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데이트 #4

"사물의 기억"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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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덮고 자던 하얀 시트에는 정말로 당신의 냄새가 난다.


우리 남매를 엄마처럼 키워주셨던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할 때, 동생은 할머니가 쓰던 돌침대를 갖고 싶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던 동생은, 어느 날 침대에서 이제 할머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하루 종일 울었다.


사람이 사람을 잊어갈 때에도, 사물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일을 하고, 돈을 벌며, 편의점 도시락을 데워 저녁을 준비하면서, 태연한 척하는 일상의 공기에 잠식되어 문득 세계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잊게 된 나에게 사물은 돌격해온다.


냉장고에 붙은 치킨집 쿠폰들 사이로 가스마스크를 왜 걸어놓았는지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아아, 나는 당신을 만나러 가던 도중이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언약이 있었다.


어느 날엔가 새벽에 잠을 깨어 이 모든 것을 다시 기억했다.


내가 덮고 자는 하얀 시트에는 이제 당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물에는 기억이 담겨 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하얀 시트이지만, 당신은 그걸 참 좋아했다. 건조기로 말린 이 뽀송뽀송함이 왠지 모르게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사랑받는 느낌이라고 당신은 말했다. 누구나 다 덮는 평범한 시트라면, 그 누구나 다 이 사랑받는 느낌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당신은 웃음지었다.


이런 냄새구나.


바로 이런 냄새였구나.


당신의 냄새는 사라졌어도, 사랑받는 냄새가 난다.


사람이 사람을 잊어갈 때에도, 사물이 사람을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 사람이 사람을 기억한다.


당신이 사랑하던 것으로부터 나는 사랑받고 있다.


당신이 제일 아끼는 편지지에 제일 소중히 여기는 펜으로 적은 연애편지가 건네진 기분이다.


당신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정해놓았다. 당신처럼.


이것이 우리의 세기말 데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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