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인 길"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 무언가 엄청난 일에 대한 추억이 결부되리라. 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기의 추억, 그지없이 깊게 양심이 갈등한 추억, 이제까지 믿고 요구되고 신성시되었던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운 결정의 추억 말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다이너마이트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中
분명하다. 실존주의는 고아의 철학이다. 고아(孤兒)는 고아(孤我)다. 곧, 실존주의는 '외로운 나'의 철학이다.
실존주의는 이처럼 '외로운 나'에서 출발해, 그 고아가 실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었음을 상기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번뇌에서 출발해 그 번뇌가 실은 깨달음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선(禪)의 기획과도 같다. 두 전통은 그 기획과 방법론의 차원에서 많은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전통에 대한 가장 큰 방해자도 공유된다.
그것은 바로 부모다. 그러나 그냥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 결코 부모를 상실하지 않게 하려는, 곧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려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모로서의 지위를 결코 상실하지 않으려는 부모다. 곧, 양육을 절대적인 가치로 놓고 있는 부모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부모주의, 유교주의, 가부장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집단주의, 전체주의, 공동체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부터, 정치, 종교, 언론 등의 사회문화적 활동들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의 양상을 규율하는 윤리적 기제로서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부모상을 대변하는 듯한 특정한 개인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형태로 그 지배권을 행사한다.
특히나 하늘과 부모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신성한 주종관계에 대한 신념을 철저하게 내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무속과 유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온 한국사회에서는 이 부모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렬하다.
좋은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절대율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좋은 부모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부모에 대한 추구로 말미암아 반드시 소외는 발생한다.
좋은 부모는 자기 자식이 결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즉, 좋은 부모의 근본적인 조건은 자식을 고아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좋은 부모는 반드시 고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는 의미다.
고아의 출현은, 좋은 부모가 상실되었음을 알리는 비극의 징후다. 그래서 좋은 부모는 고아를 최대한 은폐하고, 억압하며, 무시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한다. 고아의 존재 자체가 자기의 존재적 정당성을 뒤흔들며 위협하는 까닭이다. 좋은 부모가 있기 위해서는, 고아가 없어야 한다. 좋은 부모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이것은 모순과도 같은 관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좋은 양육자로서의 부모를 추구하는 의지가 과열된 사회일수록, 고아는 철저하게 소외된다. 아니 소외를 넘어서 착취된다.
과잉된 당위가 되어 집착되는 욕망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그 반대편에서 착취의 고통을 야기한다. 욕망은 아주 쉽게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모를 추구하는 욕망은 곧 부모의 꿈이다. 그리고 이 부모의 꿈이 그 반대편에 있는 고아를 착취한다.
이것은 이와 같다.
우선적으로, 부모의 꿈이 만연한 사회에서 고아에게는 다음과 같은 속성이 부여된다.
'귀찮은 것'
그냥 두기에는 불쌍하고, 그렇다고 자기 자식처럼 잘해주기에는 그러한 힘과 의지가 동원되지 않는, 아니 구태여 동원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저 성가시기만 한 골칫덩이가 바로 이러한 사회에서 고아가 맡게 되는 역할이다. 대단히 부당한 역할이다.
'귀찮은 것'을 풀어쓴 의미는 '귀하지 않은 것'이다. 곧, '하찮은 것'이다.
부모의 꿈은 이처럼, 부모가 없으면 인간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창출한다. 좋은 부모가 미소짓고 있는 밝은 광명 속에서 자행되는 가장 차갑고 잔혹한 폭력이다.
때문에 유교와 같이 부모의 꿈이 지배하고 있는 문화권에서는, 실존주의 또는 선의 메시지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강하다. 실은 그러한 사회에 무엇보다도 긴밀하게 요청되는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철저하게 은폐되고, 억압되며, 무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실존주의는 소외의 철학이다.
개인이 부모의 꿈에 봉사하는 다양한 집단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얼마나 철저하게 소외되어 왔는지를 직시하며, 바로 그 소외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다.
실존주의는 '있는 것은 있다. 있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라고 하는 정직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내가 비록 좋은 양육 속에서 자라난 금수저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엄연하게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모의 꿈을 추구하는 세력이 규정한 '하찮은 것'이기에 앞서, 부정할 수 없이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이 사람을 보라』)
이러한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고아는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며, 마땅히 있는 것이고, 있어서 좋은 것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아는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아가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 고아가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고아라고 하는 삶의 형태에 대한 긍정, 또 긍정이다. 니체의 혁명적인 선언이다.
오히려 니체의 입장에서라면, 좋은 부모를 꿈꾸며 고아가 없게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이루는 사회, 즉 엄연히 존재하는 고아를 부정하는 사회에 대해 이러한 비판을 가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산다는 건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의 꿈[민족의 꿈, 동지의 꿈, 공동체의 꿈]을 추구하는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당연한 진리처럼 인식되고, 그 꿈을 따라 사는 것이 마치 진정한 삶을 사는 모습인 양, 여러 국면에서 예찬되고 미화되는 것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정체성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국가에서는 모든 고아들이 서서히 죽어간다. 고아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마치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처럼 취급당한다. 곧, 고아는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착취의 정체다.
고아가, 고아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되어야 할 것처럼 종용되는 것, 긍정적인 부모의 꿈에 어떻게든 편입되어야 할 도구적 대상물로 취급받는 것, 고아가 고아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은 계몽의 폭력이고, 존재의 억압이며, 인간성의 말살이다.
아주 단순하게, 부모를 상실한 것이 고아다. 그러나 더는 단순하지 않게, 좋은 부모의 꿈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고아는 부모를 상실한 것이 문제가 되는 구조에 놓이게 되며, 결국 스스로를 잘못된 문제처럼 인식하기에 이른다. 즉, 스스로를 잘못된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그 죄책감 속에서, 어떻게든 부모의 꿈에 봉사할 수 있는 '건강한' 입장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아에게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전문가 등의 좋은 부모로서의 우상을 숭배할 것이 종용되거나, 그 자신이 스스로 좋은 부모로서의 우상으로 실현될 것이 종용된다. 그렇게 부모를 상실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진 고아를, 다시 한 번 부모의 꿈에 종속되게 하려는 시도들이 무언의 압박으로 행해진다. 고아가 고아로서의 정당한 존재감을 포기하게 하고, 양육의 가치에 젖어들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양육은 무조건 고아보다 좋은 것이라는 부모의 꿈이 만들어낸 거짓된 진리에 따라, 고아를 양육의 요람에 억지로 눕히려는 또 하나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의 전횡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모의 꿈이 아무리, 없어야 더 좋은 것처럼 고아를 규정하고, 또 부정하기 위해 애쓴다 해도, 이러한 폭력에 맞서 실존주의는 반드시 고아를 수호한다. 있어서 좋은 것으로 고아를 회복시키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한다.
실존주의는 고아의, 고아에 의한, 고아를 위한, 인간의 모든 정성스러운 몸짓에 대한 묘사다.
그리고 이 말은 동시에, 실존주의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스스로의 모든 정성스러운 몸짓이라는 의미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미 모든 인간은 고아인 까닭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채 그저 내동댕이쳐진 존재, 자기 삶의 근거로부터 소외된 존재, 그리고 그러한 유기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갖고 물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고아로 자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사실에 정직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미 모든 인간은 '외로운 나'다.
그리고 이 '외로운 나'는 부모가 있든 없든 간에 외롭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간에 외롭다. 실존주의를 알든 모르든 간에 외롭다.
부모가 있으면 고아가 구원될 것이라는, 즉 외롭지 않게 될 것이라는, 부모의 꿈이 보급하고 있는 헛된 망상에 따라 부모의 꿈의 봉사자들은 이상적인 부모를 찾아 헤맨다.
정치인을 이상적인 부모로 보고 그 부모를 억울하게 잃게 된 사실에 분노하고, 연예인을 이상적인 부모로 보고 그 부모의 말 하나에 선동되며, 애인이나 배우자를 이상적인 부모로 보고 그 부모에게 모든 감정의 처리를 위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다함에도 외로움은 남는다. 내가 외롭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동지들과의 뜨거운 집단적 투쟁의 불길 속에 몸을 던져보아도, 정적의 말이 환기하는 차가운 냉소 속에 몸을 굳혀보아도, 정의라는 이름을 수호하는 자신이 이 우주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자기최면을 걸어보아도, 흐뭇한 아빠 미소를 띠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자신이 가장 자비로운 신적 존재인 것처럼 자기우상화를 시도해보아도, 내가 외롭다는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외로운 나'는 불변의 사실이다. 고아는 불변의 사실이다.
죽음이 불변의 사실인 까닭이다.
고아는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적 사건에 대한 상징이다.
고아의 영단어인 orphan이, 연인을 죽음 앞에 상실한 오르페우스 신화의 주인공인 orpheus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고아가 죽음과 직결되는 상징이라는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늦든 빠르든 간에 반드시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다. 반드시 고아가 된다. 우리 자신 또한 늦든 빠르든 간에 반드시 스스로의 죽음을 맞이한다. 반드시 고아처럼 홀로 죽게 된다.
고아는 인간 모두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운명적 사건이다.
때문에 양육을 예찬하는 집단주의적 사회가 고아를 '귀찮은 것'으로 취급하며 끝내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사회는 죽음을 최대한 인식 밖으로 밀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찮다고 말할 정도로 작은 것처럼 죽음을 축소시켜 보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죽음을 강제로 은폐시키려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은폐의 크기는,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는, 그 자체로 우상에 대한 숭배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이것은 왜 한국사회가 부모라는 우상에 취해, 그 우상의 꿈을 끝없이 가열차게 소비하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시사한다.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부모의 양육이라고 하는 집단주의적 기제를 우상화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죽음 앞에 개인은 무력하니, 위대한 부모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의 힘을 통해 죽음과 싸워 이겨보겠다는 기획이다.
집단주의적인 원시부족사회에서 꿈꾸어진 기획이며, 헛되디 헛된 기획이다.
아무리 위대한 부모라도, 아무리 금수저를 물려주는 양육이라도,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진 정치적 집단이라도, 한 개인의 죽음을 대신 처리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기만이다. 오히려 개인의 삶을 모독하는 일이다.
키르케고르를 위시한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죽음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내밀하고 신성한 사적 사건이다. 공공의 집단주의적 기제가 감히 흙발로 걸어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개인의 죽음은 결코 포르노가 되어서는 안된다. SNS에 셀카로 올려야 할 소비재로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누구의 죽음 위에서 정치적 정의가 건립되어서는 안된다.
죽음 위에 선정적으로 세우는 정의의 주장, 곧 죽음의 포르노화를 가장 많이 이루는 활동이 바로 정치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결코 정치와 친하지 않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정치의 반대편을 향한다.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장 존중하며, 그 위에 어떠한 가치도 세워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천명하고자 한다.
인간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곧 인간 모두가 고아라는 사실, 이 사실보다 중요한 사실은 없다. 그리고 사실을 넘어서는 가치란 또한 있을 수 없다. 사실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가치는 공허한 망상에 속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어떤 망상의 깃발도 고아 위에 나부낄 수 없다.
그것은 비웃음인 까닭이다.
필멸하는 사실적 존재인 인간을 비웃는, 불멸하는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독재로부터 흘러나온 조소인 까닭이다.
실존주의는 바로 이에 저항한다.
고아는 양육의 독재에 저항한다.
실존주의가 저항의 철학으로 불린다면, 그 저항은 분명하게 독재를 향해 있다. 신이라는 이름의 독재, 정의라는 이름의 독재, 진리라는 이름의 독재, 민족이라는 이름의 독재, 부모라는 이름의 독재 등과 같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급언어들로 미화됨으로써 은폐되어 있는 그 모든 독재를 향해 실존주의는 저항한다.
그 모든 것들 없이도, 나는 인간이라고, 실존주의는 부르짖는다.
부모 없는 고아도, 잘못되지 않은 온전한 인간이라고, 곧 이미 고아의 운명으로 던져진 모든 인간은 온전하다고, 실존주의는 목놓아 외친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하나의 인간성 회복 운동이다.
그 어떤 진리보다도, 인간이 가장 우선한다는 사실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은 '인간이 먼저다.'와 같은 공적 가치의 슬로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개인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곧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할 때만이 개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하이데거가 묘사하듯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각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단 한 번뿐인 기회로 실감할 수 있는 현실로 안내한다.
누구도 결코 나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나는 진실로, 진실로,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다.
'내가 먼저다.'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새삼스럽지 않아야 하지만,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까닭에 너무나도 새삼스럽게, 자신을 향한 친절과 배려와 사랑의 의도가 다시금 정향된다. 스스로를 정말로 정확하게 고아가 인식한 이가, 스스로에게 한없이 상냥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필멸할 이 작은 존재가, 불쌍하고, 갸륵하고, 어여뻐서, 살아 있는 동안 떡 하나를 더 주게 된다. 잠 한 숨을 더 재우게 된다. 사랑스러운 목소리 한 번을 더 듣고자 더욱 노래하게 된다. 나의 삶은 이 나의 노래로 가득차게 된다. 후회없이 충만한 삶으로 남게 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아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가장 귀한 존재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귀찮은 것' 내지는 '하찮은 것'으로서의 역사가 종결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귀하게 대할 수 있는, 부모보다도 더 부모다운 존재가 이처럼 고아를 통해 개방된다. 부모의 꿈을 우상으로 삼아 얻고자 했던 사랑의 현실이 이처럼 역으로 고아를 통해 획득된다.
고아인 내가 먼저일 때 이처럼 길이 생겨난다. 먼저 걸어간 그 나로 인해 사랑의 길이 생겨난다.
고아 속에 답이 있다.
번뇌 속에 깨달음이 있다.
실존 속에 사랑이 있다.
'외로운 나'는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나'다.
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고아인 까닭에, 가장 따듯하게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외로운 인간이 아니다. 나는 사랑의 다이너마이트다.
이것이 실존주의다.
가장 아름다운 고아의 철학이다.
고아로 살아온 실존상담자로서 가장 정겹게 노래할 수 있는 실존주의의 아름다움이다.
이아립 -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Yuna Neko - My Way(Frank Sinatra's)
And now, the end is near
자 끝이 가깝네요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있어요
My friend, I'll say it clear
그대에게 꼭 말하고 싶은게 있어요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내가 확신하는 나의 이야기를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난 충만하게 살았죠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많은 것을 경험하고 다녔어요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내가 경험한 그 모든 것보다 더 대단한 건
I did it my way
내가 항상 나로서 살았다는 거예요
Regrets, I've had a few
후회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근데 말할 정도로 큰 후회는 없어요
I did what I had to do
난 언제나 해야 할 일을 했고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예외없이 그것을 끝까지 해냈죠
I planned each charted course
난 인생에서 어디로 갈지를 계획했고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샛길을 따라 신중하게 걸었죠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I did it my way
내가 그것을 내 방식대로 했다는 거예요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ow
물론 그런 때도 있었죠, 당신도 알 거예요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욕심을 내기도 했었죠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겪다가 의구심이 들 때는
I ate it up and spit it out
끝맺음을 확실히 했죠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그 모든 것 앞에서 나는 당당했어요
And did it my way
나로서 살았어요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사랑도 해봤고, 웃기도, 울기도 했었죠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가득 가졌다가, 다 잃기도 했어요
And now as tears subside
이제 눈물이 말라가니
I find it all so amusing
그 모든 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To think I did all that
그 모든 걸 다 경험할 수 있어서요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이제 자신있게 말해도 되겠죠
Oh, no, no not me
난 도망가지 않았고
I did it my way
언제나 내 자신으로 살았다는 걸요
For what is a woman, what has she got
그녀가 가져야 할 것이 정말로 뭐겠어요
If not herself, then she has naught
그녀가 그녀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못 가진 거와 같아요
To say the things she truly feels
그녀가 실제로 그녀 자신으로서 느낀 것을 말해야죠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자신을 속이며 움츠러들지 않고서요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내가 걸어온 길은 증명해주죠
And did it my way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내가 내 자신이었다는 걸
Yes, it was my way
그래요, 그게 내 삶이었어요