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다리던 지적이고 과격한 심리학 #21

"무의식의 신화와 해리 포터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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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는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과 같은 정신역동적 관점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개념입니다.


역동(dynamic)이라는 것은 힘과 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임입니다. 여기에서 무의식이라는 힘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입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힘들 사이에서 인간의 정신은 작동한다는 것이 곧 정신역동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정신역동의 구조와 무의식의 개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힘들의 사이에 놓인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로 의식화를 제안합니다. 무의식의 지배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두운 힘들에 빛을 밝힘으로써, 비록 좁더라도 거기에서만큼은 인간이 안심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 코즈믹 호러의 상태와 유사합니다. 우주적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복판에서 인간은 그 괴물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균형있게 살아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것은 지옥 속에서 생존하는 법에 가깝습니다.


융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융에게도 무의식은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초월적 힘입니다. 그러나 그 초월적 힘이 인간의 편입니다. 개인이 그의 인생을 바쳐 무의식의 고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견지하기만 하면 무의식은 거기에 보답해준다고 융은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융은 수행자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수행자는 사실 자기를 바라봐줄 엄마를 찾고 있는 이들입니다. 평생의 노력을 다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위에서 엄마가 미소지으며 청국장을 끓여놓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이들입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엄마가 기다리는 천국을 향하려는 태도를 암시합니다. 융에게 무의식은 천국의 소재입니다.


융은 분명하게 무의식이 마치 모든 것을 다 바라보고 알아주는 엄마처럼 의식을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의식은 좁게 대상만을 바라보지만, 무의식은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의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메타인지입니다.


그래서 융은 '의식 중의 의식'이라는 표현으로 메타인지를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메타인지가 이원론을 극복하는 통합의 열쇠이자 연금술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융은 이러한 방식으로 정확히 니체를 오독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니체의 초극인의 개념이 메타인지를 써서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주체를 묘사하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니체를 헤겔처럼 묘사하는 이런 말을 하면 니체가 망치들고 찾아갑니다. "융 빼고 다 나가 있어."


심지어는 융은 이 메타인지를 얻는 일이 동양의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고까지도 말합니다.


물론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융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깨달음은 메타인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대중문화에서 나오듯이, 네오에게 프로그램처럼 최신의 정보들이 입력된다든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주인공에게 문제의 솔루션이 찾아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무의식의 놀라운 지혜들이 의식으로 침투해들어오는 등의 무협지 같은 묘사는 깨달음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건 무당들의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무당들에게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당들의 몸의 감각이 섬세해서 현재의 제반적 상황을 잘 느끼는 것뿐입니다. 허리가 아플 때마다 비가 올 것이라고 경험하는 이들의 상태와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러합니다.


무의식이라는 거, 정말로 있는 겁니까?


그게 지옥과 같은 소재냐, 천국과 같은 소재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런 게 정말로 있기나 합니까?


현대에 들어와 무의식이라는 '가설'이 많은 부분 폐기된 이유는 유전학과 뇌과학의 발전 덕분입니다.


DNA로 더 쉽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융과 같이 장대한 판타지소설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유전자는 신이나 악마가 아니고, 초월적 소재도 아니며, 엄마와 같이 인간에게 우쭈쭈 해주는 인격체도 아닙니다. 매일 밤 우리가 잠들면 꿈속에서 유전자가 우리에게 상냥한 엄마의 모습으로 나타나 고대의 지혜를 알려준다는 얘기는 망상장애를 의심하게 합니다.


부분적으로 프로이트는 살아 남았는데, 개인이 어릴 때 경험한 그의 가족관계가 그의 성격양식을 형성하는 데 후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개인무의식에 대한 견해는 일정 부분 동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무의식의 초월적 힘인 메타인지가 자기 자신으로 완성되어 가는 정신적 성숙의 비밀이고 깨달음의 비결이라는 식의 융의 말은 실제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왜인가요?


메타인지의 활용은 AI가 더 잘 하기 때문입니다.


메타인지로 깨닫는다는 말은 AI가 깨달은 존재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또는 인간이 AI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이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를 때는 무조건 '무의식'이라고만 하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의식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고, 만능열쇠였으며, 무적의 히어로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 무의식으로 설명가능하고, 무의식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며, 그러니 모든 이가 경배해야 할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었습니다.


무의식은 신화였습니다.


신화는 마법적 힘을 묘사합니다. 무의식의 신화는 무의식이 마법임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마법은 언제나 구시대의 마법입니다.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우리가 마법이라고 부르는 모든 소재는, 다 이미 그 용도가 폐기처분되어 과거를 추억하는 이름으로만 남은 것들입니다.


마법이라는 표현은 로맨틱합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보던 별자리 운세만큼이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합니다. 그것이 더는 우리의 일상에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되었기에, 그것은 낭만적인 것으로 승화됩니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일상에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낭만적인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해한 것으로 확증된 것만이 낭만의 은총을 입습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부모님이 아직 우리의 인생에 막강한 힘으로 간섭하고 있다면 그것은 낭만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무해해져야,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마법적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선전될 때, 우리는 그것이 이미 작동하지 않는 구시대의 것임을 동시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무의식의 놀라운 힘이니, 강력한 원형의 비밀이니, 집단무의식이 담고 있는 고대의 지혜니 등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나간 시절을 잊지 못해 마른 오징어에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있는 해병대전우회 할아버님들과 유사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조금은 쓸쓸하며 조금은 아름다운 추억의 소비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여전히 촌스럽게 무의식이라고 하는 소재를 통해, 자기는 남들이 알 수 없는 정보를 알 수 있는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무의식의 신화를 진지하게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의 힘을 추구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은 이러한 이들의 상태를 시사합니다.


있지도 않은 것에 마법적으로 기대를 걸지 않고서는, 이들은 다른 것으로는 자기가 도저히 힘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 때, 힘이 있는 이들은 우주선을 타고 화성을 향하겠지만, 힘이 없는 이들은 마법적 구원자를 열렬히 갈망하게 될 그 상태와 동일합니다.


이들에게는 무의식이 바로 그러한 마법적 구원자인 것입니다. 융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쓰는 판타지소설에 모든 것을 걸고 "내 소설이 나를 구원해줄 거야."라며 자기의 소설을 신앙하는 이들의 모습이 이러한 마법을 꿈꾸는 이들의 본질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호그와트를 그리는 해리 포터들입니다.


이 해리(Harry)들의 주된 상태는 해리(dissociation)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분열되어 있으니, 이들이 늘 통합을 주장하곤 하는 것입니다. 융도 그랬습니다.


포터(Potter)는 분명 통합의 이름입니다.


흙을 빚어 그릇으로 만드는 '그릇쟁이'가 포터라는 이름의 어원적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노력을 통해 사물의 성질을 바꾸고자 하는 일종의 연금술입니다. 융도 그랬습니다.


이처럼 포터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에게 쓸모있는 그릇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그릇으로 자기를 빚어내고자 합니다. 자기를 그릇으로 빚는 이 일이 원래 수행의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품어줄 수 있을 만큼 다정한 그릇이니, 그렇게 유용한 자기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해리된 포터들이 꿈꾸는 통합의 현실입니다.


해리[분열]가 꿈꾸는 포터[통합]의 현실입니다.


융의 구조에서는, 분열된 자아(ego)가 꿈꾸는 통합된 자기(Self)의 현실입니다.


해리는 자신의 이름이고, 포터는 엄마의 이름입니다.


그렇게 이들은 해리와 포터로 분열된 뒤, 자식 해리가 엄마 포터에게 안기는 형태로 통합을 꿈꿉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궁극의 마법입니다.


"결국에는 엄마가 나를 구원해줄 거야."라는 환상적 믿음을 '무의식'이라는 말로 참 길게도 합니다. 융도 그랬습니다.


엄마를 그리는 해리 포터들이 마법을 연습합니다.


"페르조나무스 섀도니마!"


프로이트가 그 뒤로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갑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난 융이 제일 이상한 놈인 줄 알았는데 융보다 더 이상한 놈들이 많네. 말세다, 말세야. 이 꼴 안보려고 일찍 죽어 다행이지.'


정신역동만큼이나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신봉하는 접근은 바로 '최면'입니다. 이것은 최면적 지향을 갖는 모든 접근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즉, 무의식의 지혜를 담은 메타인지를 통해 발화한 연금술적 언어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마법'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무의식의 신화는 이들을 통해 가장 빈번하게 확산됩니다.


융은 150년 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시대적 한계와 그 시대에 상응하는 개인적 한계 속에서 그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풍월을 읊고 노니는 이 시대에, 있지도 않은 무의식을 마법처럼 다루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구시대적입니다.


혹시 플로지스톤이란 걸 아십니까?


독일의 연금술사의 제자가 물질이 타기 위해서는 특정한 원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 원소를 플로지스톤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연소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 18세기를 지배했던 가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연소에 필요한 것이 플로지스톤이 아니라 산소라는 사실을 압니다.


플로지스톤은 이제 낭만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판타지세계를 배경으로 한 서브컬쳐물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유희물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누구도 실생활에서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친구에게 "야 플로지스톤 좀 줘봐."라고 하지 않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배울 수도 없습니다. 연습할 수도 없습니다.


무의식이 그렇습니다.


화성으로 떠나는 일론 머스크의 뒤로, 자기도 그러할 힘이 없음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열이 가득하니 바깥의 세상이 춥게 느껴집니다.


이 추운 날들에 마법을 꿈꾸는 해리 포터들은 엄마에게 내복을 사다 드리든가, 성묘 한 번 더 가는 편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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