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로 살기 #13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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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감독의 2014년작 영화의 제목을 빌려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정말로 사랑했는가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정말로 사랑한 것을 상실한 이는 자책하지 않습니다.


자기 탓에 그것을 잃게 되었다는 자책은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것입니다.


지갑을 잃었을 때 우리는 자책합니다. 아끼던 머플러를 담뱃재에 태우게 되었을 때도 자책하고, 주식의 손해가 막심할 때도 자책합니다.


자책은 소유물에 대해 생겨나는 반응입니다.


우리의 소유물이 우리 자신의 완벽성을 구성해주는 중요한 '부품'으로 기능했던 만큼 자책의 강도는 커집니다.


우리는 분명 적과 싸우다 로켓펀치를 분실해 격납고에 틀어박혀 우울하게 자책하는 마징가제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블의 히어로들은 지구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 동일한 자책감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더불어 그들이 인류를 실은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집니다.


어떤 것을 대상화해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는 감정을 애착(attachment)이라고 합니다.


애착의 일상적 이름은 '애증'입니다. 그 대상적 소유물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면 애정이 샘솟고, 자기를 힘들게 하면 증오가 터져나옵니다.


이 애증의 감정을 임의로 분열시켜, 애정만을 살리고 증오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억누르려는 의지를 우리는 책임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의지의 책임감'은 '실존적 책임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대상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의 삶에 정직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전자로 인해 증진되는 것은 억압의 감정이고, 후자로 인해 증진되는 것은 자유의 감수성입니다.


실은 마블 히어로들만큼 인류를 증오하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를 구원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이들에게 알 수 없는 부채감을 느낍니다. 그들의 책임감이 또한 우리의 죄책감이 됩니다.


실존상담자인 빅터 프랭클은 하나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아내를 잃어 자책하고 있던 한 남편에게 프랭클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아내가 자책하는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남편은 자책하는 일을 바로 멈추었습니다.


자책이 어떠한 지옥을 만들어내고, 또 그 지옥을 연쇄하게 되는지를 그는 눈치챘던 것입니다.


편히 쉬어야 할 아내가 이러한 지옥을 경험하게 해서는 안된다며, 남편은 지옥을 생산하는 일을 즉각적으로 관두었습니다.


자책이라고 하는 죄책감은 또 다른 죄책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서로 다 자기 책임이라며, 형식적으로는 다들 책임감이 높고 윤리의식이 강한 이들의 세상처럼 보이게 되지만, 그 세상은 그저 고통만을 가중하는 지옥일 뿐입니다.


붓다의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있습니다. 독화살을 맞은 이가 얼마나 자기가 바보같았으면 화살을 맞았을지, 또 남들에게는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지를 자책하고 있는 동안, 그는 죽습니다. 아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배려이지, 아픈 몸에 채찍질까지 가하는 자책이 아닙니다.


죄책감이 진실로 인간을 죽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자책함으로써 죄책감을 상대에게 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책하는 이들은 빨리 죽어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습니다.


죽어서도 살아남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품을 잃은 아픔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통째로 우리 몸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잃었다며 우리 자신을 자책할 때, 우리는 죽은 그에게도 실은 채찍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우리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전부였던 그를 잃은 우리의 아픔과, 그의 전부였던 우리를 잃은 그의 아픔이 같습니다.


그 아픔이 우리의 몸에 지금 있습니다.


이 몸이 다시 살아나는 일에만 우리는 모든 관심과 배려를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아픔을 향한 모든 관심과 배려인 까닭입니다.


이 몸이 아픔없는 평온한 천국이 되도록 우리가 도울 때, 그도 천국에 서있게 됩니다.


우리의 이 가슴이 그가 편히 쉴 수 있게끔 우리가 준비한 천국입니다.


이 몸이 천국처럼 살아나니, 우리와 한몸이었던 이 역시 죽어서도 이 몸에서 같이 살아남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습니다.


사랑을 잃어 자책하지 않는 이들만이 그 사랑이 살아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책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애착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사랑을 배울 기회입니다.


이 삶도 어쩌면 사랑을 배울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믿으며, 하루하루 사랑을 배워가고자 하는 이들을 실존상담자라고 부릅니다.


실존상담자가 자책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많은 것이 우주의 끝과 시간의 마지막까지도 그리운 그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고 싶어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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