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시간"
상담은 묘(猫)한 시간입니다.
고양이의 시간이며, 고양이가 있는 시간입니다.
상담자의 전문성은 상담자가 캣맘이 되는가 고양이가 되는가에서 변별됩니다.
캣맘은 자신이 세운 안전한 울타리와, 통제하지 않는 자비롭고 부드러운 권위의 품 안에서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허용합니다.
그렇게 캣맘은 고양이가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성장할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상담이 아니거나, 가장 비전문적인 상담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왕과 같이 가장 높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권위에 사로잡힌 내적 역동을 갖고 있는 이들이 상담전문가라는 허명을 입고 이러한 일을 곧잘 합니다. 자기의 진정한 권위를 통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권능의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진짜 상담자들, 또는 가장 전문적인 상담자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고, 다만 고양이가 됩니다.
고양이는 불편한 타자입니다. 누군가의 품에 종속되지도 않고, 자신의 품에 종속시키지도 않습니다. 늘 긴장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 거리감 속에서 동시에 존중감을 갖습니다.
상담은 이처럼 내담자가 상담자라고 하는 불편한 타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 타자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전문적인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최초의 타자여야 합니다.
내담자의 고통은 지금까지 그의 세계에서 타자를 은폐하고, 회피하며, 무시해왔기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담자는 내담자 앞에 분명한 타자로 서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담자는 자기가 왕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시공간을 공유해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숙이라고도 표현하고 되어감(becoming)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상담은 이처럼 묘하게 무르익어가는 시간입니다. 아이가 타자를 만나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성숙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윤리의식을 함양한 유교적 발달모델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숙은 경계에 대한 존중의 정도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지 않는 것이 경계입니다.
상담은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문예창작의 시간이 아니라, 타자라는 하나의 경계선을 조우함으로써 내담자 자신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존재과학의 시간입니다.
고양이라는 존재는 과학입니다.
경계가 분명하게 살고 있는 것이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는 자기가 정당한 과정을 밟아 따지도 않은 자격증을 자기의 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툭 밟고 지나가버립니다. 타인을 배신해 얻은 성과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다른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을 정당한 자신의 전문적 경력으로 날조해 선전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고양이는 자신이 유용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철저하게 쓸모가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고양이는 사랑스럽습니다.
고양이가 미식적 유용성을 갖고 있었다면, 우리는 고양이를 사랑스럽게 보기보다는 등심의 마블링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양이에게 아무 유용성이 없기에, 우리는 고양이라는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자의 의미입니다.
타자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무용성의 대변자가 바로 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타자를 소외시켜 왔습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이득을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타자를 바라보던 그 시선이 우리 자신을 동일하게 향합니다. 상담실에 오는 내담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러한 물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쓸모없는 존재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존재는 원래 쓸모없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쓸모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존재입니다.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작동하고 있기에 존재는 사랑스럽습니다.
쓸모없어도 존재하는 이는 사랑스럽습니다. 고양이처럼.
그리고 실은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싶어서 내담자들은 상담실에 찾아옵니다.
내담자는 자신의 존재가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오직 그 사실만을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캣맘들은 이 사실을 전하지 않습니다.
상담자가 아니거나, 비전문적인 상담자들은 내담자의 존재 자체로부터 드러나는 내담자의 사랑스러움을 알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내담자의 사랑스러움을 알아줌으로써 내담자가 사랑스럽게 될 수 있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합니다.
모든 마음을 온전하게 알아주어야 마음들이 사랑스럽게 드러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바로 이 캣맘들의 표어입니다.
이것은 사기이며, 표절의 행위입니다.
사랑의 원작자인 존재 그 자체의 자리를 자기가 중간에서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담자에 대해 모르는 채로 그냥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의 온전함을 알게 된다는 '앎의 원리'가 이 사기극을 위한 도구입니다. 이 '앎의 원리'는 동시에 인간의 역사속에서 타자가 소외되어 온 동일한 그 원리이기도 합니다.
주체가 유용하고 능력있으려 하는 만큼 타자는 객체가 되어 소외됩니다.
자신이 남들에게 쓸모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타자를 끝없이 소외시키며, 그 빗자루질로 일으킨 바람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고통받습니다.
상담자가 아니거나, 가장 비전문적인 상담자들은 내담자에게 쓸모있어 보이기 위해 언행을 연출하는 이들입니다. 고양이에게 가장 유용한 존재가 되어 고양이의 사랑을 얻어내려 하는 캣맘들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기에, 이들은 유용함을 조건으로 사랑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용하려고 하는 만큼, 자신의 존재는 더 빨리 사랑스러움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일은 반복됩니다.
가장 쓸모없는 고양이가 나타나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워 버리기 전까지.
상담은 고양이의 시간이며, 고양이가 있는 시간입니다.
상담자가 먼저 고양이로 드러나고, 내담자도 이내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시간이 바로 상담의 시간입니다.
아무 생산성 없고, 소설처럼 인생의 자극을 만끽할 수 있는 소재도 아니며, 더 유능한 인간으로 성장하지도 않습니다.
상담은 다만 당신이란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의 아주 오랜 소망을 이루는 시간입니다.
그걸 원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그 소망이 실현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가 이 사랑스러움의 소망을 더 큰 형태로 펼쳐내고자 하는 일에 도전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실존적으로 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상담자는 삶의 전영역에서 이 무용함의 길을 모험합니다.
상담실에서나 길거리에서나 고양이가 늘 무용한 고양이이듯이, 실존상담자도 쓸모없는 존재로 그 자신을 항시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항구적인 사랑스러움, 이것보다 멋진 것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이처럼 실존상담자는 가장 좋은 것에 가장 정직하고 또 가장 성실합니다.
그는 묘한 시간과 일치되어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