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다리던 지적이고 과격한 심리학 #20

"캐릭터 설정놀이와 인터넷 가면무도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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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삼류소설처럼 돌아가는 건 늘 그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엔 특히 더 심합니다. 삼류작가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스피커니 인플루언서니 하는 허명의 지위를 통해 어디서 주워보고 남에게서 베껴온 얘기들을 짜깁어 자기의 것처럼 목소리를 내고 자기가 이득을 취합니다. 그런 자기들을 누군가가 또 따라하면 자기가 그만큼 성공했다는 증거로 여기며 기뻐하곤 합니다.


마릴린 맨슨이 노래한 것처럼, 이 시대에는 모방품의 복제품들만이 '진정한 자기'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양산됩니다. 그러니 문화가 삼류판이 되는 일은 필연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독창적인 작품 하나 없지만 자기에게 천재적 스토리텔링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삼류작가들도 물론 작법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인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건이 주어지고 그 사건에 대해 응답하는 인물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의 구조입니다. 실존철학에서는 우리를 '던져진 존재'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생기고 그 다음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움직이고 있던 사건 속에 던져지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류작가들은 인물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으로 사건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사건은 언제나 인물에게 종속됩니다. 유치원 학예회처럼 인물의 놀라운 능력이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만 사건은 전락합니다. 이것이 망상의 구조입니다.


삼류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이들은 자기를 캐릭터화합니다.


자기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 좋아보이는 설정들을 부여하고 그 캐릭터와 동일시된 뒤 그러한 자기에 부속되는 허구의 스토리를 만들어 그걸 팔아먹는 식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맨날 자기가 얼마나 놀라운 체험을 해서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또 얼마나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선전합니다. 자기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무슨 영웅담을 전하는 음유시인 같은 역할을 부여해 아름다운 후기들도 많이 남겨달라고 요청합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이 우주대장이 뭘 하기만 하면 모두가 박수를 보내달라구."


이처럼 자기가 설정놀이를 해 만든 '자기'라는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기를 갈망합니다.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건은 그 캐릭터가 박수를 얻을 소재일 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등의 소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든 '자기'라고 하는 캐릭터입니다. 모든 것은 다 그걸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장치들입니다.


그러니 삶은 언제나 무시되고, 나아가 조롱되기까지 합니다.


삼류작가들의 핵심적인 문제는 이들이 이처럼 삶을 조롱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두식이라는 삼류작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는 '강두식'이라는 캐릭터를 지어냅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에게 다음과 같은 설정을 부여합니다.


1) 공부는 안하지만 머리가 엄청 좋다.

2)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쏙쏙 꿰뚫어보는 멘탈리스트다.

3) 깨달음을 얻어 인생에 아무 걱정이 없다.

4) 사람을 좋아해서 타인을 진심으로 돕는다.

5) 애쓰지 않아도 돈의 법칙을 알아 월 1000씩 들어온다.

6) 감정적으로 치이지 않고 늘 평온하며 여여하다.

7)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심리학의 비밀을 가르친다.

8)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마음의 천재가 되었다.

9) 전문가 자격이 없어도 실제의 능력은 더 대단한 진짜 전문가다.


그리고 이제 강두식은 '강두식'을 바로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합니다.


조금 양심에 찔리는 강두식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이게 너희들이 되고 싶은 너희의 모습이잖아. 내가 그 소망들을 담아 캐릭터로 만들어봤어. 다들 많이 이 캐릭터를 소비해줘. 이 캐릭터를 소비하는 만큼 너희도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이러한 모습이 되어갈 수 있다구."


그러나 대부분의 강두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강두식이 '강두식' 캐릭터에 부여한 설정들을, 실제의 강두식으로 믿으며 강두식을 예찬하기 시작합니다. 좋아보이는 것은 다 갖고 있는 인생마스터 같이 생각되니까요.


그렇게 강두식은 자기가 지어낸 '자기'의 환상을 통해, 자기가 실제 그런 사람일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들을 얻는 일에 성공합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이 성공을 거두게 만든 이 방법이 마치 마법처럼 여겨집니다. 인생의 비밀이라도 안 것처럼 의기양양해집니다. 그래서 더 많은 설정놀이를 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물론 이것은 사기입니다.


식사를 섹스라고 팔면 사기이듯이, 소설을 사실이라고 팔면 당연히 사기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ㅅㅅ이라고 뭉뚱그립니다.


그러다가 좀 이상함을 느낀 누군가가 집요하게 ㅅㅅ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강두식의 실체를 드러내려고 하면 강두식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제가 언제 그런 사람이랬어요. 언제 이 모든 게 사실이랬어요. 저는 '강두식'이라는 캐릭터를 판 것뿐이라구요. 웹툰 보시듯이, 사람들이 재미있게 캐릭터 즐기시라고 한 캐릭터 사업일 뿐이에요."


'강두식'이라는 캐릭터를 아이언맨 수트처럼 걸치고 있던 강두식이, '강두식'으로 인한 이득은 강두식의 것으로 삼으면서, 어떤 불이익이 발생하면 자기는 '강두식'이 아니라고 회피하는 그 논리입니다.


이게 오늘날 유행하는 대표적인 양아치짓입니다.


삶을 조롱하며, 사람들을 조롱하는 일입니다.


융의 페르조나와 같은 개념들은 이러한 설정놀이사기극을 지지해주는 좋은 소재가 됩니다. 요즘 삼류작가들이 다 한 번씩은 융의 페르조나 개념을 중요하게 언급한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깊습니다.


강두식은 '강두식'이 다만 자기의 페르조나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쓴 가면일 뿐이지, 진정한 자기는 따로 있으니 함부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대체로 이러한 이들이 진정한 자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메타인지적 자기입니다. 작가적 주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와 같은 진정한 자기의 천재적 재능으로 다양한 가면들을 만들어내고, 그 하나하나에 매력적인 설정을 부여해 캐릭터화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재미있고 효율좋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이들은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면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가면은 면피책이 아닙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어떤 가면을 쓰든 간에 바로 동일한 '그 몸'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가면을 바꾸어 써도 몸은 바뀌지 않습니다. 늘 동일한 그 몸입니다.


왕의 가면을 쓰고 그 몸으로 왕인 척하는 이득을 누렸다면, 단두대에 서야 하는 것도 그 몸입니다. 왕의 가면을 슬쩍 벗고는 "어허 사람 똑바로 보세요. 저는 민중을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사라구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배트맨 가면을 쓰고 사람을 죽였다면,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은 브루스 웨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캐릭터 설정놀이로 삶과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러한 자기가 계속 조롱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보통 가장 조롱받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아주는 척하는 메타인지적 자기입니다. 이것이 가장 두꺼운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면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가장 가면인 것입니다.


가면은 자기를 숨기려고 씁니다. 메타인지적 자기는 자기를 제일 숨기고자 하는 이들이 늘상 쓰곤 하는 가면입니다.


자기의 못남이나 무능력함이 조롱받을 것 같아 이들은 가면을 씁니다. 가면을 써서 타인을 대신 조롱함으로써 자기는 조롱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가면을 씀으로써 그 조롱은 오히려 현실이 되는 역설입니다.


가면을 가면이라고 말하면 조롱은 없습니다. 소설책들의 첫 페이지에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이유입니다.


허구를 파는 일에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허구를 자기라고 파는 일만 문제가 됩니다. 두 가지의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첫 번째로 자기가 도구적 상품이 되어 있는데다가, 두 번째로 그 상품 자체가 허위매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소재로 뻥이나 치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비루해집니다. 그 비루함을 메우려고 더 많이 뻥을 치고, 이것은 악순환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엄청나게 많이 쓰고 있는 가면인데, 그게 가면인 줄 모르고 있는 대표적인 가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면들이 특히나 비루함의 악순환을 낳습니다.


영국의 실존상담자인 스피넬리는 개인의 변화의 수준을 3단계로 측정합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늘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라고 경험하는 내담자가 있습니다.


수준 1의 변화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세상은 늘 나에게 화를 내지만, 나는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어."


수준 2의 변화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화를 낼 때도 있지만, 나에게 친절하고 좋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단 걸 나는 알아."


수준 3의 변화는 이렇게 드러납니다.


"내가 늘 세상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실존상담의 목표는 언제나 수준 3의 변화라고 스피넬리는 말합니다. 수준 1과 수준 2의 변화는 실존상담자들에게는 그리 탐탁치 않은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을 가면의 문제로 풀어보자면, 수준 1에서 우리는 '영웅'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상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자기가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진 영웅인 것처럼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일입니다.


수준 2에서 우리는 '양육자'의 가면을 씁니다. 세상은 나쁘기도 하지만 또 충분히 좋은 것들도 갖고 있는, 그 자체로 온전한 것으로서 세상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엄마와 같은 양육자처럼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일입니다.


수준 3의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가면들은 시도됩니다.


'영웅'과 '양육자'는 오늘날 우리가 그게 가면인 줄도 모르고 '진정한 자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쓰고 있는 가면들입니다. 특히 심리학을 조금 배웠다는 이들이 아주 잘 활용하곤 하는 가면들입니다.


나아가 그 두 개가 통합된 '영웅양육자'는 시대가 칭송하는 인기캐릭터입니다.


특별한 힘도 있으면서 그 힘을 친절하게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조력하는 일에 쓰는 '영웅양육자' 캐릭터는 오늘날 뻥치기소년들이 필수적으로 복제해야 할 성공의 문법입니다. 유튜브나 SNS 등지를 보면 다 자기가 이런 인물이라고 홍보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인생의 비밀을 이유식처럼 떠먹여주겠다며, 자상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모습들을 보입니다.


그리고 스피넬리가 제안하는 수준 3의 이해를 따르자면, 이 유치원 선생님들은 그 자신이 바로 유치원생입니다.


자기는 결코 유치원생인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고자, 이들은 세상 모두를 유치원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다시 한 번 이들이 삶과 사람들을 조롱하는 유치한 방식입니다.


나아가 수준 3의 이해를 이 글에도 적용하자면, 이것은 조롱자가 쓰는 글입니다. 자기가 문제삼는 것들보다 자기가 더 우주대장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치한 조롱자가 삼류작가가 되어 이러한 활동을 펼칩니다.


바로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씁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영웅양육자의 가면을 쓴 이들의 맨 얼굴은 이러한 것입니다.


가면무도회를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삼류작가들이 모두 모여 자기 빼고는 다 병신이라고 서로들 생각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허공 위에 늘 이 가면무도회가 열립니다. 조롱의 마당놀이판이 성대하게 펼쳐집니다.


더 좋아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는 이를 보면서는, 자기를 포장하기 위한 허세와 허영이나 과도하게 부리는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가면의 복제품을 갖고자 그의 앞에서 아양을 떱니다. 상대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자기도 비루해집니다.


혹시라도 가면무도회에 맨얼굴로 온 이가 있다면, 그는 공개처형되기에 딱 좋습니다. 자신들의 비루함을 떠넘기기 좋은 어린양이 방금 막 제단 위에 도착한 것입니다.


설정놀이를 하지 않으면, 설정할 지적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작품은 하나도 없는 이들이, 모방의 작법을 작가의 능력인 것처럼 과시하며 정직한 타인을 비웃습니다. 코인놀이를 하는 이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을 내심 비웃듯이, 가면무도회의 가면들은 늘 좀 그런 입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가면들이 다들 그렇게 똑같은 표정들이라, 조금은 무섭습니다.


인터넷 가면무도회는 분명 전체주의의 괴기스러움을 담고 있습니다.


가면을 다양한 개성의 상징인 것처럼 곧잘 말하지만, 오늘날엔 오히려 그것은 몰개성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몰개성은 비인간화입니다.


정말로 개성있는 것은 맨얼굴입니다. 삶의 사건들은 개인에게 이 맨얼굴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노출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무도회장이 아니라 삶 자신만을 마주하여 열도록 청합니다. 인간이 이처럼 자기의 삶에 대해 정직할 때, 사건이 인간의 맨얼굴을 드러냅니다. 이걸 묘사하는 것이 작품입니다. 진짜 작가들은 이 일을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이 길입니다.


삶은 설정놀이가 아니라, 우리가 노는 유치원을 벗어난 사건들의 집합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캐릭터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삶이 우리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삶이 작가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삶이 하는 ㅅㅅ입니다. 해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짓는 삶의 웃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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