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없는 삶, 관계없는 삶"
필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은 정말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종교 대신에 우리에게서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언지를 정확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종교학의 한 분과 내지 철학의 한 분과로 '종교철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표적으로 하는 일은 거칠게 말하자면 '종교없는 삶'을 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종교철학에서는 사이비종교, 사이비과학, 사이비심리학 등의 현상에 아주 민감합니다. 이 현상들을 정확하게 종교적 컬트현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컬트현상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대체 어떠한 것들이 소외되어 인간이 고통받게 되는지를 종교철학에서는 비판적으로 규명합니다. 이처럼 종교철학 또한 '종교'라는 주제를 통해 정말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는 심리상담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의 핵심적인 주제는 사실 '관계없는 삶'입니다.
실존상담이든, 정신분석이든, 인지치료든, 게슈탈트치료든 간에, 대부분의 심리상담은 '관계는 필요악의 고통'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으며, 관계로부터 얼마나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주제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심리상담 또한 '관계없는 삶'을 지향함으로써 인간에게서 회복되기를 바라는 그 어떤 것이 분명 있습니다.
종교철학은 '종교없는 삶'을 말하면서, 또 심리상담은 '관계없는 삶'을 바라면서 그 회복을 꿈꾸는 것은 각각 '종교성'과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것이 실은 다 유사종교활동입니다.
시스템의 안정성을 믿는 것도 종교이고,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도 종교이며, 메뉴얼을 따르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종교입니다. 친구와 가족과 배우자를 믿는 것도 종교이고, 국가와 정당과 회사를 믿는 것도 종교이며, 영성가가 쓴 책에 나오는 영적 얘기와 사이비심리학에서 말하는 가짜이론을 믿는 것도 종교입니다.
이런 것들을 믿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서 망각되고 상실되는 것이 바로 '종교성'입니다.
종교철학과 심리상담은, 특히 실존상담은 아주 연계력이 좋은 학문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관계가 최고의 종교가 되어 있는 실정'에 입각해 평가될 수 있는 말입니다.
나아가 근원적 관계성이 원래 종교성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실은 '종교없는 삶'과 '관계없는 삶'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철학과 심리상담은 동일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합니다.
'종교'를 숭배하듯이 '관계'를 신적인 것으로 보며 그에 봉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종교성' 및 '관계성'을 매우 빠르게 잃게 됩니다.
역으로, 우리가 종교성을 잃었을 때 대신 추구하게 되는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관계성을 잃었을 때 대신 추구하게 되는 것을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없이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성의 회복'이며, 관계없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계성의 회복'입니다.
종교성과 관계성이 공통적으로 수렴하는 것은 바로 '삶'입니다.
종교없는 삶이란 '종교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서는 삶'을 말하며, 관계없는 삶이란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서는 삶'을 말합니다. 표현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원래 삶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종교보다 삶이 먼저이며, 관계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늘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실존이 본질에 앞섭니다."
주커먼은 그의 책에서 종교 대신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삶의 경외감'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실존주의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듯이, 이 '삶의 경외감'은 삶의 속성인 '불확정성'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종교와 관계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의 통제감을 높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와 관계를 활용해 삶에서의 불확정적 요소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합니다. 거짓된 안정의 왕국으로 뒤바꾸려고 합니다. 언어가 그 기만의 작업에 봉사합니다. 말로 안정적인 척하면, 현실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주술효과로 자기최면을 돕습니다.
종교에서나 관계에서나 우리가 늘상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든 간에, 종교적 대상에게나 관계적 대상에게는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주어야 할 당위적 의무가 요청됩니다. 약속이 이행되지 않으면 '저주받을 신'이고 '인간도 아닌 추악한 것'입니다.
주커먼의 경우에는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종교와 관계 속에서 모두는 불안을 느낍니다. 자기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너질 것 같거나, 상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기가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이 종교와 관계가 펼쳐져 있는 모든 상황을 지배합니다. 종교없는 삶을 살게 되면 오히려 불안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주커먼의 말은 그래서 큰 설득력이 있습니다.
종교와 관계로부터 얻는 거짓 안정에 대한 거짓 약속을 포기하고 불확정성을 사는 이가 경험하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경외감입니다.
이 경외감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듯 최초의 종교성입니다. 그리고 근원적 관계성입니다.
불확정성은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재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불확정성은 '대체불가능성'을 뜻합니다. 이 대체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자신의 삶의 대체불가능성을 체험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느낍니다.
종교성과 관계성이 삶으로 수렴한다고 할 때, 이에 대조적으로 종교와 관계가 수렴하는 것은 바로 '모방'입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위대한 종교적 언술의 내용이나 암기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인 척 기만하고, 바람직한 관계적 태도의 형식이나 학습해서 자신이 마치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척 기만합니다.
그러니 '종교없는 삶'과 '관계없는 삶'이란 결국 '기만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치한 삶'입니다.
실은 돈이 가장 중요하면서, 류시화 님이 번역한 책들에 나오는 인도성자들 흉내내며 영적인 척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종교적 형태를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성은 자꾸만 더 높은 수준으로 추구됩니다. 비일치된 것은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실제로 바라고 있는 돈의 수준과도 비일치되고, 자신이 바라고 있다고 착각하는 영성의 수준과도 비일치되니 인간은 총체적인 비일치의 상태 속에 놓여 있습니다.
돈과 영성이 있어야만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신앙하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존입니다.
실존은 곧 종교성이며 관계성입니다.
실존상담자는 자기 자신으로 일치된 이 삶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