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에너지의 고통과 창조성의 회복"
인류가 생존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살 만해지자 크게 대두된 것이 심리적 고통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프로이트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아주 정확하게 심리적 고통의 이유를 해명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잉여에너지가 자기 자신을 치는 것이 심리적 고통의 이유입니다.
프로이트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먼저 니체는 심리학적 철학을 전개하며 인간의 삶을 힘의 문제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자기의 생명력을 최대치로 활용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곧, 삶은 에너지 운용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현상의 총체화된 내적 체험입니다. 이는 개인이 지닌 생명력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경험한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마음은 에너지입니다.
운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에너지를 늘 변화해가는 삶에 잘 활용하지 못하거나 활용할 기회가 없을 때, 에너지는 과잉되어 잉여에너지가 됩니다. 내적으로 폭발할 것 같은 상태와도 같습니다. 이럴 때 마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이 크게 경험됩니다.
그래서 이 불안이 야기하는 불편감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팽창하는 에너지의 절반을 떼어 그 팽창의 기운을 억누르는 데 활용하게 됩니다.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양쪽에서 맞부딪치게 함으로써 서로를 상쇄하는 길항작용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이 기제를 잘 알려진 바대로 억압이라고 부릅니다. 억압은 자기가 자기의 생명력을 눌러 없던 것처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는 언제나 0입니다. 생산성이 없습니다. 동시에 그 과정은 왼손과 오른손으로 하는 셀프줄다리기만큼이나 힘들기만 합니다. 힘든데 그 결과로 얻어지는 보상도 없습니다. 이럴 때 찾아오는 무기력한 감각이 바로 우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불안과 우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피로한 광대가 곧잘 되어있곤 합니다.
자기의 에너지에 스스로 치여 산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적 저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아직 좀 생소하기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낯설기에 이를 불편하게 여기며 빨리 처리하려고 합니다. AI처럼 일종의 정보처리기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마음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는 차라리 마음이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이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져야 할 앞길을 가로막아 지치게 만드는 것이 마음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방학숙제처럼 산더미 같이 밀려 있는 마음을 하루 종일 처리하느라 힘이 다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보고들도 종종 합니다. 그럴수록 자기가 효과적인 정보처리를 하지 못하는 저질 CPU를 탑재한 똥컴인 것 같아 심히 우울해지곤 합니다.
마음에 대한 착각이 빚어내는 갈등상황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처리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이 모든 국면은 새롭게 전환됩니다.
마음을 처리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 핵심적인 첫 걸음은, 우리에게 마음을 처리할 능력이 원래 없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처리한다는 것은 자신이 고집하는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러한 통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차라리 마음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면 좋습니다.
"마음은 내적 자연이다."
우리에게 자연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 날 하루 종일 방에 앉아 주술용 종이인형을 접으며 비가 멎을 수 있게 처리하려는 일은 전적으로 무용할 뿐입니다. 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외적 자연이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통제대상이 아니듯이, 내적 자연인 마음 또한 그러합니다.
자연은 처리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의 소재입니다.
어떤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동인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같은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창조는 가능해집니다.
누군가는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는 비 앞에서 주술용 종이인형을 반복적으로 접으며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우울감을 경험하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비가 오는 동안 각각의 얼굴이 살아 있는 개성적이고 예쁜 종이인형들을 만들며 기쁨을 느낍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자연을 우리가 처리할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창조의 감수성은 회복됩니다.
어떤 이는 화산 지역에서 온천리조트의 그림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비가 잦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파스텔톤의 화사한 비옷을 입고 산책을 즐기는 그림을 봅니다.
자연조건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조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변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는 대단히 창조적인 현실이 펼쳐집니다.
자연을 통제하고자 하는 비효율적인 에너지의 남용 및 억압이 멈추고, 이제 그 에너지가 온전하게 우리 인간의 본원적인 속성, 바로 창조성에 투여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내적 자연인 마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만으로 우리의 창조성은 거의 즉각적으로 개화됩니다.
물론 우리의 태도는 "바꿔야지, 바꿔야지, 다르게 봐야지."라고 주문을 계속 외운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기계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마음에 대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될 때, 할 수 없는 그 유한한 조건들 속에서, 할 수 있는 소재들만이 우리의 눈에 명료히 포착됩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고, 우리의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할 수 있는 소재들을 통한 창조적 재구성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물이 현재의 상황에 따라 그 형상을 변화해가며 유유히 흐르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창조는 현재의 조건에 따라 이처럼 우리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유연하게 운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상태를 고집하지 않으니 막히지 않아 재미있는 일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이 재미있는 창조의 소재입니다.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만 봉사하다가 창조성을 잃어 삶이 막힌 이들은 더욱 마음을 문제로 보며 처리하려는 경향성을 갖습니다. 그럴수록 삶은 더 막히고, 에너지는 흐르지 못해 과잉됩니다. 이것이 고통의 연쇄고리로 들어가는 시작점입니다. AI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에, 이 지난한 문제해결의 과정을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속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 시절에 좋다고 정해놓은 임의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삶의 지속가능성만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삶은 늘 변화를 통해 지속됩니다. 현 상황에 적절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일에 에너지가 자연스레 쓰일 때, 우리는 무리없이 효과적으로 에너지를 운용하게 됩니다. 창조성은 이처럼 즐겁게 변화해갈 수 있는 우리의 속성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음이 그 핵심적인 소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