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세계"
우리에게 있어 최초의 세계는 불가피하게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최초인 까닭에 마치 절대적인 세계인 것처럼 착각됩니다.
어떤 것을 절대화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하게 되는 일은 반복입니다. 이것은 유지하기 위한 반복입니다.
최초의 세계는 반복을 통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세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양적으로 반복하는 횟수가 많아지는 만큼 자신이 더 좋은 상태가 되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최초의 세계인 부모와의 관계양식을 반복하기만 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제공해줄 것 같은 대상을 매번 찾아 그를 부모로 삼은 뒤 그 모습을 따라합니다. 그렇게 자기 세계가 넓어지고 자기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저 영원한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대상은 바뀌어도 대상과 맺는 관계양식은 동일합니다.
이러한 주체는 언제나 같은 세계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세계는 닫힌 세계며, 이는 감옥에 갇힌 삶과 같습니다. 부모가 사는 모습을 답답하게 생각하며, 자기는 절대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의 삶은 부모와 동일한 방식으로 곧잘 막히곤 합니다. 살펴보면 자기의 부모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다르고 싶다면서, 부모로 인해 만들어진 최초의 세계는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절대적인 세계로 삼아 그것이 동일한 양상으로 유지되기를 고집할 때 반드시 우리 삶의 흐름은 막힙니다. 이것을 '세계의 고착'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레고블록으로 성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부푼 마음으로 꿈을 담아 만들 때는 좋았습니다. 완성해놓고보니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성된 그 성은 이내 애물단지가 됩니다. 먼지가 앉지 않도록 늘 청소하며 관리해줘야 하는 또 하나의 고된 일감으로만 전락합니다. 원래 어떤 것을 고집하며 유지하려는 일은 가장 힘든 일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다고 경험했던 특정한 세계의 모습에 고착될 때 이제 삶은 활기를 잃고 경직됩니다. 절대적이라고 상정해놓은 그 세계가 기준이 되어 다른 모든 경험은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니 늘 비교하는 삶을 살게 되고, 효과적으로 그 세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자책하게 되며, 일상은 언제나 자신이 이상적 기준으로 설정한 절대적 세계와의 비교 때문에 생겨나는 번민과 갈등 속에 놓이게 됩니다. 세계라는 것이 고통뿐인 우울한 소재가 된 것입니다.
최초의 세계를 유일한 세계로 놓고 거기에 절대성마저 부여한 뒤 그 세계에 고착되었을 때 생기는 일입니다.
이렇게 세계의 고착으로 인한 우울을 경험하는 이들은 대개 부모를 원망하거나, 자기가 부모처럼 설정해놓은 대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자신이 임의로 절대화한 것이 자기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원망입니다.
이들은 최초의 세계가 가장 완벽한 세계이며, 평생 그 세계가 영원의 낙원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삶이 막혔을 때 그것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최초의 세계를 만든 부모의 책임처럼, 그리고 자신이 부모를 투사한 대상의 책임처럼 간주됩니다.
자기가 주술적 기대를 한 뒤 그 주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상대의 탓으로 전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세계는 우리에게 작동하는 최초의 주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용은 보편적입니다. 그런 만큼 쉽사리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세계가 깨어져야, 또 주술에서 깨어나야 우리는 인간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실존심리학은 개인이 고착된 세계의 절대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지쌓인 성을 허물고 다시 레고블록을 재조립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과 조건 그리고 필요에 맞추어 유연하게 가능한 일입니다.
'해체'라는 표현에는 메뉴얼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더 대단한 모범적 메뉴얼을 따라 조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체란, 자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보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현상학이며 또 선(禪)입니다.
이러한 일이 한 번이라도 시도된다면, 그 즉시 세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이라는 이해가 개인에게 명징하게 찾아듭니다.
개인은 이제 삶이 막힐 때면 언제라도 현재의 세계를 허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환경 속에 드러나있는 조건들을 '최초의 눈'으로 다시 보며, 현재에 유려하게 작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처럼 최초의 세계도, 최초의 주술도 아닌, 최초의 눈입니다.
개인이 페르조나를 써서 다양한 세계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상대되는 요소들을 연금술적 변증법으로 통합함으로써 점점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빅데이터가 가장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는 확장이 아니라, 해체를 통한 변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자유입니다.
이러한 변혁을 거듭할수록 자유는 엄청난 크기로 증진됩니다. 그 크기만큼 인간은 자신의 크기를 확인해가게 됩니다. 더 많은 세계를 허물어갈수록, 또 재구성해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존재는 최대치가 되며, 존재하는 즐거움 또한 성대합니다.
이 과정을 삶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세계를 깨어내는 최초의 눈이 번뜩일 때 삶은 스스로를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