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에 대한 오해들과 사실들"
실존주의, 실존철학, 실존심리학, 실존상담 등이 묘사하는 실존이라는 개념에 대한 아주 큰 오해들이 있다. 이러한 오해들은 실존을 파괴적이거나 개인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이와 같은 오해의 주역들이 오히려 개인을 위협하고 파괴하려 하는 세력들이다.
사르트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실존이 무엇인지를 간명한 문장으로 매우 잘 묘사했다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실존주의의 시작과 끝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발명품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실존은 부가로 익혀서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소재가 아니다.
실존은 삶 그 자체다. 우리에게 가장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묘사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들어보는 먼 세상의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낯설게 되어버린 것은 우리가 아주 기묘하게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진정한 나로 산다."
"이제 나만의 길을 간다."
"당당하게 이 멋진 나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본질을 실존에 앞세워 사는 본질론이다.
실존을 쉽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이다. 이에 반해 본질은 '있어야만 할대로'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들은, 진정함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지도 않으며, 멋진 자기의 이야기를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냥 있을 뿐이다.
어떠한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못하고 특정한 형태로 만들려고 고집하는 이들만이 과장되고 소란스럽다.
본질의 다른 이름들은 이상, 이데올로기, 신념, 원칙, 윤리 등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 삶의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준다고 가정되는 것들이다. 곧, 그러한 것이 없으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믿음이 본질론의 핵심을 구성한다. 본질론은 일종의 열광된 종교적 신앙행위와 같다. 그래서 본질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태도는 도취다. 가장 빈번한 도취의 형태는 자아도취다.
자아도취는 "이 좋은 것을 너에게도 전해줄게!"라는 계몽주의의 탈을 쓰고 제국주의의 행위를 이룬다. 모두를 다 자기의 얼굴과 똑같이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의 목표를 수행한다.
이것은 대표적인 정신적 폭력의 형태다.
우리가 가장 기분나쁠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어떤 이가 내세우는 본질에 입각하여 우리의 삶이 멋대로 평가되고 재단될 때 우리는 아주 기분이 더럽다. 흡사 정신적인 겁탈을 당한 듯한 불쾌감과 수치심을 경험한다.
이러한 본질 규정이야말로 폭력 중의 폭력이다.
이것이 가장 질낮은 폭력인 이유는, 폭력의 행사자인 본질론자들에게는 자기가 폭력을 쓰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질론의 신도들은 상대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지극한 선의로만 자기가 행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장 자아도취에 빠진 이들이 자아도취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모두가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현실을 꿈꾼다고 말한다.
본질론자들은 가장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망상가들이다. 꿈에 취해, 그리고 그러한 꿈을 꾸는 자기 모습에 취해 사는 이들이다.
심리적 미발달의 핵심적인 특징은 자기에게만 그러한 것을 남들 모두 그러할 것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경험한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 본질론적 주체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모든 이가 다 약한 거구나! 그도 불쌍했던 거구나!"
이렇게 그에게는 '모든 인간은 약하다.'라는 본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제 이 본질론적 주체는 모든 사람에게 이 본질을 뒤집어 씌우고자 한다. 실은 자기가 약한 것이면서, 모든 이의 본질이 약하다고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커다란 이득이 있다.
자기만 약하면 열등하게 소외되는 것 같은데, 모두가 다 약해지면 혼자만 이상하다는 소외감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이를 자기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고자 하는 이 본질규정의 기획은 이처럼 혼자라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시작부터 실패작이다.
'더 큰 것'을 '더 작은 것' 안에 억지로 넣고자 하면, 그 현실은 감옥이 된다. 감옥 안에서는 답답해지고, 화가 나며, 끝내 무기력해진다. 누구도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듯한 소외감을 경험한다. 아주 외롭다. 그 결과, 더 불안해진다.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가 바로 '더 작은 본질' 안에 '더 큰 실존'을 담고자 하는 기획이다. 이 방법으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일을 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불안해질 뿐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과 같은 이 이상한 본질론적 일을 우리는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해왔다. 이것이 마치 가능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당연한 것으로 착각되어 온 이유는, 본질이라는 것이 이야기로 구성되는 까닭이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으니, 그것이 실제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언어의 착각이 야기한 결과다.
언어를 가장 큰 것으로 보며 신격화하는 이들이 본질론에 빠지게 된다. 언어를 통해 본질 규정을 하며 자기들이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삶을 운용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본질을 실존에 앞세우는 본질론적 주체들에게 본질이란 자기들이 수집한 언어를 통해 정련해낸 명도인 셈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다.
때문에 이러한 이들에게 실존의 해체적 작업은 마치 강제로 무장해제를 시키는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니 본질론적 주체들에게 실존은 위협적인 것처럼 경험된다. 인간에게 실존이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이 본질론적 사유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위협적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두려움을 또 다시 은폐하기 위해, 실존이라는 것 자체를 모두에게 위험한 소재인 것처럼 만들고자 획책한다. 이 기만적 전략에 의해 실존은 흡사 '생각없이 막 사는 한량의 생활방식'처럼 굴절되게 묘사된다.
이로 인해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생활양식이 선택지로 놓이게 된다.
원칙을 따라 안전하게 사는 길과, 원칙없이 충동대로 사는 길이 그것들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 앞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조금 더 현명한 이들은 선택지에 대한 통합을 기획한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가슴의 느낌을 따라 사는 온전한 통합의 방식이 있다며, 이 현자들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그런 것은 없다.
이 현자연을 하는 이들은 다 본질론자들이다.
지금 실존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없이 막 사는 일'로서 본질 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실존이 마치 또 하나의 본질론적 개념이 된 것이다.
그리고는 MBTI에서 I와 J를 나누듯이, 두 개의 본질 사이에서 더 나은 하나의 본질을 선택해야만 하는 본질론적 게임에 강제로 끌려오게 된 것이다.
나아가 현자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본질론자들이 "허허, 두 개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 두 개를 통합한 것이 진정한 본질인 것이지요."라고 말하며 자기를 드높일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일개의 언어적 액세서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질론적 주체들이 실존에 가하는 폭력이다.
실존이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본질이 늘상 실존을 위협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정말로 위협하는 것은 실존주의자들이 아니라 본질주의자들이다. 그러면서 본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실존의 위협에서 사람들을 지키려 하는 정의의 영웅 행세를 하곤 한다.
우리 존재의 가장 큰 측면을 오히려 가장 작은 측면이 내쫓으면서, 이것이 '진정한 나'라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실존이 가장 크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둘러보기만 해도 너무 당연하게 알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한번 살펴보라.
우리는 비가 오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바람이 불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우리가 언어로 만든 모종의 원칙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언어로 존재를 규정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이 우주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런데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하는, 본질을 가장 큰 것으로 삼는 본질론적 사유가 효과적인 언어적 문법으로 인간세상에서 흡사 작동하는 것처럼도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그런 척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손가락총을 "빵!"하고 쏘면 "으악!"하고 넘어지기로 우리는 언어적 약속을 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분명한 이득이 된다는 전제하에서만.
이것이 사회계약이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사회계약이다. 상호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언제라도 임의로 파기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져 반드시 지켜야만 할 절대적 명령이 아니다.
이 임의적인 명령을 절대적 원칙인 것처럼 만들어, 개인을 관계 속에 항구적으로 속박하려 하는 것이 본질주의자들의 의도다. 이 의도는 전술한 것처럼 자기가 약하다고 경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의 논리를 신성한 율법으로 삼아 자기가 보호될 수 있는 '가상현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네트워크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관계의 정체다. 그리고 본질은 이 관계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작동한다.
본질론자들이 가장 많이 외치는 표현은 '더불어'다. 이들은 관계를 예찬한다. 관계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말한다.
가상현실이 인간이 살아갈 진정한 영토라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참됨(reality)을 말한다. 임의적인 가상현실을 진정한 것으로 믿고 있는 한, 인간은 자기 존재의 크기가 아주 비루한 것으로 축소되어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 갇힌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자유의 상실인 셈이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당연한 실재(reality)를 억지로 왜곡시켜 만들어낸 이상한 가상현실에서 상실해버린 자유를 회복하도록, 그럼으로써 자유를 증진하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도 본질주의자들에 의해 크게 굴절되어 왔다.
본질주의자들은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유를 '자기 혼자 제멋대로 구는 방임'으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그에 비해 진정한 자유는 더불어 평등하게 서로가 각자의 이야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자유가 실은 자유가 아니라, 이념의 행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즉, 본질주의자들의 자유야말로 '제멋대로 떠드는 일'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제멋대로 떠드는 자기의 이야기를 윤리화해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의도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어떠한 이가 다른 이에게 본질 규정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당당하게 해도 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본질론적 관계의 논리로 추구되는 자유란 거의 반드시 폭력으로 귀결된다.
허울좋은 언어만 있을 뿐, 그것은 실제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본질주의에 뿌리내린 언어와 관계의 정신적 폭력에 대해 들고 일어난 사상적 전통이다.
실존주의는 언어에 구속된 존재를 해방하고자 하는 운동이며, 동시에 관계에 속박된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실존은 관계성으로 작동한다. 관계와 관계성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관계는 '더불어'이고, 관계성은 '스스로'이다.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호작용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은 애초 상호적 만남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구조가 아니다.
관계는 특정한 이념과 목표를 위해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상적인 것을 향한 이념지향적 구조가 곧 관계다.
그러나 관계성은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념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지평과 연루된다. 근원적 관계성을 종교성이라고도 말한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우와, 놀랍다."라고 감동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별빛과 우리는 지금 협력하고 있지 않다. 어떠한 이상을 함께 추구하고 있지도 않다. 우리 사이에는 이념이 없다.
별과 우리는 약한 존재들끼리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랄랄라 랄랄라!" 저 먼 우주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가는 스머프 친구들이 아니다.
별빛이 몇억 광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오고 있었고, 우리도 저 넓은 밤하늘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가득 보내고 있었다.
저기서는 오고, 여기서는 간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다.
서로를 신비로 확인하고 있다.
존재하는 감동이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감동을 상호적으로 공명해 더 크게 울릴 뿐이다.
실존은 이 존재의 찬가다.
스스로 울고 있는 것은, 이미 이 우주 전체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우리 자신이 어떠한 주체적 주인공으로 서서 다른 존재들을 '알아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줘서 그것들의 본질을 언어적으로 규정해주어야만 그것들이 온전히 존재하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악하게 비유해도, 우리의 몫은 아무리 잘한들 50%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사물들이 고유한 분자구조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는 블록체인 기술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관계의 논리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언어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서로를 알고 있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까닭이다. 만약 우리 혼자였다면 우리는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신비를 알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의 신비를 알고 있다.
정말로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하도 본질론적 용법의 언어에 잠식되어 이상하게 살아오다보니 이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말하는 실존주의를 오히려 이상한 것으로, 나아가 위협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 것뿐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물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아주 살짝, 한번 물어보기만 할 뿐이다.
"그래야만 당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죄스러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고 고집하고 있는 그 모든 본질이 다 허구여도, 당신은 지금 존재하고 있죠?"
"당신이 지금 이렇게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어떤 당신에 대한 규정보다도 앞서 있죠?"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좀 말이 되지 않죠? 그렇게 당신의 존재가 말보다 한참 크죠?"
당연한 말을 한번 물어본다.
실존은 개인 대 집단의 대립구도 속에서, 개인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유가 다 실존이라는 개념을 또 하나의 본질론으로 조작해내려는 본질주의의 책략이다.
실존은 자아의 왕자병 놀이가 아니다.
관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관계에 치여 힘든 본질론자들이 오히려 그러한 자아의 과잉된 개성을 추구하게 된다. 자기들의 억압된 소망을 실존이라고 하는 개념에 투사하여 그걸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실제는 어떠한가?
가장 실존하면 가장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기능하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기능을 전혀 목표로 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효능이다.
여기에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생겨난 까닭이다.
더 작은 본질로 더 큰 실존을 누를 때 생겨나는 것, 그것이 외로움이다. 소외다. 지속가능성의 부정이다.
그러다 더 작은 본질을, 당연하게, 더 큰 실존이 뚫고 나오게 될 때, 모두가 목을 축일 수 있는 그 힘찬 생명의 물줄기를 우리는 바로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존재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다.
실존주의는 정말로 물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