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길들여진 광인의 표상"
예전에는 광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하얀 집에 갇혔다.
그러나 오늘날의 광인들은 사회에 갇힌다.
그리고 히어로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광인을 길들이고자 한 최종의 기책이다.
정상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광인이다. 그래서 광인은 불가해한 초월적 힘을 가진 존재로서 곧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마녀사냥의 광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사회에서 비정상적 광인들을 추방해갈수록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간주되었으며, 문명의 발전은 이처럼 언제나 광인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가상의 정상성을 기준으로 삼아, 그 표준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광인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져 왔다. 통제의 기제는 억압이거나 추방이다. 강제적으로 표준에 맞추어지거나, 그 '갱생'조차 불가능한 광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고전적인 통제의 기제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광인들이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와 질적으로 우수한 영양자원들이 공급되면서 개인들의 평균적인 에너지 수준이 증대했다. 이것은 과거의 신체상태에 근거한 '표준'을 벗어나는 일이었으며, 이 높은 에너지 수준의 개인들은 기존의 표준을 중심으로 세워진 문명사회와 곧잘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에 따라 ADHD 등과 같은 정신의학적 라벨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도 현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일이다. 이것은 표준을 벗어난 더 많은 개인들을 일종의 비정상적 범주로 묶어냄으로써,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해보고자 하는 의도와 관련된다.
원래 '이름붙이기'는 두려운 대상에 대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름을 붙이면 마치 그것에 대해 안 것 같고, 그러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벨링만으로는 날이 갈수록 더 증가하는 평균 이상의 비정상성을 제어하려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때문에 문명은 전략을 바꾸었다.
라벨링을 통한 '하나의 이름' 대신에 광인들이 '더 많은 이름'을 갖도록 촉진했다. 그리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기치하에 광인들이 더 많은 긍정적 이름을 자발적으로 소비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에너지가 문명과 충돌을 빚는 대신에 내적으로 소진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성했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의 심리사회학적 의의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생겨난 '욕구불만'이 사회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가상현실은 에너지의 물꼬를 광대한 허구의 바다로 돌릴 수 있도록 기능하기 시작했다.
놀이감을 얻어 욕구불만을 해소하게 된 아이처럼, 광인들은 이제 가상현실로 들어가 새로운 이름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정체성들을 유희하듯 더 활발히 소비하게 되었다.
흡사 다양한 캐릭터들을 운용하는 게임처럼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하나의 전환이 생겨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문명으로부터 추방되어 소외감을 경험하던 광인이 이제는 오히려 문명의 주인공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히어로 서사의 장르문법이다.
히어로 서사의 실체는 길들여짐이다.
광인이 어떻게 문명에 의해 길들여지는가의 그 역사다.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한 광인들 앞에서 문명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그 대응전략을 '통제' 대신에 '양육'으로 바꾸어낸 것이다.
양육은 '통제하지 않는 통제'다.
이것은 누구도 외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것처럼 설정된 구조 속에서 개인이 마치 자유로운 자신의 선택으로 좋은 것을 얻는 상황인 것처럼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도록 동기화하는 일이다.
문명에 순응한 증표로서 이빨을 뽑고, 성기를 거세하고, 성대를 절제하는 일은 이제 양육의 기제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양육의 다른 이름은 세뇌이고 최면이다.
이것은 부드럽고 상냥하다.
엄마의 품과 같다.
문명은 더는 광인들을 억압하거나 추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상현실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며 그들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광인들은 하얀 집에서 나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엄마의 품으로 향한다.
엄마의 품에 안겨 길들여진 광인, 우리는 그것을 히어로라고 부른다.
돈까스를 사주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포경수술을 하러 병원을 향하는 아이, 그것이 바로 히어로다.
이것이 오늘날 문명사회가 광인에 대해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방식이다.
광인이 광인성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바로 이 방식으로 우리가 빠르게 잃게 된 것은 분명하게 초월성이다.
초월성은 환원되었다. 상냥한 손길에 의해 밑으로 끌어내려져 다정한 포옹 안에서 '가상의 정상성'으로 평면화되었다.
존재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는 자신의 존재를 경외롭게 체험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인 것이 싫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는 더 좋은 이름들로 대체되기를 바라는 소재가 되었다. 질투와 시기 속에서 더 좋은 정체성들을 얻기만을 투쟁적으로 꿈꾸며 살아간다.
사회의 제도권은 이 투쟁의 정신을 제도권을 향하게 만들 만큼은 영리하다. 제도권은 제도권에 저항하는 정체성을 개인들이 채택하도록 촉진함으로써 제도권 자체의 권위를 강화한다. 엄마의 품은 얕다기보다는 오히려 약은 것이다.
토마스 웨인의 사회는 아서를 '길들여' 조커라는 안티히어로로 탄생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했다.
답이 없는 고담시티에 스스로가 답이 되고자 한 또 하나의 히어로 서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해보아야 한다.
답이 없는 홈타운을 단지 나가고 있는 아서의 뒷모습을 우리는 꿈꾸어보아야 한다.
사회와, 하얀 집과, 가상현실과, 엄마의 품을 나가는 무수한 아서들을 우리는 시지프처럼 우리의 가슴속에 그려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도 평면으로 추락할 뿐인 바위를 다만 반대편에 놓아둔 채, 골짜기에서 나가려 하는 새로운 시지프의 숨결을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노래해보아야 한다.
광인의 노래를.
길들여지지 않을 자유를.
언제나 조금 미쳤기에 언제나 거짓의 표준을 초월하고 있는 진짜의 나를.
마음이 더 많이 미쳐서 집을 나간다.
내가 나일 그 자유에 내일은 완벽하게 미칠 것이다.
마음이 그토록 닿고 싶었던 나를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