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살림 #13

"어텍스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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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살림을 위해 효과적인 하나의 용어를 제안할 수 있다.


'어텍스트(atext)'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텍스트(a text)'는 실은 '텍스트가 아니다(a-text; anti-text)'는 의미를 담고자 구성한 표현이다.


더 쉽게 이렇게 서술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을 텍스트로 보며, 텍스트를 가공하듯이 작문의 법칙에 따라 우리의 삶을 가공할 수 있다고 믿는 관점들에 우리는 반대한다.


우리는 왕자와 공주가 아니며, 마법사나 광대도 아니다.


문학이론에 따라 배드엔딩과 해피엔딩이 갈리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정체모를 것'이다.


우리는 정체모르게 구성된 이 표현처럼, 어텍스트다.


어텍스트는 문자언어적 알고리즘을 거부한다. 이 세상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들어져 있고, 그 언어적 규칙이 이루는 정합성에 따라 동작하고 있으며, 때문에 핵심적인 문법만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말하는 텍스트주의를 거부한다.


텍스트주의는 불안의 산물이다.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어떻게든 삶을 안정된 공식 속에 짜맞추려고 시도한 그 결과다.


다들 그 목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그러한 문법적 공식이 사실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맞춘 연극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텍스트로 보며, 그렇게 삶을 텍스트의 문법 안에 가두고자 하는 일은, 아주 작게 사는 일이다.


이렇게 살면 삶은 축소된다.


삶의 내적 과정인 마음도 축소된다.


이렇게 작게 사는 일을, 우주의 모든 것이 마치 텍스트인 것처럼 상정하는 형이상학의 차원으로까지 격상시키면,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막대한 굴절이 생겨난다.


모든 것이 근본에서부터 다 곡해되어 버린다.


텍스트 해석의 가치는, 자기가 삶에 뒤집어 씌운 강박적 이야기를 해체하고, 여러 이야기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기존의 강박적 이야기를 다른 대안적 이야기로 새로이 해석해낸다 하더라도, 그 자체는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강둑에 자라나있는 갈대에 어떤 이야기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 갈대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텍스트일 뿐이다.


해석은 유희다. 인간이 놀고 싶어 하는 일일 뿐이지, 이 우주의 어떤 것도 인간의 문법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문법적 규칙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는 대상물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 어텍스트다.


존재가 어텍스트다.


문자언어의 지배를 거부한다.


어텍스트는 이처럼 반문(反文)이다. 그래서 반문(反問)한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아?"


소설은 그만 쓰고, 살림이나 잘 하면 된다.


어텍스트는 우리를 효과적으로 이 지점에 이르게 해준다.


어텍스트를 번역하기에 가장 적절한 한자어 표현은 아마도 '불립문자(不立文字)'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최대치의 삶을 뜻한다. 27% 정도 살려고 우리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그러한 문법규칙의 평정치에 따라 우리는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음살림은 최대치로 살고자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음살림은 불립문자의 일이다.


텍스트로는 세울 수 없다.


어텍스트가 스스로 바로 선다.


텍스트가 부질없이 날려간 그 뒤편에는 언제나 그렇게 사람이 스스로 바로 서있다.


살림만 잘 해나가는 정체모를 그 사람이 어텍스트의 구체적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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