다는 말은,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존재가 감소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존재가 무슨 호박엿도 아니고, 엿장수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설처럼 잘 써내면 존재가 증대되어 자존감이 높아지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그 소설이 인기도 얻게 되면 자존감이 더욱 강화된다는 식의 말은, 존재와 가장 반대편에 있는 말입니다.
남에게 전시하기 좋은 조건을 충족시켜 마치 괜찮은 존재처럼 보이려 하는 이들의 자존감이 실은 형편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인 줄 압니다. 그렇게 늘 존재 대신에 존재의 대체품을 소비합니다. 소위 짝퉁매니아들입니다. 그러니 늘 심장이 쫄립니다. 겉만 화려하게 치장해놓은 텅텅 빈 껍데기 속에서 곰팡내를 풍기며 썩어가는 개떡같은 자신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합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로 자기를 무장하고자 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자기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일견 건강해보이는 의도는 사실 자기에 대한 이야기 속에 자기를 숨기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정작 대체불가능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집단적 동질감을 얻고자 이러한 일들을 합니다. 집단적 동질감이야말로, 자기를 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뽕'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적 동질감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이야기를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데올로기에 취해 사는 이념병환자들이 자존감이 매우 낮습니다. 그들의 뜨거움은 실은 두려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더 많은 이야기들을 계속 생산해내며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이들은 존재를 성장시키려면 최신의 이야기로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식의 말들도 자주 하곤 합니다. 검증된 고대의 지혜와 놀라운 현대의 심리학의 동향들을 선별적으로 통합하여 가장 최신의 정보만을 쉽게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이 최신의 이야기를 얻은 이들은 인류의 상위 10%에 속하는 수준이 된 거라고 인가도 해줍니다.
이게 바로 선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가장 멍청한 이야기들만이 이 선동의 소재가 됩니다. 눈치 못채겠지, 라며 이들이 애초 선동의 대상들을 멍청하게 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실제로 똑똑한 이들이 그럼에도 선동에 넘어가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집단적 동질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고립되듯 외로워지느니, 맹구 흉내라도 내며 인싸가 되어야겠다는 애달픈 의도입니다.
재미도 없는데 MBTI 얘기에 자기가 제일 신나는 척하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 자기 잘났다고 그 이의 욕을 해대는 병신을 친구랍시고 얘기를 들어주는 일에 헌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남을 만족시켜줄 조건을 달성해감으로써, 자기의 자존감이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마치 말 안듣는 고집쟁이 아이의 욕구를 성공적으로 채워주면, 그만큼 엄마와 아이의 자존감 수치가 함께 레벨업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습 같습니다. 자존감이 무슨 개천절에 함께 모여 옹기종기 개발로 빚는 더불어 개떡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이렇게 대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의 개떡을 당신이 오롯하게 빚으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의 하늘이 열릴 당신만의 개천절이 당신에게 필요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시작할 그 날, 반죽에 쑥을 넣어 정성스럽게 색을 내고, 개구리 페페 모양으로 빚은 뒤, 당신이 보고 웃으세요. 떡을 쪄서 야금야금 먹으며, 당신이 당신을 위해 만든 이 시간에, 당신이 행복하세요.
누군가가 화장실에서 종합선물세트처럼 응가를 한 뒤 씻지도 않은 손으로 만들어 당신의 입에 침입시키려고 하는 그 개떡같은 이야기들은 찰지게 씹어 "니 얼굴처럼 만든 거냐?" 퉤 뱉어버리세요. 그리고 당신만을 위한 개떡을 당신이 준비하세요. 민트초코를 넣든, 파인애플을 넣든, 무엇보다 먼저 당신이 먹을 거니 아무 문제없습니다. 저는 주지 마시고요.
당신이 무엇보다 먼저 당신을 위해 살았다면, 당신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자존감은 개떡처럼 유연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쫄깃한 탄력성으로 당신에게 작동합니다.
당신이 오롯이 당신을 위해 했으니 실패해도 실패가 아닙니다.
당신이 만든 개떡은 아무리 개떡같아도 당신을 위해 당신이 살았다는 바로 그 증거입니다. "개같네."라며 찬밥처럼 버리지 않고, 개떡으로라도 당신이 살려낸 당신의 인생입니다.
당신이 1분 1초의 매순간, 당신 자신을 위해 반드시 전력으로 존재했다는 그 사실을 직관해본다면, 당신은 지금 존재를 감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니 실패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란 존재는 실패작이 아닙니다.
척박하고 외롭던 날들에 스스로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 자신을 살렸던 그 개떡이 바로 당신입니다. 어쩌면 예수가 뜯어 5천 명을 먹였던 그 개떡도 당신일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당신이 개떡의 형상처럼 이미 자유롭다는 겁니다. 차리너 너무 막 빚어진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겁니다. 그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당신의 모험은 현재까지 매우 성공적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당신도 당신의 존재를 아주 많이 의지해왔을 겁니다.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당신만의 개떡을 소중히 할 때, 그것이 당신의 자존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