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존중하기"
인간사의 거의 모든 문제는 경계를 존중하지 않아 생겨납니다.
심리적 장애라는 것 또한 전부 다 경계의 문제입니다.
인간에게만 유독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경험되는 이유는 인간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경계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놓여있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는 '절대계'와 '상대계'라는 경계입니다.
절대계는 '존재의 세상'을 말하고, 상대계는 '관계의 세상'을 말합니다.
존재의 세상에서는 모든 존재의 위상이 차별없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관계의 세상에서는 분명한 차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세상이 '언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원래 차별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합니다. 빨간 색은 파란 색과 차별됨으로써 빨간 색이라고 인식되고 형용될 수 있습니다. 고도화된 언어체계일수록 각각의 존재들을 분리하고 구분짓는 더 첨예한 변별의 표현들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함에 따라 언어능력도 신장되어 왔고, 그렇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상대계를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언어라는 투과기를 거쳐 '언어대로 되어야 할 것'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로 구성한 본질'이 '있는 그대로의 실존'을 앞서게 된 현상입니다.
언어라는 발명품으로 인해 상대계는 절대계보다 더 우월한 입지를 갖는 것처럼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절대계라는 경계는 점점 더 확고하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초의 경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경계의 문제란 언제나 경계가 흐려진 문제입니다. 경계가 흐려지면 경계 너머의 것들이 존중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들을 착취하고 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도구적 소재가 됩니다. 경계선성 인격장애는 이러한 편린을 잘 보여주는 증세입니다.
인간은 절대계와 상대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묘한 존재입니다. 두 세상이 언제나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흐리고 살아가면 중첩된 것을 멋대로 혼재시키게 됩니다. 이 혼재를 곧잘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합니다.
이를테면, 상대계의 구성원리인 관계를 중요시여기며 살아가는 이가, 관계를 잘하면 자신이 더 자유로워지고 평등하게 되는 현실에서 살게 되는 것처럼 간주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상대계의 논리를 아무리 잘 실천한다고, 절대계의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경계입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장애입니다.
심지어는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관계를 잘 해나가고, 서로의 온전함을 알아주는 선한 의도의 언어를 잘 쓰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수를 써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듯이, 절대계와 상대계는 결코 넘나들 수 없는 명징한 경계입니다. 두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일은 가능하지만 두 세상을 임의로 혼재시킬 수는 없습니다.
관계의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그것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의 유무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더 대단해지거나 반대로 더 초라해지지도 않습니다. 상대계의 것들과 절대계의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역으로, 어떠한 이가 존재의 세상을 살짝 엿본 듯한 모종의 체험을 했다고, 그가 상대적인 세상에 구성되어 있는 사회적 계급과 규칙 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이 유사종교체험을 했다고 대학교수나 회사사장보다 더 대단한 인물로 대접받아야 하는 일이 당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님의 것은 주님에게."라고 말한 것은 이 경계의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절대계의 논리로 상대계가 침범되어서는 안되며, 상대계의 논리로 절대계가 침범되어서는 안됩니다.
경계의 문제가 생겨나는 가장 큰 원인은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했을 때 생겨나는 대표적인 경험입니다. 즉, 존재의 세상인 절대계에 대한 감각이 부재하거나 망각되었을 때 열등감은 야기됩니다.
절대계를 100%로 체험하지 못했거나, 아예 체험하지 못했을 때의 상태는 동일합니다. 똑같은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언제나 지름길을 획책합니다.
늘 위축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빠르게 회복하고 싶어 온갖 우회로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계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흐린 까닭에 그 모든 우회로의 소재는 다 상대계에서만 탐색됩니다.
대체로 가장 강력한 우회의 소재로 간주되는 것은 '돈'과 '깨달음'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또 깨닫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열등감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렇게 믿는 이들은 반드시 경계를 함부로 짓밟는 폭력을 저지르게 되지만,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게 됩니다.
사채업자로 활동하며 돈을 번 어떤 이는, 자신이 많은 사람을 만나 제대로 된 실전경험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다며, 평생을 그 분야에서 이론과 실전경험을 그보다 '훨씬 많이' 쌓아온 심리학 교수를 우습게 여깁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더 맞다며, 전문가가 돈을 포기하면서까지도 그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쳐온 모든 경력을 무시하며 시비를 걸곤 합니다.
또 자기가 유사종교체험을 했다고 하는 어떤 이는, 자기가 이 세상의 절대적인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며 아무런 사회적 자격과 전문적 경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을 조롱하며 자기가 최소 전문가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전문적 인물인 것처럼 당연하게 맞먹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폭력입니다.
자신의 열등감으로 인해 경계를 존중하지 않아 생겨나는 폭력입니다.
돈이 많거나 유사종교체험을 했다고 자신을 상대계에서 가장 높은 존재인 것처럼 입지화하려는 것은 오직 컬트교주들뿐입니다. 이런 것을 '구루병'이라고 말합니다. 표현 그대로 '병'입니다. 경계를 흐리는 것은 모종의 정신병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한 2-3개월 꾸준히 하면 경험하는 '메타인지적 자기감'의 상태가 있습니다. 1년 정도면 대체로 다들 한 번 이상씩은 경험합니다. 이러한 것을 경험해놓고 최소 고등학교 시절 3년간을 이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간 이보다 자기 자신을 위에 두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이 애쓴 것을 애씀없이 가로채 행복하려는 양아치들입니다.
존재의 세상인 절대계에서는 애초 모든 존재가 평등합니다. 수행을 하든 안하든, 또 서울대를 가든 안가든 그 절대적 평등성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모종의 유사종교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기를 가장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애초 절대계의 삶이 아닙니다. 그저 기만일 뿐입니다.
명상, 영성, 마음, 심리, 깨달음, 의식 등의 이런 단어들은 마치 '절대계의 언어'인 것처럼 착각되지만, 이러한 언어 및 그 부속활동을 더 소비한다고 절대계의 원리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소비는 엄연한 상대계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절대계인 것처럼 포장해 실은 상대계의 문법으로만 모든 삶을 펼치고 있으면서, 정당한 상대계의 구성원리들은 다 무시하고 자기가 제일 높은 존재인 것처럼 기만하고자 할 때, 이러한 삶은 통째로 양아치의 삶입니다.
양아치들의 특성은 늘 제도권을 무시하며 자기가 더 잘났다고 주장하면서, 위기가 생기면 언제나 제도권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를 무시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부모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아동의 모습과 같습니다.
양아치들에게 이처럼 상대계의 관계적 세상이란 것은 자기가 유리한 대로만 상대를 남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관계가 중요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에 진심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병이 아주 깊습니다.
양아치들의 대표적인 착각은 자신이 매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이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는, 양아치들이 늘 열등감과 싸우느라 에너지를 많이 쓰고 지치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실함은 무리하게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경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갖지 않은 것과 하지 않은 것을 존중할 때 성실한 삶이 펼쳐집니다.
절대계와 상대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현명한 비결은 바로 이 '경계를 존중하는 성실함'에 있습니다.
성실하면 자연스레 절대계와 상대계의 경계가 존중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정말로 깨달은 이들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사회적 권위들을 존중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을 존중한다고 자기가 존재의 평등성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아치들은 늘 권위와 투쟁합니다. '강력한 권위를 얻는 법' 등을 말하며, 자신이 어떻게든 가장 높은 상대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기만적 속임수'를 쥐어짜내려고 합니다.
인간 자신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경계인 절대계와 상대계의 경계를 속이려는 이가 다른 이들도 속이게 됩니다.
이것은 역으로 우리가 실존상담자를 믿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실존상담자의 이해는 절대계에 대한 존중을 가장 먼저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존상담자의 성실함은 이 근본적 경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합니다.
실존상담자는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고, 남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남에게서 뺏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가 도덕주의자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경계를 흙발로 짓밟고 유린하는 폭력이 싫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존중하지 않고 다 자기의 도구적 소유물로 여기는 이들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함부로 사적 공간을 침해할 때의 그 아픔이 더는 인간세상에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경계가 침범된 이가 남의 경계를 침범하게 됩니다. 자기는 '선한 의도'로 그랬다고 말합니다. 자기만 늘 죄인이냐고 항변합니다. 모든 폭력배는 자기 편을 지키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폭력을 행사합니다. 모든 폭력적 독재자는 자기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독재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을 위한 선한 의도를 주장한다 해도 이들은 사실적으로 선하지 않습니다.
선함은 경계를 존중하는 성실함에서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실존상담자가 그런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더라도 선하게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