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선하기"
실존상담은 시(詩)로 철학하는 일입니다.
실존상담의 배다른 쌍둥이라고 불리는 선(禪)도 동일한 일을 합니다.
물론 선은 철학이 아닙니다. 언어적 원리도 아닙니다. 심리학적 방법론도 아닙니다.
그냥 삶입니다. 시로 흐르는 삶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선은 차라리 웃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 안에 담긴 말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사랑을 우리는 임의적으로 철학이라고 명명해볼 뿐입니다.
스즈키 선사의 책에서, 선(禪)에 대해 칼 융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애잔합니다.
동서고금을 포괄하는 오컬트 오타쿠로서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체험과 지식을 동원해가며 자신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선을 이해했는지를 증명하고자 융은 필사적입니다. 다양한 외계의 용어들을 써가며 자신이 오컬트계의 탁월한 권위자임을 보여주고자 맹진합니다.
그리고 스즈키 선사는 "선은 오컬트가 아니다."라는 말로 융의 모든 말을 무화시킵니다.
융이 복잡하고 기괴한 언어로 한 일을 '의미부여'라고 합니다.
선은 의미부여하지 않고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니까 자꾸만 생각이 많아지고 모든 것이 복잡해집니다.
특히 높은 수준으로 보이려는 의도 속에서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사랑 없이 말하는 일은 이처럼 복잡하고 힘듭니다.
사랑 없이 사는 일은 복잡하고 힘듭니다.
사랑하면 단순합니다. 사랑만 하면 됩니다.
선을 굳이 한 단어로 묘사하자면 '단순성'입니다.
옛날 선의 전통에서 장작패고 물길어오는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을 몇 년간 시킨 것은 이 단순성이 몸에 익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쉬이 단순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자극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자극은 성장의 자극입니다. 왕과 같이 더 높은 계급으로 성장하기 위해 더 복잡하고 똑똑해보이는 일들을 하면 이 자극이 충족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단순한 것은 나쁜 것입니다. 단조로워서 지루한 것은 악입니다.
자기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중요하고 값진 일들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왕처럼 고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위의 존재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꿈속에서 산다고 표현합니다. 망상의 삶입니다.
선은 단순한 것에서 실제의 삶의 정수를 얻습니다. 단순한 일을 하며 우주만큼 깊어집니다. 뿌리가 아주 튼튼해지고, 중심이 든든하게 생겨나며, 기초가 굳건해집니다.
그렇기에 그 위에서 진짜 멋지고 창의적인 일들을 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해도 지루하지 않고 조바심에 쫓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기초의 문제입니다.
기초가 없어, 뿌리없는 나무 같은 이들이 화려한 자기를 만들어 의미부여를 합니다.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늘 쫓기기에 더 큰 자극을 소비하고 그 자극에 도취되어 불안과 두려움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하는 일은 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존재의 근간에서부터 튼튼해지도록 돕는 선(善)한 일이며, 단순하게 선(禪)한 일입니다.
단순성은 충실성입니다. 그 시간과 100%로 일치되어 충실해진 것입니다. 의미부여를 해서 왠지 모를 가슴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100%로 충족된 그 상태가 곧 존재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존재 안이 텅비었기에 언어로 의미를 부여해 존재를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의미입니다.
붓다가 꽃을 들자 인간이 웃은 염화미소가 이 의미를 드러냅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의미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선에서는 단순하게 웃습니다.
기쁘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완벽한 이 존재의 기쁨은 모든 것을 단순하게 그냥 하는 와중에 문득 피어납니다.
언어로 속이지 않고, 존재에 성실한 이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선(禪)한 일이고 선(善)한 일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훌쩍 타고 날아오릅니다.
마음의 자유라고 거창하게 말은 하겠지만,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선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