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11

"심심하세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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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면 철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심심(心心)한 상태는 마음이 '많이' 경험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심한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이것은 마치 끝없이 밀려드는 설거지거리를 처리해야만 할 것 같은 상태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마음처리기계'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철학을 한다고 마음을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처리해야 할 양적 소재로서가 아니라 향유할 수 있는 질적 소재로서 마음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돕는 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철학을 통해 '심심(心心)함'은 '심심(深心)함'으로 전환됩니다. 마음은 '많은 마음'이 아니라 '깊은 마음'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깊습니다.


철학은 이 깊은 마음을 가진 인간에 대한 자기이해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깊은 마음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의식이나 심층심리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이렇게 다양한 내가 있었어!"의 소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도 죽고, 심층심리학도 죽고, '다양한 나'도 다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시선이, 바로 깊은 마음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죽을 거면 왜 태어난 걸까?"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무엇이 있을까?"


두 질문은 동일한 질문입니다. 철학적 질문과 과학적 질문은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바로 '깊은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심심한 상태가 얼마나 위대한 결과들을 만들어왔는지는 과학사와 그로 인한 기술문명의 발전이 증명하고 있는 바입니다. 깊은 마음은 이처럼 과학적 질문을 통해 인간을 위한 '외적 변혁들'을 일으켜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내적 변혁' 또한 가능합니다.


깊은 마음이 드러내는 철학적 질문은 우리 자신을 위한 내적 변혁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심하다면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심심하기 때문에, 일상이 공허하고, 만사가 다 재미없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이 공허하고, 만사가 다 재미없고,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심심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만사와, 우리의 삶의 의미를 다시 다 찾고자, 우리가 깊은 마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심리학판이든, 사이비심리학판이든, 종교판이든, 영성판이든, 판타지소설판이든, 남의 말을 진리의 교과서처럼 삼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마음에 대한 잘난 척들을 하기에 바쁩니다.


말을 숭배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입니다.


영성수준과 도력이 높은 무협지고수인 것처럼 스승질을 하려는 것도 죽음이 두려워서입니다.


자기 죽을 걸 망각하고 싶어, 말로 다 깨달은 척들만 하려 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죽음보다 더 센 스승처럼 인정받기 위해 시기와 질투와 협잡질로 부산한 것이 바로 '많은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 많은 마음은 다 죽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몽땅 다 죽습니다.


철학은 모든 것이 다 죽는다는 이 존재의 사실에서 출발하며, 실존상담자도 그러합니다.


실존상담자는 '깊은 마음'만이 유일한 상담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마음'은 '깊은 마음'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적으로 상대적인 감수성'은 '질적으로 절대적인 감수성'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또한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심심한 줄 알면, 우리는 내적 변혁을 위한 이 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심심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당신이 그렇다고 대답하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인간이 철학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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