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음성언어"
한 원시인이 추운 겨울날 병으로 사랑하던 이를 잃게 되었습니다.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오르는 어떠한 기운이 그의 입을 통해 터져나옵니다.
"으어어어어어어어엉!"
또 어떤 원시인이 긴 노력 끝에 사냥에 성공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를 맞이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은 함께 목소리를 냅니다.
"우와아앙!"
어떤 원시인은 숲을 헤매다가 지쳐가는 와중에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보게 됩니다. 열매를 따서는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갑니다.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상큼한 과즙이 그의 목을 적십니다. 탄성이 나옵니다.
"와아!"
바로 이 소리들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음성언어입니다.
마음은 문자언어가 아니고, 문자언어로 구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은 소리고, 음성이며, 진동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근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마음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은 너무나 과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합니다. 다 소설들입니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소설로 써서 자기를 미화하는 일에 우리는 지나치게 능합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텔링에 대한 집착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언어에 대한 숭배가 마음의 고통을 낳습니다.
문자언어가 숭배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장을 통한 자원의 축적이 가능해서입니다. 문명사에서 사유재산제와 계급제는 문자언어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졌습니다.
농경생활에 필요한 절기의 정보를 문자언어로 저장해서 보유한 이들은 부족사회에서 신적인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예언자처럼 존경받았습니다.
문자언어는 경험을 소유함으로써, 그 경험을 주체적으로 반복할 수 있는 것 같은 현실을 창출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음성언어는 즉시적이며 일회적입니다. 소유될 수 없습니다. 발화자의 권위와 권력을 구조적으로 증진시켜줄 소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자언어에 대해 음성언어는 천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말해진 것'과 '말함'이라고 구분합니다.
문자언어는 '말해진 것'만이 계속 모방되고 복제되어 반복될 뿐입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에 좋은 예가 유튜브입니다. 오늘날 유튜브는 음성언어를 위장한 대표적인 문자언어의 매체입니다. 거기에는 말해진 정보만 있지, 말하는 나는 없습니다. 이것은 개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존이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언어는 실존 대신에 관계의 논리로 작동합니다. 인기가 없으면 그것은 존속되지 않고 폐사됩니다. 돈과 권위라는 재산축적의 소재가 될 수 없어도 금방 폐사됩니다. 재산을 모아 상위계급이 되려고 조건적인 관계에 대한 눈치 속에서 말해진 것들만이 있을 뿐, 눈치보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말하는 실존은 없습니다.
이처럼 '말해진 것'에 의해 '말함'이 가로막힘으로써, 실존은 소외되었습니다.
음성언어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소외로 이어졌습니다.
정당한 이야기(narrative)를 갖지 못한 이는 말해선 안된다는 압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주인공처럼 보다 탁월한 문자언어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이들만이 자기를 주장할 수 있었고, 나아가 문자언어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작가들은 마치 신과 같은 권력의 주체로 상정되었습니다.
근대는 이 문자언어에 대한 광신이 극을 달린 시대입니다. 근대를 대표하는 계몽주의와 그로 인한 통합주의는, 작가적 주체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지 못한 '약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보급해줌으로써, 그들을 '사람이 되도록' 돕고자 했던 의지를 드러냅니다.
문자언어란 곧 동굴 속의 개돼지들을 위한 새로운 쑥과 마늘이었던 셈입니다.
"민족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라는 전제하에 민족주의는 시작되었습니다. 히틀러도 이 문자언어의 광신도로서 유태인과 집시들을 학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만의 길을 간다."라고 부르짖는 이들을 보면 다 자기가 스토리텔링한 자전적 소설을 따라 사는 경우가 절대적입니다.
삶에 앞서 삶을 이끌고자 하는 문자언어를 우리는 '이념' 또는 '윤리'라고 부릅니다. '본질'이라고 하는 개념의 실천적 용법들입니다.
문자언어[본질]를 삶[실존]에 앞세울 때 생겨나는 현상이 바로 '존재망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된 그 이유입니다.
존재는 진동입니다. 영성서적에 나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성분들은 진동합니다. 고정되어 보이지만, 실은 부르르 떨고 있는 파동입니다.
이처럼 존재는 애초 소리입니다.
문자언어는 이 소리를 가로막습니다. 소리내지 말라고 그 위에 명령어로 된 꼬리표를 붙여둡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마음이 힘든 이유는 소리를 내지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소리낼 자유가 없어 힘든 것입니다.
자유의 근본은 언제나 소리낼 자유입니다. 언론의 자유입니다.
직장생활이 힘들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아아아악!"이라고 소리를 내지 못해 우리는 힘듭니다. 그 소리를 내면 '약한 놈' '참지 못하는 병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새끼' 등으로 낙인찍힐까봐 그 '암묵적인 명령어'에 우리는 스스로 소리를 봉쇄합니다.
이것을 억압이라고 말합니다.
억압은 언제나 자기가 자기의 존재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억압된 것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억압의 내용을 찾으면 억압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 또한 문자언어에 대한 숭배가 만들어낸 착각입니다.
최근에 실존상담연구소에서 하고 있는 '마음쓰기놀이'에서는, 참가자들이 오직 "아!"라는 의성어로만 대화합니다. 서로에 대한 그 어떤 배경지식도 없고, 스토리도 모른 채, 단순하게 음성언어만을 나눕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놀랍게, 마음이 정확하게 회복됩니다.
아무 내용을 몰라도, 마음이 더 빠르게 편안해지고, 불편한 증상이 사라지며, 참가자들은 자유를 체험합니다.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실은 충분합니다.
마음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는, 그 모든 스토리텔링의 소설은 전혀 필요없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정확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복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즉 문법적 규칙으로 꼬이고 꼬인 문자언어가 아니라, 다만 단순하고 명징한 소리 그 자체일 뿐입니다.
"아!"
"아아..."
"아앗!"
"아?"
"아응~"
이 소리들 하나하나가 사실 음표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순간순간의 음표들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는 만큼 우리는 피아노 건반 위를 걸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걸어나간 만큼 우리의 인생은 통째로 노래가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우리의 인생은 '존재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 돌아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아름다게 울려퍼질 그 노래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다해 정성스럽게 연주해낸 그 유일하고 절대적인 인간찬가입니다.
당신이 당신만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삼류소설을 쥐어 짜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라는 단순한 초특급의 소리를 내면 됩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여기에 사람 있다는 그 초특급의 소리만을 내면, 당신의 인생은 늘 평안하고 또 자유롭습니다.
진짜로 마음은 이야기가 아니고, 텍스트가 아니며, 문자언어가 아닙니다.
작문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소설을 읽듯이, 문자언어로 된 그 프로그램의 내용을 상냥하게 '알아봐줘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마음을 자꾸 알아봐주려고 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노트북에 소설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우리 자신의 몸으로 음표를 찍는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특이점이 온 곳이군."이라며 그 자리에서 몸을 진동하는 것입니다.
이 즉시적이고 일회적인, 그렇기에 즉자(卽自)적인 음성언어를 자꾸만 문자언어로 억압하기에 우리는 '즉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 즉시 나'로 드러나지 못합니다. 나는 자꾸만 잃어지고 잊혀집니다. 내가 없으니 사는 일이 영 재미도 의미도 없이 공허하기만 합니다.
단순한 소리 하나로 이 모든 것은 돌이켜질 수 있습니다.
실존은 음성언어로 사는 일입니다.
실존상담은 음성언어인 우리 존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실존상담자는 당신의 음성을 사랑합니다.
"아!"
"아!"
사랑은 언제나 공명해서 더 큰 것이 되는 작용입니다.
존재의 노래는 이미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음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