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닫는마음씨 Aug 24. 2019

우리집(The House of Us, 2019)

나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놀라운 영화다.


  자신들이 집이라고 믿었던 가족을 잃고, 또 집이라고 믿었던 공간을 잃음으로써, '우리집'을 잃게 될 확정적인 사건 앞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그대로, 낙원을 상실한 뒤 지금까지 먼 길을 걸어온 인간의 자화상을 반영한다.


  에덴동산의 신화는 분명하게 인간이 상실한 '우리집'에 대한 상징이다. 부모의 따듯한 비호가 가득한 낙원을 잃게 된 뒤, 인간이 해온 일은 어떻게든 부모를 다시 찾으려고 한 일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봉합함으로써 다시금 '우리집'으로 돌아갈 자격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진리라는 이름의 부모를 추구함으로써 '우리집'을 회복하려고 했던 고중세의 역사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이 한계에 갇혀 있는 까닭에, 결코 태초의 '우리집'에 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천명했다. 그렇게 근대는 시작되었고, 때문에 근대의 인간은 닿을 수 없는 낙원 대신에,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이 땅에 '우리집'을 건설하고자 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다.


  영화 속의 주인공 아이들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낙원을 지켜낼 수 있고, 또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과 같다. 아이들만큼이나 근대의 인간은 정말로 자신이 낙원을 이루어내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했다. 설명서는 이미 다 갖추었으니, 방해물들을 제거하며 꾸준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우리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앎을 통해 이제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직접 '우리집'을 창조하고자 했던 근대의 역사다.


  그러나 부모를 추구하던 아이는, 그리고 부모인 척 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신적 진리를 추구하던 모습에서 더 나아가 자기가 신적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던 인간이 근대의 끝에서 알게 되었듯이, 아이들도 결국 알게 되고야 말았다.


  모든 것을 아는 척 하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굴던 자신들이, 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력한 존재들이었으며, 동시에 '우리집'을 이루기 위해 제거되어야 했던 유일한 방해물은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인간은 유토피아에 대한 꿈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소외시켜 온 것이었다. '우리집'이라고 믿었던 유토피아는, 피와 살을 가진 실제적인 인간이 제거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남의 집'이었다.


  인간 자신이 지금 소외되어 있으며, 그 소외가 '우리집'에 대한 망상 때문에 생겨났다는 이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현대의 문은 비집어 열리게 되었다. 숨막힐듯 끈적이는 용해질과 같은 근대적 망상을 인간의 실존이 찢고 나와 울부짖었다. 그렇게 실존주의와 함께 현대는 시작되었다.


  실존주의는 이제 가장 정직하게 인간이 아이임을 선언한다. 그 아이는 부모를 상실한 아이다. 부모를 추구하던 아이도, 자기가 부모인 척 아이도, 모두 똑같이 부모를 잃은 아이다. 곧, 집을 잃은 아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제야 처음으로 집을 떠나, 스스로의 길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가장 용기 있는 아이다.


  이것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하는, 오래된 예언을 실현하는 바로 그 발걸음이며, "이것은 개인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하는, 최신의 보고를 실증하는 바로 그 발걸음이다.


  인간은 스스로 걸어 인간 그 자신이 된다. 스스로 인간이라고 하는 길을 향한다. '스스로'라는 것은 인간조건이다.


  인간은, 곧 현대의 실존은 이처럼 집이 아닌 길을 그 스스로의 시선 끝에 둔다.


  '우리집'의 상실은 그에게는 '나의 길'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나의 길'의 다른 이름은 곧 자유다.


  현대의 현인인 크리슈나무르티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무수한 책무 속에 힘겨워하며 자유의 의미를 묻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 그대의 침대에 누워보십시오. 그때 그대가 경험하게 될 바로 그것이 자유입니다."


  이처럼 내가 집이라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감히 분리될 수 있는 내 자신을 허락할 때, 그 순간 자유의 공기가 나를 에워싼다.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이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셔본 이는 결코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영원의 맛이다. 처음으로 내가 내 자신으로서 아무 걱정없이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영원한 내 자리의 맛이다. 곧, '나의 집'의 맛이다.


  바로 이것이다.


  자유는 곧 자리다.


  '나의 길'은 곧 '나의 집'이다.


  자유 속에 자리가 있다. 길 속에 집이 있다. 정말로 내가 내 자리라고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자유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 '우리집'에 대한 근대적 망상을 포기하고 '나의 길'로 나설 때, 그렇게 내가 나의 자유를 실감할 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나에게 '나의 집'이 개방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어디에도 없는 '우리집'을,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건설하려고 하는 또 하나의 유토파아를 향한 미망이 결코 될 수 없다. 현대의 인간이 걷는 정확한 길은 '우리집'에 대한 정직한 포기다. '우리집' 대신에 '나의 길'이며, 동시에 '나의 집'이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오딧세우스'의 은유로 형상화되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집'은 없다.


  집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같이하는 장소가 아니다. 또한 집은 우리가 함께한 역사가 쌓아올린 시간도 아니다.


  이처럼 집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도 없고, 공간 속에도 없다. 때문에 역사 속에도 없고, 관계 속에도 없다.


  그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제된 자유 속에만 있다. 자유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만 있다.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스스로의 시선 속에만 있다.


  시선은 관심이다. 따라서 집은 그저 관심이다. 자유를 향한 관심이다. 스스로의 자유를 향해 걸어가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유에 대한 관심이다.


  나만큼이나 너도 자유롭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그래서 자유는 다시 한 번, 공감이다.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은 '내'가 '너'에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에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을 자기 안에 들이는 일,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래서 공감은 초대다.


  공감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


  공감은 이처럼, 나만큼이나 너의 자유를 꿈꾸며, 너의 자리를 꿈꾸며, '나의 집'으로 너를 초대하는 것이다. '나의 집'은 반가운 너를 위한 집이다. '나의 집'은 나의 자리이자, 동시에 너의 자리다. 나와 네가 만날 그 자리, 시간도 공간도 아닌 영원의 그 자리다.


  이처럼 '나의 길'을 향해 스스로 여행을 떠난 이는 '나의 집'을 갖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타자를 초대할 수 있게 된다. 그 집에서 타자와 만나 함께 자유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오롯한 '스스로의 길'이 '더불어의 길'로 다시 알려지는 순간이다.


  '스스로'는 이미 '더불어'다.


  길을 향해 홀로 여행을 나선 이는 이미 그 누구보다 함께할 집을 얻는다. 실존적 전환이다. 위대한 역설이다.


  이처럼 아이지만 어른으로, 동시에 홀로지만 함께로, 역설적으로 전환된 영화의 주인공 소녀는 이제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한다. '나의 집'으로 타자들을 초대하여 배불리 먹일 준비를 한다.


  한때는 '우리'였던 타자들을 온전한 각각의 타자로 대접함으로써, '우리'라는 망상의 우리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 역시도 자기의 자리를 찾아 자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얼른 밥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을 준비하자."


  곱고, 더욱 곱다. 


  깊고, 더욱 깊다.


  상냥하고, 더욱 상냥하다.


  인자(人子)의 선한 눈매와 같다.


  그 인자의 시선 속에 집이 있다.


  당신의 눈동자 속에 모든 인간의 자리가 있다. 그 눈동자가 비추는 언제 어디서라도 반드시 인간의 자리가 있다. 인간이 저마다 바로 그 인간일 수 있는 인간의 자리가 있다.


  당신의 한없는 시선 속에서, 그 시선을 닮고자, 시선의 끝에 놓인 인간에 닿고자, 우리는 나를 향한 진짜 여행을 준비한다.






Dan Zanes & Elizabeth Mitchell - Turn, Turn, Turn
To Everything
모든 것은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There is a season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And a time for every purpose, under Heaven
하늘 아래, 가장 온전한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A time to be born, a time to die
때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A time to plant, a time to reap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A time to kill, a time to heal
죽일 때가 있고, 치유할 때가 있으며
A time to laugh, a time to weep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죠
To Everything
모든 것은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There is a season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And a time for every purpose, under Heaven
하늘 아래, 가장 온전한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A time to build up, a time to break down
지을 때가 있고, 무너뜨릴 때가 있으며
A time to dance, a time to mourn
춤출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며
A time to cast away stones, a time to gather stones together
돌들을 치울 때가 있고, 돌들을 쌓을 때가 있죠
To Everything
모든 것은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There is a season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And a time for every purpose, under Heaven
하늘 아래, 가장 온전한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A time of love, a time of hate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A time of war, a time of peace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로울 때가 있으며
A time you may embrace, a time to refrain from embracing
포옹할 때가 있고, 멀리 할 때가 있죠
To Everything
모든 것은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There is a season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Turn, Turn, Turn)
돌고, 돌고, 돌죠
And a time for every purpose, under Heaven
하늘 아래, 가장 온전한 저마다의 때가 있어요
A time to gain, a time to lose
얻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A time to rend, a time to sew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A time of love, a time of hate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죠


작가의 이전글 조국에 화난 그대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