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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22. 2019

조국에 화난 그대에게

"허구로부터의 자유"



  조국은 그 자체가 허구다.


  단지 말뿐이다.


  그대여, 허구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러한 현실은 없고 언어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최면의 기제와 같다.


  그래서 조국은 표현 그대로 허구다.


  조국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祖國, homeland, fatherland, motherland다. 즉, 그대에게 마치 부모처럼, 집처럼, 가족처럼, 우호적이고 친밀한 그대의 편으로서 묘사되는 나라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대여, 그대는 정말로 그대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부모처럼, 집처럼, 가족처럼 느끼는가? 그대는 정말로 조국을 그대의 편이라고 느끼는가?


  그럴리가 없다. 그대의 조국은 그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대는 조국에게 고작해야 한 표의 양적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조국은 단 한 번도 그대를 질적으로 특별하게 대우해준 적이 없다. 그러한 현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조국은 결코 그대의 편이 아니다. 이 나라는 결코 그대의 편이 아니다.


  그대의 조국은 오히려 그대의 편이라기보다는 남의 편이다. 남의 아빠고, 남의 엄마이며, 남의 할아버지고, 남의 삼촌이다. 때문에 조국은 그대가 아닌, 자기네 편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서만 효율좋게 작동한다.


  이처럼 그대가 그대의 편이라고 믿어온 조국은 이미 그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 그대의 편이라는 현실은 이미 성립되지 않는다. 말만 있는 것이다. 허구다. 그렇다면 그대가 이 조국이라고 하는, 속이 텅빈 허구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대는 의리라는 말로 그저 착취되고 있는 것이다.


  의리는 조폭의 논리다. 가족주의의 논리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확장된 것이 조폭의 논리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 우리 공동체라는 배타적인 허구의 정신에 근거한 가족주의는 쉽사리 전체주의가 되고, 그 전체주의적 믿음을 공유하는 가족과 같은 '동지'에게 편향된 의리의 태도를 통해, 결과적으로 다른 타자들을 희생시키게 되는 폭력을 낳는다. 허구가 현실에 폭력을 가한다. 이와 같다.


  하물며 그대는 그대의 가족도 아닌 남의 가족을 위해 의리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니 이처럼 의리라는 이름으로 조폭이 내세우는 허구의 논리에 봉사할 뿐인 그대는 그저 착취의 팔자다. 총알받이로 이용되다가 버려지는 시다바리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대가 화가 많이 난 것이다.


  그대가 단지 남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 살다가 희생되고야 말 이 시다바리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조국의 논리가 허구적인 조폭의 논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까닭이다.


  조국은, 같은 계급에 있는 조폭 구성원들의 서로 지켜주기 논리에 입각한 '동지들의 나라'지, 다른 계급에 있는 그대의 나라가 결코 아니다. 조폭과는 다른 논리로 사는 그대를 위한 현실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조국의 언어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허구라는 말을 그대는 차마 발화할 수 없다. 말할 수 없게 된 말은, 그대의 머리만을 어지럽게 만들고, 전신의 근육통만을 유발할 뿐이다. 억압의 고통이다.


  이처럼, 억압으로 인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핵심적인 고통의 이유다. 그리고 이 고통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 바로 최면이다.


  허구를 허구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면의 가장 폭력적인 기제다.


  그대여, 그대는 지금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이다.


  조국이 진정한 그대의 편이라는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이다.


  최면은 그대의 욕망과 죄책감, 즉 꿈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극함으로써 하나의 언어체계에 그대가 동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대를 그 언어체계의 권위에 복속시켜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의 기제와도 같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언어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을 통해 마치 그대가 진짜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최면의 과정은 자발적인 그대의 동의로 이루어진 과정인 것처럼 인식되게 하는 까닭에, 최면에 걸리게 된 그대는 외부로부터 조작된 그 허구의 가상현실을 오히려 실제적인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적극적으로 수호하게 된다.


  이것은 인지부조화의 현상이다. 최면이 쉽사리 깨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면은 피최면자 자신이, 실제로는 허구에 불과한 그 가상현실을 실제의 현실로서 채택한 일관성 있는 선택의 주체라는 인지적 착각을 유발하는 까닭에, 최면이 깨지면 그 자신 역시도 허구의 것처럼 무너지는 불편감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그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피최면자는 더욱 열정적으로 최면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자기합리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정치, 모든 종교, 모든 공동체의 논리에는 바로 이 최면의 기제가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헤게모니는 집단 최면이 조금 더 그럴 듯하게 불리는 이름일 뿐이다.


  조국 또한 이 최면의 언어다. 그것은 마치 힘있고, 능력있으며,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도 걸 수 있을 법한 너무나도 위대한 부모의 뉘앙스를 담지하며, 이를 통해 이상적인 부모-자식 관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언어의 지배권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를 쉽게 이끌어내고자 하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최면의 언어다.


  그러나 그 어떤 최면이라도 인간의 몸을 속일 수는 없다. 정확하게는 몸이 알리는 전인적인 느낌을 속일 수는 없다. 느낌은 인지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때문에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그 어떤 자기합리화도, 결코 느낌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모든 가상현실 속에서는 반드시 위화감이 느껴진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가상현실이 만들어내는 과잉된 도취와, 통제된 질서 속에서는 반드시 위화감이 경험된다.


  이것은 허구다.


  그대는 온 몸으로 이 사실을 안다. 온 몸을 떨리게 하는 화로 이 사실을 안다. 알 수밖에 없게 된다.


  그대가 그대를 위한 현실 속에 있지 않다는 느낌은 이내 사실로 드러나 명백해진다.


  이 조국이라는 가상현실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한 것이라는 언어를 이용해 실제로는 그대의 힘을 빼앗음으로써, 조국은 더 대단한 것으로 그대는 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래서 이것은 배신감이다. 조국에 화나 있는 그대는, 조국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대의 아빠라고 믿었던 이 나라가, 실은 남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흙수저로 태어난 그대가, 더욱 강하고, 유능하고, 자상한 아빠를 꿈꾸었을 때, 거기에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이 세상을 사는 일이 너무나 두렵고 힘겨워, 든든한 누군가가 그대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 소망은, 그대를 위해 희생을 무릅쓰기까지 하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곧잘 형상화되곤 했다.


  그대여, 그대가 꿈꾸는 바로 그 언어가 정확하게 이용되어 그대는 최면에 걸리게 된다.


  좋은 아버지라는 언어에 의해 그대는 이제 최면의 피암시성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좋은 아버지의 상징처럼 보이는 조국이라는 언어에 의해, 그대는 언제라도 최면에 걸리기 쉬운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대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놓고 희생하는 아이언맨의 모습을 보고 눈물 흘렸고, 자식과 같은 그대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에게 그대의 힘을 전적으로 양도했으며, 그렇게 386세대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고 싶었으나 받지 못한 만큼, 이제 그 반대편에서 자신들은 다 주는 아버지가 되려고 한 끝에 경험하게 된 자식을 향한 죄책감과 무력감을 그대의 것처럼 함께 느꼈다.


  이렇듯 그대의 소망은 파더 컴플렉스의 소망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더 힘있고, 더 인격적이고, 더 완성된 아버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그리고 조국은 그 소망의 대상에 딱 맞는 언어였다.


  동시에 조국은 바로 그 파더 컴플렉스의 온상지였다.


  그대가 조국을 위대한 영웅적 아버지로 꿈꾼 만큼, 조국도 스스로를 위대한 영웅적 아버지로 꿈꾸었다.


  그래서 이것은 태생적으로 반드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가상현실의 구조다. 조국이 이처럼 부모-자식의 담론 구조인 이상, 그대는 반드시 배신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대는 실제로는 조국의 자식이 아닌 까닭이다. 어떠한 언어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을 소비하든 간에, 사실적인 차원에서 그대는 결코 조국의 자식이 아닌 까닭이다.


  조국은 결코 그대의 편이 아니다. 이 나라는 결코 그대의 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대의 편이라는 것은 그것이 그대의 필요라는 것이다.


  그대여,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조국은 결코 그대의 필요가 아니다. 오히려 그대가 조국의 필요다.


  그대가 없으면, 조국은 무의미한 언어일 뿐 아무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대가 없으면, 이 나라는 허구적인 가상현실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없으면, 토니 스타크는 2차원 세계의 고철덩어리일 뿐 아무 존재도 아니다.


  그대는 이미 그대가 꿈꾸고 있는 조국보다 큰 존재다. 그대는 이미 그대가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부모보다 큰 존재다. 그대는 이미 그대가 꿈꾸고 있는 위대한 영웅보다 큰 존재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그대는 어떠한 최면에도 걸리지 않게 된다. 어떠한 허구의 언어에도 이용당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고 있는 그 어떤 허구의 언어보다도 큰 존재다.


  그 모든 허구의 언어가 결코 그대의 현실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대가 바로 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만이 언제나 힘을 갖는다. 현실의 그대는 허구의 조국 따위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대여, 그대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야 한다.


  허구를 허구라고 말해야 하며, 최면을 최면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그대 앞에서 허구를 무력하게 만들고, 그대 안에서 최면이 깨어지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대에게는 허구가 필요없다. 그대에게는 조국이 필요없다.


  단지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나는 네가 필요없어."


  그대 삶의 어떠한 것도 조국에게 위탁할 필요가 없다. 조국은 그대를 구원하는 언어가 아니다. 조국은 그대의 아빠가 아니라, 남의 아빠일 뿐이다. 심지어 그대는 더는 아빠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그대가 조국을 그대 현실의 구원자로서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조국은 그대로부터 어떠한 힘도 착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대로부터 얻어낸 힘을 자기네 동지와, 자기네 가족과, 자기네 국민을 위해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 나라를 좋은 아버지처럼 보며 그 허구의 언어에 기대하는 일을 그대가 완전히 멈출 때, 그대는 비로소 그대 현실의 구원자가 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허구의 포기일 뿐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조국, 즉 아빠의 땅, 엄마의 땅이 아니라, 오직 그대 자신의 땅일 뿐이다.


  그대는 다만 그대 자신의 땅을 확보하는 일에 악착같아야 한다. 의리라는 이름으로, 남에게 그대의 땅을 더 갖다 바치지 못하는 일에 도덕주의적 죄책감을 느끼며 그대의 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대가 만약 소소한 한 표의 양적 개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대는 그 소소함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서 오롯이 지켜야 한다. 누구에게도 주어선 안된다. 그 어떤 권위에도 넘겨주어선 안된다.


  조국의 권위, 최면의 권위, 허구의 권위, 언어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 등과 같은 그 모든 권위들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대를, 대체 어떤 누가 속이고 남용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그대가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음으로써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은 권위는, 이제 비로소 온전한 그대의 것이 된다. 처음으로 그대는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된다. 그대가 그대 현실의 주인으로 새롭게 알려진다. 가볍게 주먹을 쥐어보면 알 수 있다. 그 주인된 힘은, 소소하지만 명징하다. 그대의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시작이다.


  허구로부터의 자유다.






Marilyn Manson - The Fight Song
I'm not a slave to a god that doesn't exist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노예 따위가 아니며
I'm not a slave to world that doesn't give a shit
나에게 좆도 해준 것 없는 세상의 노예 따위가 아니다






Underoath - Young and Aspiring
Running in circles
쳇바퀴를 도는 동안
I can't forget how many times
마음 속에서 얼마나 무수하게
I've played this in my mind
이 노래를 연주해왔는지 잊을 수가 없다
Feeling free, feeling free
자유롭게, 더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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