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스토리로 몸을 착취할 때"
오늘날은 스토리로 몸을 착취하는 시대입니다.
마치 그게 멋진 일인 것처럼, 어디에서든 사람들에게 다 자기만의 당당한 스토리를 말하라고 종용합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스토리텔링을 강제합니다.
회사에 들어갈 때나, 어떠한 심사를 받을 때나, 우리는 스토리를 준비합니다. 우리를 평가할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야만 할 재롱둥이가 됩니다. 그럴 듯한 스토리가 있을수록 높은 고객만족도를 성취하여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됩니다.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또 산과 들로 나가, 그리고 해외를 여행하며 소재를 찾습니다. 일종의 '경험수집가'가 됩니다. 더 많은 스토리의 경험을 축적해 '글감'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권위를 얻는 것만 같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이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자 여러분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부인, 제 경험에는 말이죠...' '제가 이런 경험이 있었는데요...' 경험, 경험, 경험! 맙소사! 경험이 그들을 대신해 생각해준다고?"
실존주의는 스토리도 아니고, 안티스토리도 아닙니다. 실존주의는 다만 "스토리가 아니다."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무엇이 스토리가 아닐까요?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목성이 어떤 스토리도 아니듯이, 우리의 몸도 어떤 스토리가 아닙니다.
몸은 존재할 뿐입니다.
아무런 스토리 없이도 몸은 존재합니다. 몸은 스토리를 지향하지도 않고, 스토리의 대적자도 아닙니다. 표현 그대로 다만 '몸은 스토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을 착취해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든 몸을 스토리의 하인으로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단적인 예로, 자기가 생각해낸 스토리에 자기의 몸을 맞추는 일을 우리는 '변화'라고 부르며, 또 '성장'이라고도 부릅니다.
자기가 써낸 소설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동작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는 일도 빈번합니다.
스토리에 존재를 종속하려 하는 것이고, 스토리가 존재를 이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폭력 중의 폭력인 상황입니다.
어떤 이에 대해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해놓고, 그 틀을 벗어나면 죽이려 하는 일과 같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본질'이라고 진리의 권위를 부여한 뒤, 세상이 다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본질을 앞세워 실존에 폭력을 가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잃어가게 됩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자기 생각대로 되는 성취를 경험한다 해도, 늘 공허하고 화가 납니다.
사라지지 않는 그 화를 해소하고자 계속 스토리를 만들어 끝없이 몸을 장작으로 태웁니다. 자신의 몸과 그 주변의 것들이 더 많이 함께 불타게 되면 자기 안의 불은 꺼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실상은 그냥 불지옥만 펼쳐질 뿐입니다.
불지옥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화를 남에게 넘기고자 이간질과 협잡질을 일삼습니다. 그렇게 남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자기는 여여하게 웃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남들이 대신 불타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는 좀 쉴 수 있기 때문에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스토리에 매우 지쳐있는 것입니다. 스토리에 몸이 착취되는 현실이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스토리가 아닌 것을 실은 우리는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쉼의 근원일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간절합니다.
그게 바로 몸입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입니다.
저 유명한 실존주의의 선언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기 위한 방향성을 정확하게 지시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래 본질에 앞서 존재합니다. 본질이 먼저 있고 존재하게 된 것들이 아닙니다.
특히나 인간에 대한 설명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잘 성장시킬 수 있는 메뉴얼 따위도 없습니다.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불확정성이 인간의 고유한 특질입니다.
그러니 실은 바삐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존에 쫓긴다는 말은, 흔히 인간의 본질을 생존으로 규정하고자 할 때 자주 들려오게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사실적으로 돈이 없는 이들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필요를 갖는 이들은 그냥 단순하게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이미 넉넉히 생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자원을 가진 이들만이 생존에 쫓긴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누군가는 20억짜리 아파트 대출이자를 내야 해서 생존에 쫓긴다고 말합니다. 자가주택은 따로 있고, 그 부모가 물려줄 유산만 해도 대략 50억입니다.
이러한 이가 지옥의 악마들에게 부당하게 고통받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악에 맞서 싸우고 있는 불굴의 전사의 의지를 그 이마에 새깁니다. 이 어둠의 골짜기에서 '생존'이라는 신성한 깃발이 결코 쓰러지지는 않게 하겠다고 소주 한 잔을 벌컥 들이키며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그는 술이 아니라 스토리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생존에 쫓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삽시간에 불어납니다.
20억 원의 아파트를 '잉여재산'으로 갖고 있는 이가 생존에 쫓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스토리에 의해 설정된 거대한 욕망을 쫓고 있기에, 그 거대한 것이 역으로 자기를 쫓고 있는 것처럼 경험되어 두려워졌을 뿐입니다.
자기가 만든 스토리에 자기가 겁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말했듯이, 오늘날은 우리가 스토리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으며 자기의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스토리를 지어내곤 합니다.
스토리는 방어책이고, 합리화의 수단이며, 변명을 위한 도구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가상의 상대에 대하여, 그에게 지지 않도록 자기의 몸을 억지로 부풀리기 위한 마법의 갑옷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으로서 삶을 잘 살아가는 이들은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스토리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인 만큼 자기 자신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몸입니다.
몸에는 물론 어느 정도의 역사성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드러나는 성질은 존재성입니다. 몸은 자신이 쌓아온 그 어떠한 역사와도 관계없이,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늘 스스로를 구성해 존재합니다. 이것을 유기체의 자기조직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몸의 존재성의 핵심은 언제나 적응력입니다.
변화되는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몸은 존재하려 합니다.
몸은 스토리가 아니라, 생태계의 환경조건을 만들어내는 우주의 운동을 따릅니다. 제일 강력한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룹니다.
몸과 일치하여 사는 인간은 그래서 강합니다.
적응력이야말로, 인간이 그 어떤 동물들보다 우위에 서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천재입니다.
이 유연한 유기체적 몸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스토리로 몸을 착취하면, 이 인간만의 천재적인 역량이 상실됩니다.
스토리를 우선해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의 생각대로 어떤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다가 우울하게 축 쳐집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는 특수한 환경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취약한 생명체의 생태를 보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만 재배될 수 있는 까다로운 식물 같기도 합니다. 표현 그대로, 온실 속 화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스토리주의자들은 언제나 계략을 궁리합니다. 이 세상을 자기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다 통제될 수 있는 화원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정원 속에서 인생스승처럼 대장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 비밀의 정원에서는 언제나 똑같은 스토리만이 반복됩니다. 좁은 우리 안에서 햄스터가 돌리는 쳇바퀴 소리가 늘 똑같듯이.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어떤 조건 속에서라도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위대한 적응의 힘을 가진 인간이, 자신이 대체 어느 만큼의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상실한 뒤 나약한 판타지소설 속 환상종처럼 되어버린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은 다 스토리가 만든 언어적 미로를 헤매며, 현재 자신들이 중요한 어떤 것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자기만의 길'이라고도 말하며, 거기에 '모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험이 아니며, 심지어 방황도 아닙니다. 차라리 정말로 길을 잃은 방황이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길을 찾고 있는 척만 하는 방종입니다. 공허한 자기착취입니다. 가장 쉬운 말로는 '시간때우기'라고 합니다.
미로 밖으로의 문은 환히 열려 있지만, 누구도 미로 밖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는 미로 안에서 진지하게 무엇을 하고 있는 척하며 다만 시간만 때워갑니다.
시간이 때움의 소재로 전락했을 때 인간이 체험하는 것은 절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절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절망하는 만큼 거대한 욕망을 만들어내어 억지로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책이 욕망을 생산하는 스토리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시대에 스토리를 소비하면 할수록 우리는 실제적으로 더 절망에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스토리는 마약처럼 현재를 잊기 위한 소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더욱 큰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어서 당당한 자신만의 길을 떠나라고 권하고 있는 스토리들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우리는 차라리 정말로 길을 잃어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절망에 정직해보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어디를 가든 미로 안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미로 밖으로 차마 우리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니 미로 안에서 '길'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원래 없으니까요. 그냥 미로일 뿐입니다.
스토리들이 지시하고 있는 그 무수한 화살표들은 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 길은 없습니다.
주저앉아보면 좋습니다.
앉아있으면, 자신의 몸이 매우 가깝게 느껴집니다.
길도 없는데 서둘 것도 없으니, 그 몸으로 오래 있어봐도 문제없습니다.
무척이나 오래간만이거나,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으로만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그리고 몸으로만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체험이.
오래 있어봐도 문제가 없으며, 우리는 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불현듯 일어나 미로 밖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실존상담자들입니다.
당신의 근육도 팽팽하게 당겨집니다.
당신을 나약한 바보로 만드는 본질의 스토리들 밖으로, 당신의 힘찬 질주가 이제 막 시작된 것입니다.
질주하는 당신의 실존이 언제나 가장 앞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