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1

"시로 철학한다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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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실존상담자들 그리고 실존철학자들은 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언어로 설명가능하고, 나아가서는 언어를 통해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다는 미숙한 아동들의 철없는 폭력에 매우 지치고 염증을 느낀 이들이었거든요.


그래서 공통적으로 이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것을 말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시(詩)입니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려는 몸짓입니다.


힙합가사처럼 라임을 맞춘 문구나, 무협지처럼 과잉되고 촌스러운 정서표현이나, 자신이 잘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 뛰어난 수준높은 사람인 양 호들갑을 떨며 사정한 자위의 언어가 시가 아닙니다.


시는 몸짓입니다.


삶에서 정직하게 이룬 몸짓이 시가 됩니다.


삶이 바로 우리가 결코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철학자들은 이 말할 수 없는 삶으로 시를 노래했고, 실존상담자들은 말할 수 없는 삶의 내적과정인 마음으로 시를 노래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말할 수 없는 삶을 다만 사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삶에 대한 사랑이며, 곧 미지의 신비에 대한 사랑입니다.


시로 철학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시로 노래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인생이라고 하는 자신만의 시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詩)로 철학한다는 것은 시(時)로 철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시간의 시(詩)입니다. 그리고 실존철학은 그 시적 시간,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철학적 시입니다.


이러한 시는 표현 그대로 몸짓입니다.


그의 몸이 곧 시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이는 그의 존재 자체가 시적인 향기를 냅니다.


이것을 '존재감'이라고 말합니다.


이 삶의 존재감으로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위할 때, 그게 곧 상담이 됩니다.


상담의 목표는, 적어도 실존상담의 목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회복하도록 안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자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피어나있는 그의 존재 자체로 이미 그 회복의 방법을 내담자와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산 만큼 그렇게 상담할 수 있다는 점은 실존상담에서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렇게 산다.'라는 것은 특정한 경험의 획득여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런 경험 했으니까 그렇게 산 거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 프로그래밍 언어의 구성물이라고 유아적인 SF소설가들처럼 생각할 때 이러한 오해가 생겨납니다. 특정한 경험의 소스코드만 따와서 붙여넣기만 하면 자기의 삶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이 되리라는 착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자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사자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자의 몸으로 사자처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타자와 변별된 우리 자신의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불가능한 이 한 번뿐인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중요한 삶의 근본사실이 우리에게 확인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 서로 협력해서 삶을 더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도 합니다. 완벽한 착각입니다. 판타지소설 같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사실적으로는, 협력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질이 아니라, 순수하게 동물의 특질입니다. 약한 동물들이 강한 동물의 위협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협력행위를 합니다. 가장 이성적이지 않고 동물적인 차원에서 사는 이들이 죽음 앞에서의 협력을 예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약하더라도 죽음과 그 스스로 독대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독대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이 개인에게 있다는 이 사실이 바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질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저 유명한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을 떠올릴 수 있으며, 광야로 홀로 나간 예수의 모습과 보리수에 홀로 앉은 붓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선(禪)의 수행자가 자기 팔을 자르고 설원 위에 홀로 서있던 장면도 이와 같습니다.


시가 쓰이는 것도 이 지점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죽을 운명'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을 운명'과 독대하여 '살 자유'를 음미할 수도 있습니다.


'죽을 운명'과 '살 자유' 사이가 바로 시가 꽃피어나는 공간입니다.


개인이 죽음과 독대했을 때만이 그 삶은 시가 됩니다.


죽음을 은폐하고 회피하기만 하면 시가 아니라 설명문이 되고 메뉴얼이 됩니다.


'죽을 운명'을 자신의 언어로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면 '살 자유'가 사라집니다.


이러한 상태를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이라고 부릅니다. 존재망각 속에서는 존재감이 없어서 늘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주는 관계의 언어에 의존해서만 연명할 수 있는 처지가 됩니다. 일종의 언어기생충의 모습입니다.


언어가 이처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기생의 도구로 전락했기에, 시는 점점 더 사멸해갔습니다. 시가 사라진 현실이 인간에게는 비극입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존엄성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으로 사는 일은 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정직성과 성실성으로 가능합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죽을 줄 알며 산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죽을 줄 알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쌓아간다는 것입니다.


정직성과 성실성은 실존상담자의 덕목입니다. 합쳐서 일치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일치성이 우리 삶의 뿌리입니다. 존재의 근거입니다. 일치된 것의 비유적인 이름이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한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을 향한 신뢰의 이름입니다.


실존상담자는 그의 삶과 그의 말이 일치해서 삽니다. 자신이 살지도 않은 삶을 거짓으로 지어내지도 않고, 그의 경험수집의 목록을 그의 삶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쉽게, 실존상담자는 내담자를 속이지 않습니다. 내담자에게 사기를 치지 않습니다. 내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담자에게 환상의 이야기를 불어넣지도 않습니다.


내담자들이 실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상담자가 실존상담자입니다.


지구의 중력은 우리에게 간이라도 내어줄 것처럼 친절한 미소를 연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존상담자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이름이 바로 인간입니다.


실존상담자의 길은 인간이 되어가는 길입니다.


우주가 정성스럽게 빚어낸 유일하고 영원한 시로 노래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바로 당신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실존상담입니다.


시로 철학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영원한 신비인 인간에 대한 그 사랑이 실존상담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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